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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의 수선화를 양지에서 음지로 실험 삼아 옮겨보기로 하고 땅을 파던 중에 잠든 개구리를 깨우고 말았다. 개구리만 깨웠는가 했는데 도롱뇽도 깨웠다. 이 녀석들이 어쩌자고 이렇게도 아무 데나 그것도 겨우 육칠 센티미터 정도 깊이에 잠자리를 정했을까, 생각해보니 내가 수선화를 양지에서 음지로 옮겨심기로 한 이유와도 맥이 통하는 것 같다.

수선화 옮겨심으려 했더니, 개구리가 '폴짝'

자던 중에 벼락을 맞은 꼴이 된 참개구리. 미안하다 야.
 자던 중에 벼락을 맞은 꼴이 된 참개구리. 미안하다 야.
ⓒ 김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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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화는 자연 상태에서 피는 꽃 가운데 아마 가장 먼저 피는 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따금 한겨울에 피어나서 사람을 놀라게 하는 개나리도 본격적인 개화는 수선화보다 훨씬 늦다. 오륙 년 전까지만 해도 수선화는 날씨의 변덕에 별 영향을 받지 않았었다. 수선화가 필 무렵에 갑작스런 추위가 없었다는 얘기이다. 꽃샘추위가 몰려온다 해도 서릿발이나 치는 정도였지 기온을 영하 5, 6도까지 끌어내려 피어난 꽃들을 죄다 얼려 죽이는 사태는 내 기억에 없었다.

작년 재작년 연이어 늦추위가 몰려왔다. 사 년 전에는 삼월에 일 미터 가까이나 눈이 쌓이기도 했었다. 그 바람에 봄이 왔다고 신나게 피어나던 수선화꽃이 멀쩡하게 선 채로 꽁꽁 얼어 버렸다. 추위가 물러났을 때 꽃들은 뜨거운 물에 데친 나물처럼 축축 늘어지고 말았다. 소한 대한 등 본격적으로 추워야 할 시기에는 봄처럼 따뜻하다가 정작 봄이 되면 몰아치는 짧은 한파가 지구상의 어떤 변화를 예고하는 것인지 내가 말할 수 있는 영역은 아니지만, 동물이든 식물이든 모든 생명을 가진 자들이 기상이변 앞에서 우왕좌왕하는 시대를 살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수선화는 내 개인적으로 각별한 추억이 깃든 식물이었다. 국민학교 이 학년이었던가, 삼 학년이었던가, 그 해의 어느 날 암자에 기거하시는 외할머니를 찾아갔다가 수선화꽃을 보고는 많이도 아니고 달랑 한 뿌리 얻어다가 심은 뒤로 까맣게 잊고 있었다. 도시를 전전하던 어느 해 집에 와 보니 달랑 한 뿌리였던 수선화가 백여 촉 이상으로 늘어나 있었다. 어머니가 매년 거름도 주고 옮겨심기도 하고 해서 그렇게 늘려놓은 것이었다.

그리고 또 잊고 있다가 십이 년 전 귀향했을 때 보니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번식을 했는데 족히 삼백여 촉은 되어 보였다. 그 가운데 딱 십 퍼센트만 어머니에게 달라고 해서 삼십여 뿌리 정도를 캐다가 마당에 심고 이사를 할 때 다시 옮겨 심었는데 여하튼 그것이 지금은 삼백여 촉으로 늘어났다.

수선화는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땅 속에서 몸집을 키우고 얼음이 어느 계절이면 서서히 싹을 내다가 어름이 녹는다 싶으면 이파리를 내 바깥 기후를 살핀 다음 이제 따듯해졌다 하고 꽃대를 내민다.
 수선화는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땅 속에서 몸집을 키우고 얼음이 어느 계절이면 서서히 싹을 내다가 어름이 녹는다 싶으면 이파리를 내 바깥 기후를 살핀 다음 이제 따듯해졌다 하고 꽃대를 내민다.
ⓒ 김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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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정리를 하자면 외할머니에서 어머니를 거쳐 내게로 전해졌다고나 해야 할 이 수선화꽃이 필 때마다 오래 전에 돌아가신 외할머니를 간간이 떠올리기는 했지만 무슨 그리 깊은 의미 같은 것을 두고 있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이 년을 거푸 늦추위에 당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차츰 뭔가를 느끼고 있었다. 그 어떤 조바심 같은 것이, 초조감 같은 것이 내 안에서 꿈틀거렸다. 그것은 어쩌면, 수선화가 만약에 죽어버린다면 외할머니와의 연결고리가 끊어진다는 안타까움인지도 모른다.

물론 늦추위 따위에 수선화가 통째로 죽을 일은 없었다. 꽃은 얼어 죽는다 해도, 알뿌리는 엄동설한 혹한기에 아무도 모르는 흙 속에서 몸집을 불리고 싹을 내는 식물이었다. 그것을 알면서도 나는 어쨌든 무엇이든 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렇게 연구를 해서 얻어낸 결론이 양지에서 음지로 옮겨 심자는 것이었다. 양지에서는 봄이 아직 안 왔는데도 봄인 줄 알고 싹을 내고 꽃대를 내밀어 비명횡사를 당한다는 아주 단순한 생각이 낳은 결론이었다.

"엄마는 여직 열아홉 소녀인 줄 아나봐"

오매 이것이 뭣이다냐
 오매 이것이 뭣이다냐
ⓒ 김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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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매 이것이 믓이다냐."

날카로운 비명소리와 함께 어머니가 뒤로 발랑 넘어지는데 그 앞에 도롱뇽이 있다. 당신 딴에는 아들이 수선화를 심기 좋게 흙을 잘게 부순다고 만지작거리다가 도롱뇽을 집어 들고는 물컹 하는 감촉에 그만 놀라신 모양이다. 개구리가 나왔을 때는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 보기만 했기 때문에 "어매 깨구락지네" 하고 말았지만 도롱뇽은 직접 손으로 만지고 보니 그 느낌이 아마 심장으로까지 직통했을 터이었다.

"에이 엄마도 참, 자기가 무슨 열아홉 소녀인 줄 아나벼. 아 그걸 보고 그렇게 넘어지면 어떡해."
"무슨디."
"아 이게 뭘 무서워. 도롱뇽이구만."
"도롱?"
"그전에 왜 그 도랭이 알 있었잖어. 설 지나고 보름 지나서 먹으면 여름에 더위 안 탄다고 아버지랑 당숙이랑 잡으러 다니고 했었던 것 말이여."
"이것이 도랭이 알이라고?"
"아니 이것이 말고, 이것이 알을 낳으면 그게 도랭이 알이라고."

어머니는 알겠다는 듯 으응, 하시는데, 실제로 알았는지 아닌지는 차치하고, 내 머릿속을 요란하게 흔들어대는 그림이 하나 있다. 그날 이후 완전히 까맣게 잊고 있었던, 어머니를 하마터면 낙상하게 해서 불치의 상태로 몰아갔을 뻔한, 국민학교 삼학년이었던가 사학년이었던가 하여튼 외할머니에게서 수선화 한 뿌리를 얻어오던 시기와 거의 맞물리는 시절에 있었던 사건이다.

뇌물로 바쳐지기도 했던 도롱뇽 알

어머니가 빨리 묻어주라고 야단이셔서 사진도 제대로 찍지 못했다
 어머니가 빨리 묻어주라고 야단이셔서 사진도 제대로 찍지 못했다
ⓒ 김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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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기에 가설극장이라는 것이 있었다. 농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 이른 봄과 농사일이 얼추 끝난 늦가을 그렇게 일 년에 두 차례 와서 면소재지 옆 공터에 천막을 치고 영화를 상영하는 이동극장이었다. 이때가 되면 마을마다 비상이 걸렸다.

형들은 군용 반도와 자전거 체인으로 은밀하게 무장을 하고, 누나들은 저녁밥을 먹기도 전부터 '구리무'와 동백기름으로 냄새를 피워대며 어른들의 잔소리를 듣는다. 이 집 저 집에서 '썩을년' '미친년' '다리몽뎅이가 성할 줄 아느냐' 등등 소리가 담을 넘는다. 다리야 부러지건 말건 내 알 바 아니라는 듯 누나들은 어둠이 깔린 거리로 하나둘씩 나오고, 마을 어귀에서 기다리던 형들은 그녀들을 호위하며 처음에는 살금살금, 그러다가 차츰 와작와작 웃어가며 가설극장으로 전진한다.

영화는 형이나 누나들만 보고 싶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꼬맹이들도 역시 보고 싶어 했다. 그러나 가설극장용 영화는 대부분 요새 말로 하자면 십구금 성인물이어서, 형들과 누나들의 전폭적인 지원 내지 공모가 없으면 천막 밖에서 덜덜 떨어가며 소리나 듣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꼬맹이들도 대부분 한 번 정도는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영화를 보았거나 안 보았다 해도 본 것 이상으로 실감나게 이야기를 들어서 알고 있었다. 아예 모른다면 보고 싶다 어쩐다 애를 태울 일도 없었을 것을, 감질나게 한 번 보았거나 이야기만 들었던 탓으로 더욱 보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여배우의 젖가슴이 다 나온 것도 아니고 윗부분만 하얀 찐빵처럼 도드라진 모양을 보았을 뿐인데도 그것을 한 번 더 보고 싶어 안달이 날 지경이었다. 그리하여 재우, 종환이, 등 서넛이 작전을 짜기에 이르렀는데 그것이 도롱뇽 알이었다. 말하자면 형들에게 도롱뇽 알을 미리서 뇌물로 바치고 가설극장이 오면 달라붙자는 것이었다.

귀신도 무섭지 않다, 영화만 볼 수 있다면

마을 뒤 '건네산'을 넘으면 오벵이골이 나오고, 이 오벵이골에 딸린 여러 개의 작은 골짜기 가운데 하나로 애장골이 있었다. 물동이 같은 옹기그릇이 무수하게 엎어진 채로 쌓여있는 이 애장골은 말 그대로 죽은 아이를 장사지내는 곳이었는데, 그 아래쪽으로 습지가 있어서 여기에 도롱뇽이 많았다. 여기서 건진 도롱뇽 알을 만약에 누군가 우리더러 먹으라 하면 죽인다 해도 입을 열지 않았겠지만, 용도가 형들에게 뇌물로 바칠 것이고 보면 뭐 어쩌랴 하는 생각으로 우리는 그곳으로 향했다.

우리는 사실 그때까지도 도롱뇽 알을 한 번이라도 먹어보기는커녕 징그러워서 손에 닿는 것도 싫어했었다 게다가 애장골은, 아이 귀신들이 덤벼든다 해서 평소에는 오뱅이골로 수영을 하러 가면서도 애장골은 가능한 한 안 보려고 애를 쓰곤 했었다.

그런데 그날은, 영화를 본다는, 볼 수 있다는 오직 그 하나의 생각이 모든 두려움과 떨림과 금기를 깨버리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야말로 이를 악물고 정신없이 도롱뇽 알을 주워올 수 있었다.

그렇게, 하루를 좋게 바쳐서 건져온 도롱뇽 알을 소중하게 밥그릇에 담아서 살강 밑에 감춰놓고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긴장을 한 탓인지, 도롱뇽을 잡느라 피곤했던 것인지 그날따라 늦잠을 잤다.

"안 일어날래. 얼른 나와서 불 좀 때야."

소리치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눈을 비비며 부엌으로 들어가는 순간 그 사고가 터졌다.

"아이고매, 아이고매 이것이 믓이다냐."

소리와 함께 어머니가 뒤로 벌렁, 문자 그대로 나가떨어지고 있었다. 어머니가 뒤로 넘어짐과 동시에 손에 들렸던 밥그릇이 아궁이에까지 날아와서 박살이 났고, 그 안에 들어 있던 도롱뇽 알들은 마치 깨진 묵사발처럼 흙바닥으로 좍 흩어져 버리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아침부터 어머니에게 "호랭이나 물어갈, 호랭이나 물어갈" 소리를 열 번도 넘게 들어야 했다.

좋은 것만 기억하시는 어머니의 기억 창고

   하나는 외롭다는 듯 하나가 또 나와 둘이 되었다
 하나는 외롭다는 듯 하나가 또 나와 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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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의 그 사건을, 그것을 어머니가 혹시 기억하고 계실까 해서 두 번 세 번 거푸 여쭤보았지만, 어머니는 이미 그날로 다 잊어버리셨다는 듯 전혀 기억을 못하고, 엉뚱하게도 외할머니가 그것을 좋아하셨다는 말씀만 하신다.

"외할머니가 도랭이 알을 좋아하셨다고?"
"으응, 그려어."
"에이, 거짓말. 소고기국도 안 좋아하셨는데 무슨 산 도랭이 알을."
"음마, 참말이랑게."

그 표정을 아마 오꿈하다고 하는 것일 게다. 어머니는 그렇게, 눈을 오꿈하게 뜨고 나를 보신다. 왜 사람 말을 안 믿느냐는, 그런 뜻일 게다. 그런데 외할머니께서 정말 그 알을 좋아하셨던 것일까? 손자인 나는 전혀 기억이 없지만, 딸인 어머니가 그렇게 기억을 하시니, 어머니가 치매로 기억이 불확실하다 해도, 나로서는 일단 믿는 거 밖에는 뭐 다른 방도가 없다. 그나저나 어머니의 기억창고는 아들과 관련해서 좋았던 것만 저장을 하고 안 좋았던 것들은 죄다 잊어버리게 되어 있는 것일까?


태그:#기억, #도롱뇽, #수선화, #기상이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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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것이 일이고 공부인, 공부가 일이고 사는 것이 되는,이 황홀한 경지는 누가 내게 선물하는 정원이 아니라 내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우주의 일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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