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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을 숙위하는 군사
▲ 숙위군 궁궐을 숙위하는 군사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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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벌을 한눈에 굽어보는 산채가 안개에 몸을 숨겼다. 맑은 날이면 한눈에 들어오던 강경포구도 보이지 않았다. 입춘을 지나면서 유난히 안개가 자욱하다. 산채를 떠나는 꺽쇠를 권대식이 자신의 막차로 불렀다.

"네가 아무리 신출귀몰한 무예 솜씨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대궐을 숙위하는 군사들은 무술에 능한 자들이다. 경거망동 하지 말고 조심하고 또 조심하기 바란다."

꺽쇠, 그의 이름은 예사 이름이 아니다. 쇠도리깨를 잘 쓰기 때문에 남들이 붙여준 이름이다. 그에겐 원래 이름이 있었다. 허나, 등판에 로(虜)자 불도장이 찍힌 이후 본명을 버렸다. 그리고 꺽쇠로 살아왔다.

그는 팔도의 무관들이 실력을 겨루는 강무에서 으뜸상을 먹은 철권 고수였다. 그가 팽이자루 다루듯 자유자재로 휘두르는 쇠도리깨는 칼과 활처럼 일반인들의 무기가 아니다. 그것은 특수한 신분에 있던 자들이 휴대했던 병장기다.

"대장님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한양에 들어가거든 우선 배오개 시장에 들어가 서남일을 찾아라."

건국초기 운종가에 자리 잡은 시전은 궁궐과 관아에 물품을 조달하는 창구 역할을 했다. 육의전에서 출발한 수레는 대궐과 세도가들의 집을 드나들 뿐 일반 백성들에겐 그림의 떡이었다.
옛 상인들이 썼던 주판.
▲ 주판. 옛 상인들이 썼던 주판.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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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조선은 서서히 상업에 눈뜨기 시작했다. 그것은 돈을 벌어 축재하기보다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다. 전쟁 전, 개성 상권을 장악한 송상과 일본에서 건너온 방물로 부를 축적한 동래상인들이 있었지만 그들이 취급하는 물품은 특수층을 위한 전유물이었을 뿐 백성들의 배고픔을 해결하는 물건은 아니었다.

난리를 겪으며 가족과 헤어진 사람과 노비에서 해방된 사람들이 생계를 위하여 보퉁이를 이고 지고 팔도를 떠돌았다. 그들이 발전하여 전국 상권을 연결하는 부보상이 생겨났고 그들의 숙식과 뒷돈을 대주는 객주가 등장했다. 건어물을 비롯한 해산물은 칠패로 모여들었고 곡류와 과실은 배오개로 몰려들었다.

조선팔도의 쌀과 잡곡 산채나물 집산지 배오개에 자리 잡은 서남일은 주로 궁궐 제수용품을 납품했다. 하지만 그 제수용품이라는 것이 혼전(魂殿)과 종묘 등 공개적인 제사용품이 아니라 궁궐 여인들의 푸닥거리용 물품이었다. 때문에 서남일은 세자빈은 물론 조소용 등 궁궐여인과 종횡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가 본인이라 확인되었을 때 이 증표를 내놓아라."

권대식이 사을(沙乙)이라 수결된 지편(紙片)을 내밀었다. 앞뒤 거두절미하고 오로지 사을이란 두 글자가 쓰여진 쪽지였다. 증표를 품속에 간직한 꺽쇠가 자리에서 일어나 하직을 고했다. 애잔한 눈초리로 바라보던 권대식이 꺽쇠에게 길양식을 건넸다. 두 손으로 받아든 꺽쇠가 대장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사나이들의 뜨거운 시선이었다.

북문을 빠져 나간 꺽쇠가 한양을 향하여 잰 걸음을 놓았다. 흡사 축지법을 익힌 도사의 걸음걸이와도 같았다. 그것은 그가 요동벌 산야를 내달리며 몸소 익힌 주법이었다. 꺽쇠가 지장암을 돌아 시야에서 사라지자 권대식이 발걸음을 옮겼다.

단원 김홍도의 대장간
▲ 대장간. 단원 김홍도의 대장간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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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에 묻혀있던 산채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며 활기를 찾았다. 대장간 풀무가 가쁜 숨을 몰아쉬고 불에 달구어진 시우쇠가 뽕쇠와 교접하며 열기를 토해내고 있었다. 모루위에 벌거숭이로 올라선 그들을 확실하게 교합케 하기 위해서는 메를 쳐야 한다.

딸그락 닥닥. 망치 소리가 경쾌하다. 메를 유도하는 대갈마치가 대장장이의 손끝에서 장단을 맞추며 춤을 추고 있었다. 쉴 새 없이 돌아가는 대장간에 권대식이 찾아왔다.

"어제 몇 자루나 만들었는가?"
"창 다섯 자루와 칼 서른 자루가 목표인데 스물일곱 자루밖에 만들지 못했습니다."
"힘든 일을 하는 너희들만 특별히 점심을 내주라 일렀는데 왜 목표량을 채우지 못했는가?"

대장간 식구들을 제외한 모든 산채 사람들은 점심때 마음(心)에 점(點)을 찍는 것으로 때웠다.

"메를 치는 석칠이가 토굴에 갇혀 있어서리..."

야장이 말끝을 흐리며 뒷덜미를 긁적였다. 대장간에서 쇠가 무기로 변하려면 쇠를 벼리는 야장의 숙련도 필요하지만 메쟁이의 메가 절대적이다. 메를 높이 쳐들고 후려쳐야 쇠가 정신을 차린다. 시우쇠가 메를 맞아야 뽕쇠가 되고 그들을 한 몸으로 붙여줘야 칼이 된다.

"그 녀석은 토굴에 갇힐 만한 죄를 지었느니라."
산채에 범죄자를 가두어 두는 사옥이 있었다.

"한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야장이 읍소했다.

환향녀는 죄인이 아니다. 나라가 죄인이다

"불씨에게 공양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들에게 정성껏 밥을 해주는 공양주는 지금 비록 환향녀라는 소리를 듣고 있지만 그녀들 역시 우리 누이처럼 양갓집 규수였고 아이의 어미였고 지아비의 아낙이었다. 그들이 청나라에 잡혀가 몸을 더럽혀 돌아왔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목숨을 걸고 절개를 지킨 여인도 있고 불가항력에 몸을 더럽힌 여인도 있을 것이다. 허나, 그들이 죄인이 아니다. 이 나라가 죄인이다. 환향녀라는 불명예도 억울한데 그녀들을 희롱하고 추행했으니 벌을 받아도 싸다."
권대식의 태도는 싸늘했다.

"지가 책임지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책임진다는 말 믿어도 되겠는가?"
"네."
풀무간 열기에 검게 그을린 야장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화승총을 책임지고 만들어내겠다는 약속은 어떻게 된 것인가?"
권대식이 대장장이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총신은 다 만들었으나 점화구에 문제가 있어 애를 먹었는데 가짜 마패를 만들어 팔다 쫓기던 놈이 산채에 들어왔습니다. 그놈 손재주가 보통이 아닙니다. 보름만 말미를 주시면 꼭 만들어 내겠습니다."

옆자리에 있던 이지험이 권대용에게 귀엣말을 속삭였다. 석칠을 축제용으로 쓰고 풀어주자는 것이다. 역시 이지험은 천하의 장자방이었다. 매부 홍영진을 끌어들여 산채를 만든 것도 그였고 숨 막힐 것 같은 산채생활에서 놀이를 고안해낸 것도 그였다.

"좋다. 너의 약속을 믿고 메쟁이를 풀어주겠다."
"우와! 우리 대장 최고!!"
열기 가득한 대장간에 환호가 터졌다. 힘세고 덩치 좋은 메쟁이가 절실히 필요한 마당에 갇혀있던 석칠이가 풀려난다니 더 할 나위 없이 좋았다.

자신의 막차로 돌아온 권대식이 부관에게 축제를 준비하라 지시했다. 산체의 축제. 그것은 먹고 마시고 춤추는 축제가 아니라 멍석말이였다. 마을에서 못된 자를 징치하는 수단으로 썼던 멍석말이를 산채에서는 축제로 활용했다.

징벌이 지나치면 배신 때린다

제 발로 산채에 들어온 자라 할지라도 죄를 짓고 사옥에 갇히게 되면 처음엔 뉘우치지만 시간이 지나면 가둔 자에게 적개심을 표출한다. 이것이 필요이상의 시간이 지나면 증오심으로 축적되고 급기야는 관가에 고변하는 배신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인간의 심리를 잘 알고 있는 이지험은 죄인에게  어느 정도 벌을 가했다 생각하면 명분을 내세워 풀어주자는 것이다. 이 때 축제 도구가 멍석말이다.

사옥에서 끌려나온 석칠이가 권대식 앞에 섰다. 까칠한 얼굴이다.

"석칠이는 내가 한 말을 따라 한다. 알겠는가?"
"네."
석칠이의 대답에 힘이 없었다.

"목소리가 너무 작다. 크게 한다. 알겠는가?"
"네."

"산채에서 남녀유별은 있지만 차별은 없다."
"차별은 없다."

"산채의 여자는 희롱의 대상이 아니라 동지다."
"동지다."

석칠이의 복창이 끝나자 그의 몸이 멍석에 말렸다. 산채꾼들이 히히덕 거리며 멍석을 걷어찼다. 유쾌하게 웃으며 몽둥이질도 했다. 멍석에 말린 석칠이가 비명을 지르면 지를수록 잔잔한 발길질이 쏟아지며 웃음꽃이 피었다.

산채꾼들에겐 놀이가 없다. 건장한 사내들끼리 부대끼며 살다보니 삭막하다. 때론 눈알을 부라리며 드잡이가 벌어진다. 이러한 산채에 죄인을 멍석에 말아 짓밟고 몽둥이질을 하라하니 이렇게 좋을 수가 없다. 단, 징치의 수단으로 쓰는 마을에서처럼 죽도록 두들겨 패지 않는 것이 산채의 관습법이었다.

덧붙이는 글 | 배오개-이현(梨峴)이라고도 하며 오늘날 동대문 시장
칠패-서소문밖에 있던 시장으로 오늘날의 남대문 시장 전신
혼전(魂殿)-선대왕의 위패와 초상을 모셨던 곳
지편(紙片)-쪽지
시우쇠-저탄소 강
뽕쇠-고탄소 강



태그:#소현세자, #민회빈, #대장간, #배오개, #칠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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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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