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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교직 경력 10년입니다. 초등학교 1, 2, 3, 5학년 담임을 해 보았고, 담임교사로 1년, 영어전담교사로 4년 영어를 가르쳤습니다. 원어민과 함께 영어를 가르쳤던 지난 4년은 영어 교육에 대한 시행착오의 연속이었습니다. 그 시행착오 끝에 얻은 결론은, 초등학교에서 영어 교육은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대학 다니던 시절만 해도 초등학교에 영어 교과가 없었기 때문에 학부 시절에 영어 교육에 대한 교육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김영삼 정부가 초등학교에 영어 교과를 만들어 놓은 덕택(?)에 현장에서 저는 끊임없이 영어에 대한, 영어 교육에 대한 연수를 받았습니다. 이글은 학문적 고찰이 아닙니다. 현장에서 마주치는 일상에 대한 경험적 고찰입니다. 이런 일상에 대한 배려 없이 국가의 영어 교육 정책을 쥐락펴락하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에 쓰게 되었습니다.

#1 영어는 많이 쓸수록 좋은 거잖아요?

참으로 '버릇'이라는 것이 무섭다. 뜻하지 않게 지난 4년을 영어 전담 교사로 일했다는 이력 때문일까? 영어 수업 시간도 아닌데 아이들에게 '클로즈 더 도어, 플리즈(Close the door, please)'라고 말해 버렸다. 바로 실수를 깨닫고, 아이들에게 미안하다, 영어 시간인 줄 착각했다고 사과를 했다. 그랬더니 맨 앞자리에 앉은 똘망똘망한 4학년 여자 아이가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왜요? 영어는 많이 쓸수록 좋은 거잖아요?"

1997년부터 5·31 교육개혁안(1995년)을 토대로 시행된 초등 영어 교육 11년이 성과가 있었다면 바로 이 지점일 것이다. 영어는 많이 하면 할수록 좋은 것, 영어는 잘 하면 잘 할수록 좋은 것이라는 사대주의적 허상을 우리 아이들에게 심어 놓았다는 것이다.

#2 한글 상표 옷을 입은 어린이? 한 명도 없어!

4학년 도덕 시간, '자랑스러운 우리 문화'라는 단원이 있다. 한글은 우리의 자랑스러운 문화이니 우리말 우리글을 잘 배우고 가꾸어 써야 한다고 한다. 당연한 말이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너희들 옷이나 학용품 중에 영문이 아니라 한글이 써 있으면 한 번 손을 들어 보라고 했다. 단, 한 명도 없었다. 이런 현실에서 우리가 무엇을 가르쳐야 국민공통기본교육이 될까?

'자, 이제부터 옷을 살 때는 영문이 들어가지 않은 옷을 사 입고, 학용품을 고를 때도 영문이 없는 것을 고르고, 옷이랑 학용품, 장난감을 만드는 회사에 영문 말고 한글을 써달라고 항의 전화를 하자'라고 할 수 있을까? 이렇게 하면 업무 방해 혐의로 고소당하겠지!

우리 문화, 우리의 것을 아끼고 가꾸어야 한다는 것이 교과서적(상당히 국가 교육을 폄하하는 표현입니다)인 구호가 되어 버린 현실이다. 그렇게 가르치는 자로 교단에 서 있는 것이 그 현실과의 괴리감 때문에 스스로가 우스워질 수도 있는, 그런 현실이다.

이것이 국제화 세계화의 증거이며 그래서 영어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한다면, 최소한 교과간, 교과서간 이런 이율배반적인 내용은 들어있지 않아야 할 것이다.

#3 영어 유치원, 절대로 보내지 마세요

미국 유학 경험을 토대로 영어 유치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교사가 하는 말이다. '영어 유치원 교사면서 영어 유치원을 보내지 말라고 하다니?'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하긴 나도 영어 전담 교사로 있으면서 초등 영어 수업 시수 확대 반대 운동을 한다고 하니 아는 이들이 그런다. '너가 영어 교사면서 왜 반대해?'

재건축 아파트 입주로 새롭게 신설된 학교 1학년 담임 교사, 12명의 아이들, 꿈같은 조건이다 하면서 새 학년을 맡았지만, 학년이 끝나가는 지금은 제발 빨리 끝나기만을 바란단다. 12명의 아이들 중 절반 이상이 영어 유치원을 졸업했거나 영어 유치원 경험이 있는 아이들, 한시도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앉아 있으라고 하는 것조차 어렵다고 하소연한다.

왜 그럴까? 이중 언어 사용 환경이 아닌데 이중 언어를 사용하도록 강요받은 현실이 아이들의 정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조기 사교육의 학습 효과보다 자율성, 문제해결능력, 능동성이 떨어진다는 연구 결과가 있는데도 영어 유치원으로 달려가는 부모의 심정은 어떤 것인지 정책 입안자들은 생각이나 한번 해 봤을까?

#4 내가 처음 배운 한국말 "앉아, 조용히 해"

지금까지 3명의 원어민과 협력 수업을 했다. 내가 만났던 원어민 협력 교사 3명은 천차만별이었다. 그 중 한 명은 중계동에서 영어 유치원(사설 학원의 유아 종일반) 교사 경험이 있었다. 혼자서 열두 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매일 진땀을 뺐던 그에게 한국인 협력 교사가 옆에 있으면서 이것 저것 아이들 수업 태도를 지적하며 교육과정을 이끌어주는 것이 왠 떡이냐 싶었을 거다. 틈만 나면 나한테 이런 말을 했다.

"영어를 가르칠 때는 한국인 교사가 꼭 있어야 한다. 나는 처음에 학원에서 영어 가르칠 때 제일 먼저 배운 말이 '앉아, 조용히 해'이다. 내가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친 게 아니라, 아이들한테 한국말을 배웠다. 학원은 보내는 시간과 들이는 돈만큼 효과가 있는 곳이 아니다. 대부분 쓸데없는데 시간을 보내고 만다. 한국인 교사가 옆에 있었다면 금방 정리할 수 있는데 나 혼자 하려니 너무 어려웠다. 영어를 잘 한다고 영어를 잘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여기에 한 마디를 덧보태고 싶다. 영어 전담 교사가 고래고래 소리쳐야 정리되는 것이 담임교사가 하면 한 마디로 정리될 수 있다. 이것이 초등학교 현장의 현실이다.

#5 말이 안 통하니, 설명은 안 하고 반복만 하지!

원어민 교사가 영어를 가르치는 것이 비용을 들인 것에 비한다면 비효율적이라는 이야기다. 우리는 원어민 교사와 협력 수업을 하면 살아 있는 '실용 영어'를 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막연히 기대한다. 그러나 대답은 '아니다'이다.

전혀 아니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교실 환경이라는 것이 그런 것을, 그런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40분 수업, 인사하고, 안부 묻고, 지난 시간 복습하고, 이번 시간 공부할 내용 확인하고 학습한다. 그리고 그 표현을 활용한 노래나 놀이를 하고 정리한다. 이렇게 계획한대로만 된다면 모르겠다. 늘 변수가 발생한다. 이 변수를 통제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한국인 협력교사의 몫이다.

원어민 교사들은 문법이나 상황에 대해 아이들이 배운 표현이 아주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설명하는 것을 아예 포기하거나, 너무 장황하게 설명해 아이들을 질리게 하거나 둘 중 하나다. 그래서 한국인 협력 교사는 '영어로 하는 영어 수업'이라는 말을 신뢰하지 않는다. 비효율적이며 비현실적이다.

한국말로 해야 할 것이 분명히 존재하는 현실에서 영어로 우물거리다 보면 이도 저도 되지 않는다. 40분, 그냥 지나간다. 아무리 유창하게 영어로 말한들 무슨 소용이 있나, 알아듣는 아이들이 없고, 알아들으려고도 하지 않으려는 아이들이 있는데.

<2편이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12월 16일 있었던 영어교육토론회 발제문을 일부 수정한 것입니다.



태그:#영어교육시수확대, #초등영어, #조기영어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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