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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의 침전이다. 장렬왕후가 경덕궁으로 쫓겨난 후 소의 조씨가 사용했다. 인조가 집무공간으로 쓰던 바로 옆 건물 양화당보다 한 계단이 더 높다.
▲ 통명전 왕비의 침전이다. 장렬왕후가 경덕궁으로 쫓겨난 후 소의 조씨가 사용했다. 인조가 집무공간으로 쓰던 바로 옆 건물 양화당보다 한 계단이 더 높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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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빈을 모시던 동궁나인 정렬, 계일, 애향, 난옥, 향이와 어주나인 천이, 일녀, 해미가 두름에 굴비 엮이듯 줄줄이 묶여와 내사옥에 하옥되었다.

"내관은 나인들을 국문하라."

역모에 준하는 국사범으로 심문하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심문하다 죽여도 좋다는 내락이다. 위관(委官)도 아닌 내관의 국문(鞠問). 뭔가 어설펐지만 어명이다. 절차상의 문제가 있지만 왕명은 때론 국법에 우선할 수 있다. 남용하면 법치를 해칠 수 있지만 하라면 해야 한다.

여자의 엉덩이를 까고 왜 때려?

먼저 강빈이 가장 신임하는 정렬이 머리를 산발한 채 끌려 나왔다. 환관들이 달라붙어 형틀에 묶고 엉덩이를 까 내렸다. 보통 죄인의 경우 남자는 엉덩이를 까지만 여자는 속옷을 벗기고 웃옷을 입혀 물을 끼얹은 다음에 볼기를 쳤다. 이름하여 물볼기다. 허나, 국사범에는 예외가 없다.

"어선에 독을 넣으라는 강씨의 명을 누구에게 전했느냐?"
"그런 말을 들은 일도 없고 전한 일도 없습니다."

"살퍼덕"
정렬의 엉덩이에 곤장이 작렬했다.

"으아악!"
부드러운 여인의 속살에 내려앉는 곤장의 마찰음과 동시에 정렬의 입속에서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새어나왔다. 곤장은 소리를 증폭시켜 죄인으로 하여금 공포심을 유발케 하기 위하여 버드나무로 만들었기 때문에 소리가 유난히 컸다.

"이 년이 곤장 맛을 더 봐야 실토를 하겠구나. 매우 쳐라."

"으으윽!"
외마디 비명을 지른 정렬이 이를 악물었다. 건장한 사내들도 한, 두 대면 떨어진다는 치도곤이다. 곤장에는 너비 네 치 급의 대곤·중곤·소곤이 있고, 다섯 치 급 중곤(重棍)이 있지만 너비 다섯 치 서푼에 두께 한 치짜리 치도곤이 가히 살인적이다. 정렬이 곤장 몇 대에 혼절했다. 공포에 떨고 있던 계일이 끌려나왔다.

"네년이 독을 전했느냐?"

계일은 축 늘어진 정열을 바라보며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이러한 계일을 바라보는 내관의 눈동자가 개구리를 앞에 둔 뱀처럼 번득였다.

"그런 일 없습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독을 넣어라고 전했느냐?"
"그런 사람 없습니다."
"이런 고얀 년이 있나. 인정사정 보지 말고 매우 쳐라."

부드러운 엉덩이에 곤장비가 우수수 쏟아졌다. 매를 견디지 못한 계일이 정신 줄을 놓아 버렸다. 내관들이 달려들어 혼절한 계일에게 냉수를 퍼부었다. 축 늘어진 몸에 물을 끼얹자 저고리 속에 감추어져 있던 몸의 윤곽선이 드러났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내시들이 그래도 사내들이라고 키득거렸다. 이어 애향이 겁먹은 모습으로 끌려나왔다.

"어선에 독을 넣으라는 정렬의 말을 누구에게 전했느냐?"
"그런 일 없습니다."
"정렬과 계일이 축 늘어진 것 봤지? 바른 말 하면 살려줄 것이고 고집 부리면 저고리까지 벗겨서 칠 것이다. 부드러운 속살에 매 자국이 남아서야 되겠느냐?"
내관이 게슴츠레 눈을 뜨고 회유했다. 여자의 수치심을 자극한 것이다.

"모르는 일입니다."
"독한 년들 같으니라고, 바른 말을 할 때까지 계속 쳐라."

매에 장사 없다. 애향 역시 기절했다. 동궁 나인들이 모두 나가떨어지자 심문을 중단했다. 자기 차례가 올까봐 겁에 질려있던 어주나인들은 공포의 질곡에서 해방되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튿날, 대사간 조경, 헌납 조한영, 정언 강호와 김휘가 일찍이 등청하여 청대를 원했다.

최고 권력자가 법을 지켜야 백성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

"신들은 어선에 독을 넣었다는 말을 듣고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여염에 떠도는 소문이 사실이라면 이는 역적이 수라간에 숨어 있는데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죄인을 대궐 안에 있는 내옥(內獄)에 하옥하여 사사로운 사람을 치죄하듯 하십니까? 죄가 조금이라도 강상(綱常)에 관계되었으면 반드시 의금부에 회부하고 대신으로 위관을 삼아 삼성(三省)이 함께 다스려 옥사의 체통을 세우는 것이 조종(祖宗)의 영전(令典)입니다. 죄인을 국문하여 공초를 전달하는 것은 결코 환관 한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조속히 왕옥(王獄)에 회부하여 그 죄를 밝히게 하소서."

"일을 밝히기 어려운 바가 있기 때문에 왕옥에 회부하지 않았다."

임금의 답은 궁색했다. 소의 조씨의 청이 있었기에 내옥에 가두어 내관으로 하여금 치죄하게 했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대사헌 이행원, 집의 김익희, 장령 유심과 이석, 지평 이재가 뒤 미쳐 입궐하여 내옥의 부적절함을 간언했다. 마지못한 인조가 대신 김류와 이경석, 판의금 구인후에게 명하여 수라에 독을 넣은 사건을 국문하게 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소의 조씨가 박상궁을 불렀다.

"지금 당장 장동 김대감을 조용히 모셔 오라."
박상궁이 은밀히 궁을 빠져 나갔다. 얼마 후, 장동 김대감이 입궐하여 통명전을 찾았다.

품계를 따질 때가 아니다

"불러 계시옵니까? 마마!"
좌상은 정1품, 소의는 정2품이다. 품계로 따져도 아래 급인데 부르면 화살같이 달려왔다.

"어서 오시오. 좌상. 이렇게 늦은 시간에 불러 미안하오."
"망극하옵니다."

좌상이면 조정 서열 2위다. 임금 아래 한 사람 있고 자기가 있는 만인지상이인지하(萬人之上二人之下)다. 영상, 우상과 함께 삼정승 반열에 있는 사람이 임금이 빈청에서 부른 것도 아니고 후궁이 침전에서 호출했는데도 고맙다고 주억거렸다.

"내옥에서 형문하던 것을 국청에서 한다 들었소. 알고 계시오?"
"알다 뿐이겠습니까?"
"어떻게 생각하시오?"
"이경석이 조금 걱정이 되긴 합니다만 잘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잘 해보도록 아니에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실토를 받아내야 해요."
소의 조씨의 호통에 좌상이 얼어붙었다.

"지금 김대감의 관직이 뭐에요?"
뻔히 알고 있는 것을 새삼스럽게 물으니 더욱 얼어붙었다.

"좌의정입지요."
입이 얼어붙은 좌상이 말을 더듬었다.

"그래 맞아요. 좌상은 거기에 만족하세요? 거기에서 멈출꺼냐구요?"
"황공하옵니다."
"사나이가 청운의 꿈을 안고 출사했으면 영의정은 한 번 해먹어야지, 그렇지 않아요?"
"황공무지로소입니다."
더듬던 말이 미끄럼을 탔다.

"이번 일을 처리하면 영상은 물러날 거예요. 영의정 자리가 무주공산이다 그 말씀이에요. 아시겠어요?"

김대감의 정신이 혼미해졌다.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영의정. 머나먼 남의 이야기 같았던 영상자리가 자기에게 가까이 오는 것만 같았다.

"잘 알아서 하시오."
꿈을 깨어보니 소의 조씨의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분골쇄신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통명전을 빠져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가마에 올라앉은 김자점은 구름을 타는 기분이었다. 병자호란의 책임을 지고 처형될 뻔 한 자신을 구명해준 여자. 강화에서 귀양살이하던 자신을 해배(解配)시켜 유배지 유수에 앉혀준 여성. 호위대장과 좌의정으로 고속승진을 이끌어주었던 여인. 조상신보다도 더 끔찍이 여신(女神)으로 모셔도 부족할 것만 같았다.

덧붙이는 글 | 위관(委官)-국문의 심문관. 재판장
국문(鞠問)-중대한 죄인을 국청에서 심문하는 일
강상(綱常)-삼강오상을 이르는 말.
삼성(三省)-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삼사(三司)라고도 한다.
해배(解配)-유배를 풀어 주는 것



태그:#통명전, #소현세자, #강빈, #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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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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