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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의 소도시 군산은 식민지 시대 호남평야의 산물을 유출해가는 항구도시로 개발됐다. '빼앗긴 들녘'을 바라보아야 했던 아픔을 갖고 성장한 도시, 호남평야가 서해 쪽으로 달리다가 광활한 흐름을 거둬들이는 끄트머리, 충남과 전북을 잇는 금강이 유장한 흐름으로 바다로 안기는 하구.

금강 하구둑에 서면 바다인지 강인지 모를 너른 물빛 위로 큰 바람이 미끄러진다. 이곳에 이광웅 시인(군산제일고 국어교사였다)의 시비가 있다. 바람을 맞고 선 그 바위 위에는 그의 시 '목숨을 걸고'가 새겨져있다.

이 땅에서 / 진짜 술꾼이 되려거든 / 목숨을 걸고 술을 마셔야 한다.
이 땅에서 / 참된 연애를 하려거든 / 목숨을 걸고 연애를 해야 한다.
이 땅에서 / 좋은 선생이 되려거든 / 목숨을 걸고 교단에 서야 한다.
뭐든지 / 진짜가 되려거든 / 목숨을 걸고 / 목숨을 걸고……

3. 학원강사, 막노동, 복사집, 그리고 민주화 운동
- 돌아온 그들, 징글징글한 한 세월 건너기

국어교사이자 시인이었던 고 이광웅 씨는 국가폭력에 의해 7년형(5년 복역 후 가석방)의 억울한 옥살이를 하고 나왔지만, 참교육 운동이라는 당시 시대의 목소리에 정직하게 응답했고, 그 대가로 해직되었다.
▲ '무엇이든 진짜가 되려거든 목숨을 걸고' 국어교사이자 시인이었던 고 이광웅 씨는 국가폭력에 의해 7년형(5년 복역 후 가석방)의 억울한 옥살이를 하고 나왔지만, 참교육 운동이라는 당시 시대의 목소리에 정직하게 응답했고, 그 대가로 해직되었다.
ⓒ 문화웹진씨네트워크 모철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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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마시기도, 연애도 '목숨을 걸고' 하라니, 그는 무척 열정적인 사람이었나 보다. 92년 12월 22일 시인이 52세로 세상을 뜬 후 6년 후인 98년, 그를 기억하는 이들이 시비를 세웠다. 지인들은 그를 '작고, 곱고, 여린 사람', 그러면서 동시에 '지독히도 고지식하고 순정했던 사람'으로 기억한다. 특히나 천진무구한 시 세계를 펼친 뛰어난 서정시인으로 기억한다.

이광웅 씨는 오송회 사건 피해자들 중 전기고문을 가장 심하게 받았고, 긴 실형(징역 7년 중 5년 복역 후 가석방, 자격정지 7년)을 살았고, 일찍 세상을 등졌다. 당시 병명은 위암이었지만 지인들은 그가 징역살이 때부터 고문후유증을 심하게 앓았다고 말한다.

87년 6월 항쟁으로 이어진 민주화의 물결, 그 덕분에 이듬해 정국이 유화국면에 접어들면서 오송회 피해교사들도 복직되기 시작했다. 학교사회에선 마침 참교육 운동이 일고 있었고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창립되었다. 주저 없이 전교조에 가입한 이씨는 당시 여러 교사들처럼 해직되었는데, 이후 복직을 거부했다. 육신과 마음에 억울한 상처가 깊이 팬 와중에도 시대의 물결에 몸을 던진 사내, 고지식하고 순정했던 그 사람다웠다.

먼저 간 이씨를 포함해, 오송회 피해교사들은 대부분 군산제일중고등학교의 국어와 미술교사였다. 이 학교는 군산시 초입 아담한 산기슭에 있다. 원래 기독교계 학교였다가 1975년 재단장해 개교했는데, 당시 학교측은 전북 각지에서 유능한 교사들을 스카우트해왔다. 82년 사건 무렵, 오송회 교사들도 그렇게 모였던 재능 있는 젊음들이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감옥살이를 마치거나 가석방된 그들은 80년대 중후반, 모두 군산으로 돌아왔다. 자격정지형을 받았으니 그 기간 동안 복직은 불가능했다. 죄 없는 자신들을 가뒀던 법이 덧붙여 강제한 '자격정지'는 생활고뿐 아니라 자존감에도 상처를 줬다. 이 악물고 학원강사를 하려해도 주위의 따가운 시선을 피하기 어려웠다. 등 뒤로 들려오는 사람들의 수군거림, 눈앞에는 자신을 힐끗대는 혐오의 눈빛들.

박정석, 이옥렬, 강상기 씨는 그나마 익명성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서울 학원가로 올라갔다. 황윤태 씨는 사업에 뛰어들었고, 제일 젊었던 전성원 씨는 약대에 진학해 생의 2막을 새로 열었다. 이들은 99년에 이르러서야 전원 복직되었지만, 정착을 못하고 아예 교단을 떠난 이들도 있었다. 미술교사였던 엄택수 씨는 실내장식, 삽화 작업 등 생업을 찾아 교단 외곽을 떠돌게 되었다. 전성원씨는 자신에게 고통만 준 '조국'을 뒤로 하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채규구 씨는 사건에 연루된 82년 당시 젖먹이 딸아이를 하나 둔 신혼이었다. 아내가 둘째를 임신한 사실을 모른 채 끌려갔고, 재판 당시 그의 형은 변호사 선임비용을 벌려고 소를 팔았다. 가세는 점점 기울었고, 출감한 그는 이광웅 씨와 함께 군산 학원가에 남았다.

"학원이 쉴 때는 공사판에서 막노동을 했어요. 날품팔이를 해도 경찰은 저를 감시하더군요. 사회주의 혁명 완수하려고 했지? 실패하면 중국으로 망명할라 그랬지? 하면서 비아냥대는데, 정말 어이가 없었어요."

어처구니없는 수모 속에서도 채씨는 군산을 떠나지 않았다. 다른 교사들과 달리 그는 군산에서 나고 자랐다. 고향마저 등지면 그 패배감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채씨가 감옥에서 나온 후 어느 날 거리에서 어떤 알콜중독자가 그에게 다가왔다. 말을 들어 보니 그는 학생운동가 출신의 노숙자였다. 그 나름으론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채씨에게 접근했던 것일까. '어쩌다 저런 지경에 이르렀을까.' 자세한 사정은 몰라도 그런 몰락이 채씨 자신의 미래일 수는 없었다.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내 죄 지은 것 없으니 이제부터 더 씩씩하고 당당한 시민으로 살아가야겠다. 그것만으로도 난 역사 속에서 내 역할을 한 것이라 생각한다. 절대 피폐해지지 않겠다.'

복직이 된 후 빈곤은 어느 정도 벗었어도, 주변의 괄시와 혐오는 여전했다. 채씨는 어디를 가도 '간첩선생'이었다. 복직해서 중학교로 돌아가니, 1학년 학생들이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었다. 얼마나 끔찍한 세월을 견뎌내고 마주하는 아이들인가. 다시 삶의 희망을 움켜쥔다면, 그 실마리는 제자들의 웃음 속에 있을 것이었다. 그런 아이들도 2학년에 올라가면 어느 날 찾아와 이렇게 말하곤 했다.

"선생님. 우리 선생님이, 선생님이 이상한 말 하면 신고하래요."

자격정지 기간이 끝났어도 경찰들의 감시는 여전했다. 가끔 울리는 전화벨과, 수화기 저편의 "잘 지내시죠?" 하는 야릇한 질문도 소름이 끼치다가 어느 정도 이골이 났다. 이런 감시는 93년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누그러지다가 98년 국민의정부가 열리고서야 완전히 사라졌다. 그러나 무엇보다, 아이들마저 '간첩자식'이라는 소리를 듣고 자라야했던 점은 두고두고 한으로 남아있다. 세상이 둘러친 편견과 멸시의 감옥에서 가족들까지 덩달아 옥살이에 내몰린 것이었다.

그런 사정은 오송회 사건 피해교사들 모두에게 마찬가지였다. 연행될 당시 신혼이었던 한 동료는 출옥 이후 길거리에서 채소 행상을 했다. 수감 당시 그의 노모는 경찰서를 찾아가 "불쌍한 내 자식 내주고 이 애미가 옥 살게 해달라"며 통곡했다. 그는 결국 출옥한 지 2년 만에 이혼을 당했다. 가족이 뿌리 뽑히는 시절이었다.

채규구 씨(오른쪽)가 당시 동료교사였던 조인호 씨(현재 군산제일고 교장)와 학교 복도를 걸어간다. 지독한 한 세월 건너가면서도 학생들의 웃음 속에서 희망 한 줄기를 보았던 그다.
▲ 교사의 길 채규구 씨(오른쪽)가 당시 동료교사였던 조인호 씨(현재 군산제일고 교장)와 학교 복도를 걸어간다. 지독한 한 세월 건너가면서도 학생들의 웃음 속에서 희망 한 줄기를 보았던 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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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살이, 생업박탈, 감시와 미행, 가정의 붕괴…. 칠흑 같은 세상이 그들의 뒤통수를 향해 연달아 내리친, 도무지 알다가도 모를 홍두깨였다. 가장 연장자였던 조성용 씨는 그 '홍두깨'의 정체를 두고, 오래도록 눈 부릅뜨고 맞서왔다. 다양한 사회과학 서적 독서와, 민주화 운동 참여를 통해서였다.

한동안 복직하지 못한 교사들처럼, 조성용 씨도 석방 후 방송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청춘을 바친 직장은 그를 파면시키고 퇴직금을 몰수했다. 그에겐 학원가라는, 일종의 보루도 없었다. 거울을 보니 육신은 벌써 오십 줄에 접어들고 있었다. 한 평도 안 되는 컴컴한 독방에서 지낸 탓인지, 출옥 직후 밥상의 숟가락까지 휘황찬란해 눈뜨기 어려울 만큼 세상이 낯설었다. 그러나 어떻게든 먹고살 방도를 찾아야 했다.

궁여지책으로 중고 복사기 두 대를 대여해 복사집을 열었다. 사건에 연루되기 전까지, 그는 스물여덟에 KBS 공채에 합격해 여러 도시를 순회근무하며 능력과 명예를 쌓아온 중견 방송인이었다.

"정말 웃긴 게, 출옥 후에 잠시 일을 안 하니까 경찰들이 '저 사람이 또 뭔가를 도모한다'고, '어디선가 자금을 받는다'고 의심을 해요. 그래서 대학가에서 복사집을 여니까, 이번에는 대학생들 데모를 조종한다고 의심해요. 무얼 해도 안 되고, 안 해도 안 되는 시절이었어요. 죽으라는 건지 살라는 건지. 그 사이 식구들 고통도 이루 말할 수가 없고요. 전직 공무원이었던 집사람도 행상을 나갔어요. 육체노동을 안 해 본 그 사람이 갑자기 행상에, 공장 나가 오래 고생을 하니까 척추에 이상이 와서 걸음도 잘 못 걸었어요."

'여기저기서 날 받아주는 데가 없어서 민주화운동이나 하게 됐다'고 조성용 씨는 농담처럼 말한다. 석방된 이듬해인 86년 그는 전국민족민주운동협의회(전민협) 회원으로 가입하면서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었다.

69세 때인 2005년 그는 전주 KBS방송국에 '재입성'했다. 방송심의위원이라는 계약직 직함이었다. 당시 전주 시민사회 활동가들은 칠순을 앞둔 청년의 오뚝이 행보를 두고 축하연을 마련했다. 그 자리에는 오송회 사건의 '동지'들도 참석했다. 조성용 씨와 안타깝고도 묘한 인연을 맺게 됐던, 지금은 작고한 윤한봉 씨도 찾아와 그를 축하했다. 한스러움과 기쁨이 뒤섞인 자리였다.

4. 광주-전북-서울 잇는 초대형 사건 될 뻔 했던 오송회
-국가보안법, 권력의 어두운 그림자

 그 시절 한국사회는 어느 분야에서든 조작사건이 '풍성하게' 쏟아졌고, 2006년 참여정부 시절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가 설립되자 많은 사람들이 오랜 세월 눌러둬야 했던 억울함을 들고 찾아왔다.
▲ 진실 그 시절 한국사회는 어느 분야에서든 조작사건이 '풍성하게' 쏟아졌고, 2006년 참여정부 시절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가 설립되자 많은 사람들이 오랜 세월 눌러둬야 했던 억울함을 들고 찾아왔다.
ⓒ 진실과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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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이야기인가, 싶은 오송회 사건은 27년 전 전북에서 벌어진 일이다. 그 시절에는 사회 각 분야마다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들이 '풍성하게' 쏟아졌고, 거의 대부분 권력기관이 만들어낸 조작사건으로 드러났다. 남북한 대치구도를 핑계 삼은 군사정권은 '시국사범'들을 끝없이 만들어내면서 폭력과 공포의 시대를 정당화했다.

오송회와 같은 '분야'인 교육계만으로 좁혀서 들춰보아도 사건들이 줄줄이 나온다. '상록회', '아람회', 교육무크지 '민중교육' 사건, 부산의 '부림' 사건, 인천의 '민중야학' 사건 등이 모두 80년대 초반, 오송회와 같은 시기의 조작사건들이다.

그중 '아람회' 사건은 그 작명 과정이 오송회에 버금가는 코미디였다. 81년 7월 충남과 서울의 교사 6명을 포함해 모두 11명이 '아람회'라는 '좌경용공조직'을 결성했다고 연행됐다. 사실 이들은 대부분 초등학교 선후배 사이였고, 교육문제를 논의하는 소모임 수준이었다.

수사기관은 이들 중 한 명의 딸인 '아람'이의 백일날 모여 모임을 만들었다고 조작하고 '아람회'라는 이름을 붙였다. 분노에 앞서 허탈한 웃음이 튀어나올 만한 대목이다. 연행된 이들 중에는 학생, 군인, 경찰, 심지어 검찰청 직원까지 있었으니, '그 누구라도 이 덫에 걸리면 벗어날 길이 없다'던 국가보안법의 본질을 실감하게 했다. 극악(極惡)을 넘어 무도(無道)함까지 갖춘 덫이었다.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도 그랬지만, 80년 광주를 피로 물들이며 등장한 전두환 정권에도 '시국사범'의 필요는 절실했다. 그에 응답하는 수사기관들의 과잉충성도 이어졌다. 시국사건들을 엮고 해결하면 특별승진이 보장됐다. 정권의 머리와 손발의 이익이 맞아떨어져 국가가 괴물이 되어버린 시대에, 국민은 국민으로 살 수 없었다.

국가보안법이라는 레이더를 작동시키면 땅 위에 숨 쉬는 그 무엇에라도 '죄인' 딱지를 붙일 수 있었다. 죄가 없으면 죄를 만들면 됐다. '국가보안법'을 코에 걸었고, 안 되면 귀에 걸어 그들을 기어이 연행해갔다. 원하는 대로 자술서가 안 나오면 고문을 하면 됐고, 법정에서 혐의를 부인하면 '재수사를 하겠다'고 하면 됐다. 재수사는 그 끔찍한 고문의 반복을 의미했다.

당시 문교부는 각 시도교육위원회에 '전담실'을 설치해 교육민주화에 관심 갖는 교사들의 동태를 파악했다. '보안위원회'를 만들어 사립중고교 교사 채용 때도 과거의 이력을 조회했다. 그러다보니 건전한 비판의식을 가진 교사들을 연행, 구금, 구속하는 사건들이 자주 일어났다.

수사기관들은 수많은 '이적단체, 불온교사, 수괴'의 각본을 붙여놓고, 필요에 따라 사람과 사건을 끌어다가 이름을 붙였다. 오송회 사건 역시 그런 구도 속에서 '탄생'했다. 때문에, 당시 사건의 주체는 '오송회'가 아니라 '수사기관'을 주어로 삼아야 맞다. 그래야만 그 다음의 서술체계가 자연스럽게 성립되기 때문이다.

'수사기관은' 애초 사건의 규모를 크게 잡았다. 조성용 씨가 아닌, 5·18의 마지막 수배자인 윤한봉 씨를 타깃으로 한 것이 대표적이다. 윤씨를 중심으로 엮으면 광주-전북-서울을 아우르는 초대형 간첩단사건으로 부풀릴 수 있었다. 내친 김에 2년 전 광주 상황도 다시 한번 간첩의 선동으로 여론몰이할 수 있었다.

'수사기관은' 이 사건의 큰 가능성을 직감하고, 당시 전주에서 수사를 일단락 짓고 서울로 수사본부를 옮겼다. 헌데 의욕적으로 팔을 걷어붙였건만, 윤한봉 건이 미국 밀항이라는 명백한 알리바이 때문에 불발됐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됐고, 사건은 다시 축소되어 전주로 내려왔다.

'수사기관은' 조준 방향을 문규현 신부 쪽으로 돌렸다. 그러나 그를 '빨갱이의 수괴'로 모는 것은 무리수였다. 박정희 정권 때에도 그런 경우로 로마교황청과 불화가 생긴 적이 있었다. 다시 '수사기관은' 군산제일고 출신 서울대 학생동아리를 리스트에 올렸지만, 그들을 엮었다가는 문제가 더 복잡해질 우려가 컸다. 그렇잖아도 학생운동이 격렬해 정권이 골치를 썩던 시국이었다. 의지와 상관없이 '꿩 대신 닭'으로 잡혀갔던 조성용 씨는 구조 알기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고 이광웅 시인의 시비에 적힌 시 '목숨을 걸고' 처럼 오송회 사건 피해자들은 '목숨을 걸고' 징한 세월을 건너왔다.
▲ 시인의 시비 고 이광웅 시인의 시비에 적힌 시 '목숨을 걸고' 처럼 오송회 사건 피해자들은 '목숨을 걸고' 징한 세월을 건너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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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구조적 사고의 필요성을 절감했어요. 우리 피해자들끼리 가끔 '우리 그때 왜 잡혀들어갔지?' '그 시절에 술을 자주 마셔서 그랬는갑지' 하고 농담들을 했어요. 정말 농담 같은 시절이었지만, 그렇다고 '하필 우리가 운이 없었다'고 고개 떨구면 안 됩니다. 왜 당시 그런 일이 자꾸 일어났는지, 구조적으로 들여다봐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지금이라도 비슷한 악몽이 누구에게라도 되풀이될 수 있어요."

출옥 후 지금껏 진지한 되새김질의 세월을 살아온 그는 '모든 역사는 현대사'라고 강조한다. 지금까지도 '국보법'이라는 괴물을 관에 집어넣지 못한 한국사회의 구조를 제대로 직시하지 않으면, 이 땅 어디서든, 언제라도, 오송회들은 끝없이 조작되고, 누구나 홍두깨를 맞고 감옥에 갇힐 수 있는 것이 현실이다. 촛불시위를 두고도 '배후세력이 누구냐'는 질문을 스스럼없이 공적으로 내뱉을 수 있는 정권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SF영화 '터미네이터' 시리즈가 있다. 머리 속의 칩을 영원히 제거하지 않는 한, 터미네이터는 완전히 망가진 후에도 기어이 눈에 빨간 불을 반짝이며 회생한다. 그리고 살인기계가 되어 목표인물을 향해 돌진한다. 국가보안법은 영화 속 터미네이터를 닮았다. 완전히 폐기하지 않는 한, '권력의 의지'가 변질되면 언제든 되살아난다. '권력의 의지'의 변질 위험은 늘 있는 것이어서, 국가보안법의 개정도 보완도 결국은 한계를 갖는 이유다.

"이 시대에 전두환을 욕하는 게 죄가 되는 줄은 알았지만, 김일성이 독립운동 했다고 말하는 게 죄가 되는 줄은 몰랐다"고 당시 한 피해자가 토로했다. 하지만 국가보안법에는 애초 '이건 되고 저건 안 되고'의 논리적 일관성도 없었다. 국가보안법이 눈에 빨간 불을 켜고 작동음을 낼지 모를 어느 날, 우리 중 누군가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김일성이 독립운동 했다고 말하는 게 죄가 되는 줄은 알았지만, 김일성 증손자가 꽃미남이라고 말하는 게 죄가 되는 줄은 몰랐다"고.

그 일관성 없는 해괴한 덫에서 상처 입은 오송회 피해자들, 그들은 2009년에도 가끔 씁쓸한 웃음을 짓곤 한다. TV를 켜면 김연아가 웃는다. 그녀도 간첩으로 몰릴지 모른다. 불과 한 세대 전이었다면….

- 마지막 3부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문화웹진 씨네트워크의 특집기획 연재물로 5·18기념재단의 취재지원과 진실화해위원회의 협조로 만듭니다. 오송회 사건은 총 3회로 맺습니다.



태그:#오송회, #국보법, #조작, #간첩, #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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