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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만 사천 번뇌의 흔적만 남은 강화 선원사지(江華仙源寺址)
ⓒ 이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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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경은 경(經)·율(律)·논(論)의 삼장(三藏)을 말하며, 불교경전의 총서를 가리킨다 합니다. 이 대장경은 고려 고종 24년~35년(1237-1248)에 걸쳐 간행되었는데 고려시대 간행되었다 하여 고려대장경이라고 하고, 그 판수가 8만여 개에 달하고 8만 4천 번뇌에 해당하는 8만 4천 법문을 실었다 하여 팔만대장경이라고도 부릅니다.

 

 

 

이것을 만들게 된 것은 현종 때 의천이 만든 초조대장경이 몽고의 침략으로 불타 없어지자 다시 대장경을 만들어, 몽고군의 침입을 불교의 힘으로 막아보고자 한 뜻으로 국가적인 차원에서 대장도감이라는 임시기구를 설치해 새긴 것입니다.

 

새긴 곳은 경상남도 남해에 설치한 분사대장도감에서 담당했는데, 강화도 성 서문 밖의 대장경판당에 보관되었던 것을 선원사를 거쳐 조선 태조 7년(1398) 5월 지금의 해인사로 옮겨 보존 중에 있습니다.

 

이러한 팔만대장경의 역사속에 등장하는 강화 선원사지를 자전거를 타고 찾아갔습니다. 강화풍물시장을 지나 처음 마주한 갈림길에서 가파른 오르막을 올라 내리막 길로 내려오다보면 바로 옆에 선원사지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강화 선원사지는 1976년 동국대학교 강화도학술단이 강화도 일원에 대한 지표조사 중 처음 발견했다고 합니다. 당시 이곳에서 몇 개의 주춧돌을 비롯해 보상화무늬 전돌, 범자 새긴 기와, 기붕에 얹었던 잡상들이 확인되었고, 선원면 도감마을과 도감산에 있는 사지로 학술적-역사적 가치가 있어 1977년 사적 제259호로 지정되었습니다.

 

1996년부터 4차례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 건물터와 축대, 배수시설 유구와 연화문 기와, 금동탄생불, 청동나한상, 탄화된 금니시경, 묵서사경 등이 출토퇴어 절터와 관련된 유적으로 규명되었지만, <조선왕조실록>에 전하는 고려팔만대장경을 판각했던 선원사터로 볼 수 있는 고고학적 자료가 확인되지 않았다 합니다.

 

정말 건물지와 배수시설만 덩그러니 남은 선원사지는 북고남저의 지형위에 동서로 긴 4개의 층단을 두고 빼곡히 들어서 있었습니다. 팔만 사천 번뇌의 희미한 흔적만 남은 평온한 선원사지에는 산꿩과 산비둘기의 보금자리였습니다. 선원사지 아래는 연 재배로 유명한 아담한 선원사가 자리하고 있었고, 보살님은 커다란 장독과 씨름을 하고 있었습니다.

 

부처님의 자비처럼 아늑한 너른 강화선원사지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전합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U포터뉴스와 블로거뉴스에도 송고합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선원사, #강화도, #선원사지, #팔만대장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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