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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양왕과 순비가 잠든 그곳에 작은 연못하나!!
ⓒ 이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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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를 타고 점심께 고양시청에 들러 잠시 더위를 피하고 목도 축이고 난 뒤, 교외선을 따라가는 비좁은 도로를 따라 원당삼거리 앞에 이르면 고려의 마지막 왕이 잠든 곳으로 갈 수 있습니다.

열심히 달려온 도로 왼쪽으로 빠져 원당1통회관 앞을 지나, 한적한 왕릉골길-공양왕길을 천천히 10여 분 정도 달리면 사적 제911호인 고려공양왕릉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공양왕릉길 옆 황금들판
 공양왕릉길 옆 황금들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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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공양왕릉은 폐가입진(廢假立眞)이라는 명분으로 우왕과 창왕을 신씨로 몰아 폐위시킨 이성계 등에 의해 즉위한 이름뿐인 왕인 공양왕(1389-1392)과 그의 부인 순비 노씨의 무덤으로, 쌍능 형식을 취하고 있고 무덤 앞에는 비석과 상석이 하나씩 놓여 있습니다.

두 무덤 사이에는 석등과 돌로 만든 호랑이 상이 있는데, 호랑이 상은 고려의 전통양식으로 조선 초기의 왕릉인 태조와 태종의 것과 비슷하다 합니다. 무덤 양쪽에는 문신과 무신상을 세웠고, 대부분의 석물은 그 양식과 수법이 대체로 소박합니다.

공양왕과 왕비의 무덤
 공양왕과 왕비의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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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과 순비의 묘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과 순비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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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무덤 앞 호랑이상이 호랑이가 아니라 삽살개라는 전설이 있습니다. 조선 태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도성인 개성에서 도망쳐 나온 공양왕이 이곳 견달산 아래 도착했을 때, 이미 날이 저물고 사방이 어두웠다 합니다.

두려움과 배고픔에 지쳐있는 왕의 일행에게 건너편 골짜기에 한 가닥 불빛이 보여 찾아가 보니, 마침 작은 사찰이 있어 하룻밤 묵고자 부탁했습니다. 하지만 불교의 나라 고려는 사라지고 새로운 유교의 나라 조선이 창건되어 절에서 머물기는 어려웠다 합니다.

결국 일행은 인근의 대궐고개 다락골 누각에 피신했는데, 남몰래 한 스님이 밥을 날라와 왕에게 드렸고 이 때문에 이후 마을의 이름이 '밥절' 식사동(食寺洞)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소박한 석물 사이에 호랑이상이 있다.
 소박한 석물 사이에 호랑이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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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양왕릉 한편을 보수하고 있었다.
 공양왕릉 한편을 보수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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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느날 공양왕과 왕비가 보이지 않아 스님들과 일행이 온산을 뒤지며 왕을 찾았으나 허사였습니다. 다만 공양왕과 왕비가 귀여워 하던 삽살개만이 골짜기의 작은 연못 속을 향해 계속 짖어댔습니다.

사람들이 이를 이상히 여겨 연못을 살펴보니 사람의 형상이 보였고, 못의 물을 모두 퍼내자 그 안에 왕과 왕비가 나란히 편안한 자세로 죽어 있었다 합니다.

이에 사람들은 두 분의 시신을 정성들여 모셔 연못 뒤 양지바른 곳에 장례를 치르고, 능을 지키기 위해 삽살개 모양의 석물을 세웠다 합니다. 고려사나 왕조실록과 같은 정서에는 공양왕이 강원도 삼척에서 살해되었다고 하는데, 삽살개와 연못의 전설이 고양에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공양왕과 왕비가 연못에 빠져 죽었다는 전설이 있다.
 공양왕과 왕비가 연못에 빠져 죽었다는 전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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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U포터뉴스와 블로거뉴스에도 송고합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고려공양왕릉, #삽살개, #연못, #공양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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