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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올레 코스 여행이 일종의 사회현상처럼 관심이 집중되는 요즈음 다양한 변화를 실감하게 된다. 물론 스스로를 순례자로 칭하는 여행자의 수행과도 같은 느릿한 걸음과 진지한 태도, 그리고 그에 발맞추어 단순한 볼거리 위주의 관광 행태를 바꾸려는 시도가 여러 방면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은 기쁘게 받아들일 만한 일이다.

 

그런데도 쉬 바뀌지 않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해안가에서 주로 이루어지는 무속인의 이른바 '무속행위'를 보는 곱지 않은 시선이다.

 

먼저 '당 오백 절 오백', '1만8천 신들의 고향'이라 자랑하는 무속이 현재 어떤 위치에 있는가부터 살펴보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한때 유행했던 말투를 따르면, 세상에는 두 종류의 무속인이 있다. 하나는 민속문화의 관점에서 제주 전통 무속문화의 맥을 잇는 역할을 담당하는 '제주도 심방'이 그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와는 달리 오늘날 일선에서 어떤 이유에서든 치유하지 못한 아픔을 '무속행위'로 풀어주는 일종의 직업인으로서 통칭·속칭 '무당, 무속인'이라 불리는 이들이 그것이다.

 

전자는 민속 예능 보유자로서 많든 적든 간에 공적인 지원을 받으며 또한 여러 관련 행사에 초대되어 '굿 시연'을 하는, 말하자면 인간문화재와 같은 '인정 받은 존재'이다. 반면 후자는 무속이 강조하는 것을 믿는 사람이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그에 의탁하지 않고서는 더 고통의 나락으로 빠질 것이라 여겨지는 사람 또는 그 지인에 의해 그들과 관계를 맺는 경우 말고는 대체로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이 무속인들은 주로 제주시 인근 해안가에서 '무속행위'를 하는데, 이에 대해서 언급한 사람들의 부정적인 말을 나열해보면 '애들 교육에 좋지 않다', '관광객들(또는 사람들)도 많이 오는 곳인데...', '미풍양속을 저해한다' 따위이다. 언뜻 보면 수긍할 법도 하지만, 따지고 보면 이건 말이 안된다.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강요하는 일부 극단적인 기독교인이 아닌 이상, 교육에 해가 된다고 여길 이유가 없는 것이, 우리나라는 종교를 선택할 자유를 법으로 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사종교 또는 이단으로 볼 마음이라면 이 '무속'이 아닌 '무교'를 비판할 자리에 설 종교는 무엇일까를 따져야 한다. 서양에서 들어온 기독교인가, 아니면 중국을 거쳐 온 인도의 불교인가, 아니면 중국의 유가사상,도가사상을 종교로 받아들인 유교, 도교인가? 그렇다면 단군을 섬기는 '대종교'는 어떤가?

 

단군은 '당골'이고, 이는 오늘날 '단골'과 맥이 닿아 있다거나, 단군왕검은 제사장이요 임금이라는 말의 '제사장'이 이른바 오늘날 '무당'이라는 말을 깜찍한 이설로만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해답은 없다. 차라리 이런 이유를 알고 있음에도 부정한다면 그이는 그만큼의 배타적 논리를 갖추고 있는, 그럴만한 이유를 또 지니고 있는 사람이다. 문제는 앞서 든 이유처럼 말은 꺼냈으되 말이 안되는 그저 고정관념에 든 것에 불과한 사람들인 것이다.

 

아예, '굿하는 소리가 시끄럽다'거나 '제 집도 아니고 남의 동네 앞마당에 와서 자릿세도 안 주고 까분다'는 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이유를 드는게 나을 듯하다. 그 소리가 시끄러워 봐야 비행기 소음만 할 것이며, 너른 바다를 뒤에 둔 갯바위 위에서 일어나는 일이 인가도 별로 없는 마을 사람들에게 그렇게 아니꼬운 이유가 될까? 

 

고정관념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멀게는 제주목사가 있던 조선시대가 '당 오백, 절 오백'의 수치를 급격히 떨어뜨린 데에 공로상을 주고, 가깝게는 조국근대화에 이바지했다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집권했던 시기에 '미신타파'라는 구실로 강압한 데에 대상을 줘야 한다. 이 '미신타파'는 '미풍양속을 저해하는 행위'의 하나였던 것이다.

 

내 앞에 놓인 한 장의 사진에는([사진으로 엮는 20세기 제주시],제주시,2000) 반납한 북, 장고, 설쇠 따위의 각종 무구가 놓여 있고, 북에는 그 주인의 이름과 '삼십년 무당생활의 청산'이라는 번뇌 깊은 글귀가 적혀 있다. 옆은 한 해 더 많은 '삼십일년'. 물론 두 글씨체는 동일 인물의 것으로 보인다. 역시 강압인 것이다.

 

한동안 텔레비전 외엔 낙이 없던 시절, 극에서 보여주는 굿하는 모습은 과격하고, 소름돋고, 경망스럽고, 희화화되는 것으로 굳어 있었다. 그 이름에서 보듯이, '무교'가 아닌 '무속'은 차라리 외국말이어서 알듯 모를 듯한 '샤머니즘'에 기대는 것이 나을 법하다.

 

어떤 이가 미신이라고 하는가? 어느 누가 이처럼 적극적으로 나서서 아픈 영혼을 치유하려한 적이 있는가? 거기에 돈이 자리하고 있다고 말하려 한다면 거두어라. 이 땅에서 세속화, 물신화되지 않은 종교와 종교인만이 돌을 들 수 있다. 미신이면 또 어떠한가? 믿어서 치유되는 듯한 위약효과 맛이라도 좀 보면 안될 일이라는건가? 

 

 

함께 사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다른 종교에게도 요구하는 것처럼 자본 획득 과정과 결과를 낱낱히 밝혀 세금을 거두고, 이들이 오늘날 행하는 '무속 행위'의 부정적 요소를 구체적으로 밝혀 서로 소통하여 배려하는 시공간을 마련하여 손잡고 함께 사는 방편을 마련해야 한다.

 

'1만 8천 신들의 고향'이 축제, 행사에만 쓰이는 '옛 것'만을 사랑한다면, 오늘날 그 신들의 또다른 이야기를 쓰고 있는 '무당'도 언젠가는 '옛 것'이 될 것임도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태그:#무, #제주도, #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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