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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부천 상동고 졸업식장에서  답사를 하고 있는 이건호군. 자신만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푼 내용으로 감동을 주었다.
 경기 부천 상동고 졸업식장에서 답사를 하고 있는 이건호군. 자신만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푼 내용으로 감동을 주었다.
ⓒ 최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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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치토론강사로 활동하고 있는 나는 주기적으로 연설문 원고 작성에 관한 상담을 받는다. 요즘 같은 졸업시즌에는 송사, 답사에 관한 문의, 새 학기에는 임원 출마 연설문, 취업, 수시 입학시즌에는 자기소개서에 관한 문의가 많이 들어온다. 얼마 전에는 우수한 평점으로  대학생활을 마친 학생에게 황당한 전화를 받았다.

“취업을 하려고 하는데 자기소개서를 어떻게 써야할 지 모르겠어요. 내일이 마감인데 자기소개서 써서 제 메일로 좀 보내주세요.” 

“어떤 회사, 어느 분야에 지원하고 동기는 무엇이며, 그 분야에 대한 네 생각은 어떠하며 앞으로 어떤 자세로 임할 것인지 네 이야기를 써야지. 내가 너에 대해 어떻게 알아. 너에 대한 정보를 주면서 자문을 구하는 게 아니라 아예 써 달라고?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한 학생이 자기소개서 한 장도 못 써.”

라고 쓴 소리를 했다.

전교 어린이 부회장으로 있는 초등학교 5학년 한 학생에게도 이와 비슷한 연락을 받았다. 송사에 대한 자문을 구하기에 언니, 오빠들과 함께 했던 일을 떠올리며 보내는 아쉬움과 바라는 마음을 너 개인적인 경험으로 구성해 보라고 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적어보냈다. 첨삭해 달라며. 읽어보니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반론만 나열되어 있었다.

송사(送辭)

  담장 밑 개나리 꽃망울에서 봄내음이 묻어나는 것 같은 화사한 봄이 저만큼 다가와 있습니다. 우리의 배움터에서 여섯 해 동안 정성스런 배움을 닦아, 오늘 희망의 꽃다발을 가득 안은 의젓하고 늠름한 언니, 오빠들의 졸업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언제나 함께 하던 언니,오빠들과 이제는 헤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니 매 순간마다 함께 했던 일들이 떠오릅니다.

  언니, 오빠들 언제나 영광의 뒤안길에는 고난의 가시밭길이 있다고 했습니다. 오늘의 이 영광된 자리가 내일을 위한 귀한 순간이 될 것입니다. 그동안 길러주신 부모님과 오직 제자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정성을 다해 바르고 씩씩하게 키워주신 부모님, 선생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모든 일에 정성을 다할 때 먼 훗날 이 나라를 짊어질 훌륭한 기둥이 될 것입니다.(중략)

  언니, 오빠들이 떠나고 나면 허전하고 쓸쓸해질 교정을 생각하니 아쉬운 마음뿐입니다.  부디, 언니, 오빠들의 앞날에 항상 밝은 희망과 행운이 같이 하시길 빌며 재학생을 대표하여 송사를 드립니다. 

                                          2009년 2월 13일  5학년  대표 000 드림

탁월한 연설로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는 미국 대통령 오바마의 연설에 대한 칼럼을 읽었다. ‘스스로 메시지가 된 오바마’라는 글(1월 22일자 조선일보 시론)에서 이화여대 박성희 교수는 “정치인들은 온갖 홍보 전문가들을 중간에 세워 자기이미지와 메시지를 다듬으려고 고심하지만, 사실은 사람 자체만큼 좋은 메시지가 없다는 걸 오바마는 역설하고 있다”며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미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된 오바마는 자신이 메시지라고 설명했다.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나만의 사례와 경험을 풀어놓을 때 감동을 줄 수 있다. 언젠가 글쓰기 강좌를 들었을 때 교수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부모님에  대해 글을 쓴다고 가정하자. 낳아주고 길러주신 이야기는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엄마 몸에는 점이 몇 개인지 나만 알고 있다. 이처럼 나만의 사연을 써라.

2월 12일 아들이 다니는 경기 부천 상동고등학교(교장 이창구) 졸업식이 있었다. 아들이 졸업반은 아니지만 아들 학교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기회라는 생각에 참석했다. 학사보고, 졸업장, 상장 수여, 학교장 회고사, 축사 등은 여느 학교와 같았다. 다만 졸업생 학부모들이 주축이 되어 구성된 상동고등학교를 사랑하는 모임(상사모)의 이미화 회장님이 수여하는 상은 특별했다.

여기에 2학년 대표의 송사에 이은 졸업생 대표의 답사(答辭)에서 눈이 번쩍 띄었다. 바로 이거다. “송사, 답사 어떻게 써요”라는 문의가 들어오면 자신 있게 권해 줄 수 있는 답사의 예문을 발견했다. 화려한 수사는 없었다. 그러나 고교 입학 후 느꼈던 갈등을 이겨내고 학교분위기에 적응하기까지의 과정을 담담하게 풀어 간 내용에 나만의 색깔이 묻어 있었다.

답사를 끝낸 후 큰절을 하고 단장을 내려가는 그 학생의 행동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누가 시킨다고 그렇게 하겠는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에 믿음이 갔다. 우리 아이도 저 정도의 패기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답사가 감동적이었다. 원고를 구하고 싶다”고 했더니 다음과 같은 글과 함께 답사 전문이 도착했다.

“부끄럽습니다. ^^  글쎄요. 저는 이 답사 전문에 대해 잘 썼다고 자신할 만한 글은 아니라고 여깁니다. 다만 제가 칭찬을 듣게 되는 건 제 진심이 청자의 가슴에 와 닿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아무쪼록 부족하지만 도움이 되신다면, 기꺼이 보내드리겠습니다 ^^ 오늘 나쁘신 중에도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답사   

  3년전, 상동고등학교에 갓 입학한 한 학생이 있었습니다. 등교 첫날 엄하신 담임선생님을 만나 머리를 빡빡 밀고 온 그 학생은, 씩씩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에이, 이러려고 이 학교를 온 게 아닌데. 머리 잘 안 잡는다며.” 온갖 짜증과 불만을 토로하며 학교 다니기 싫다고 부모님께 소리 지르던, 그 철없던 학생은 지금 이 자리에 졸업을 앞에 두고 서있습니다. 아직도 많이 부족한 저를 이 자리에 졸업생 대표로 서게 해주신 선생님과, 학우 여러분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선뜻 졸업이라 하면 그 느낌이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영원히 오지 않을 것만 같던 순간이었기 때문이지요. 저뿐만 아닌 다른 학우들 역시 그랬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날은. 바로 이 순간이 되어버렸습니다. 상동고등학교의 교복을 입고 우리 모두가 모교에 모이는 마지막 순간 말이지요.

  한편으론 시원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섭섭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눈물이, 한편으론 웃음이납니다. 모두의 가슴속에 각각 다른 제목과 추억으로 지금 여러분들 가슴속에서 상영되고 있을 상동고등학교 3년의 추억을 소중하게 간직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상동고등학교 선생님, 학우, 학부모 여러분.

저는 바로 작년 4회 선배님들의 졸업식 때 지금 저의 후배 권식이처럼 졸업생 송사를 낭송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부끄럽게도, 졸업생도 아니었던 저는 눈물을 흘리고 말았습니다. 감동적인 졸업식이었다는 칭찬과 함께 네가 울었던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으시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왜였을까요?

  저는 자랑스러웠습니다. 존경하는 선배님들을 사랑하는 나의 모교에서 뵙고 있다는 그 사실이 너무 자랑스러웠습니다. 비록 이 학교를 욕하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또, 소문이 어떨지라도. 제게만큼은 어느 명문고에도, 외국어고등학교보다도 자랑스럽고 소중한 모교, 상동고등학교였습니다. 물론 여러분들도 자랑스럽게 생각하시리라 믿습니다. 졸업한 이후에도 내가 사랑하는 학교를 위하여 힘쓰고, 더 나아가 큰사람이 되는 5회 졸업생들이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이제 열심히 공부했던 것, 운동하고 울고, 웃고 도망도 갔던 그 모든 것을 추억으로 남기고 저희는 정든 교정을 떠납니다. 그 동안 저희를 위해 애써주신 학부모님, 그리고 바른길로 인도해 주시기 위해 모든 노력을 아낌없이 하여주신 교장선생님과 모든 선생님들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훗날 저는 말할 것입니다. 나는 자랑스러운 상동인이었다고. 그곳에 보낸 3년은 내 일생에 다신 찾아오지 않을 행복했던 순간들이었다고.

.                                                         2009년 2월 12일 졸업생 대표 이건호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부천시 웹진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상동고, #졸업식, #송사, #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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