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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가을 냄새를 맡게 되면서부터 어머니의 여행은 다시 시작되었다. 여름 내내 선 채로 오줌을 벌벌 싼다든가 넘어진 채로 일어서는 방법을 몰라 쩔쩔매는 식으로 아들을 하늘이나 쳐다보게 하시던 어머니가 언제부터 다시 웃음소리를 내기 시작했는가는 명확하지 않지만 추석 이후부터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고 보면 이게 또 그렇다. 치매 아니라 별 것이 위협한다 해도 계절의 변화 앞에서 인간의 육체는 어떤 식으로든 반응하게 되어 있는 모양이다.

그렇다고 어머니가 씩씩하게 활보를 한다든가 화장실 출입이 엄청 자유스러워졌다는 얘기는 아니다. 눈을 감으면 보인다고 했던가. 어머니의 여행은 눈을 감고 있을 때 이루어진다. 그리고 눈을 뜨면 여행은 끝난다. 밖에 있던 아들이 들어와서 파리를 잡는다고 파리채를 휘두를 때가 어머니의 여행이 끝나는 시간이다.

날씨가 선선해지면서 밖에 있던 파리가 온통 실내로 들어왔다. 안에 연탄난로를 피우는 까닭에 파리가 좋아하겠거니 싶기도 하지만, 금년에는 유별나게 많아졌다는 느낌이다. 그런데 이 파리들은 식탁을 중심으로 움직이기도 하지만 대개는 어머니의 눈가나 입가, 혹은 팔이며 다리며 드러난 살에 집중으로 몰려 있다.

파리들이야 나름대로 뭔가 노동을 하는 중이겠지만, 그래서 가끔은 때려잡는 내가 너무 야박한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보는 순간에는 그저 미워서 때려잡고만 싶어진다. 그렇게 해서 파리 잡는 소리가 딱, 딱 들리기 시작하면 어머니가 깜빡 놀라서 눈을 뜨시는데 그 순간의 표정이 뭐라고나 할까. 미안하고 미안하고 또 미안해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꼭 그런 표정이 되고는 한다.

"어매 으쩌께라, 내가 그만 깜빡 잠이 들어버렸어라?"
"먼 소리여?"
"내가 쩌그 어디냐 목포 유달산을 갔다가는 그만 대간해서(피곤해서), 하이고 잠시 다리나 쉬어가려고 앉았는디, 그란디 잠이 들고 말았소야. 미안스러서 어쩌께라."
"긍게 뭘 어쩐다고요."
"긍게 머시냐 쩌그, 한숨만 자고 갔으면 좋겠는디, 괜찮을께라?"
"아니 긍게, 여그서 자고 간다고라? 이 아줌마 좀 보소. 내가 남자요. 아줌마가 남자 혼자 사는 집에 불쑥 들어와서 자고 간다고요? 먼 우렁각시도 아니고, 참말로 정신나간 아줌마네요 잉?"
"아이고 참말로 긍게 말이요. 내가 미친년이랑게요. 날도 곧 추워질 텐디 먼놈의 영산강을 간다고 집을 나섰다가는 그만."
"아까는 목포 유달산에 갔다면서요."

목포 유달산은 어머니의 오빠가 사시던 곳이었다. 영산강 주변은 장성이 고향인 어머니가 어린 시절에 어떤 인연으로든 추억을 많이 쌓은 곳일 터이었다. 그러고 보면 어머니의 오빠에 대한 애정이 아마 각별했던 모양이다. 아니면 너무 일찍 돌아가신 탓에 아쉬움이 크게 남은 것일까. 내가 초등학교 시절에 만년필 한 자루를 주신 외삼촌이 생각난다. 확실히 외삼촌은 너무 일찍 돌아가셨다.

그나저나 내가 일을 하다 말고 안으로 들어온 목적이 뭐였지? 파리를 때려잡자고 들어온 것은 아닐 터이다. 아아, 밥, 그래, 밥이다. 점심을 잊고 있었다. 시간은 벌써 오후 4시. 점심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저녁이라고나 해야 맞을 것 같기도 하다.

 작년에 3백 개도 넘었던 감이 금년에는 기상이변으로 죄다 떨어지고 이 정도밖에 못 얻었다.
 작년에 3백 개도 넘었던 감이 금년에는 기상이변으로 죄다 떨어지고 이 정도밖에 못 얻었다.
ⓒ 김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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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깨워오라는 어머니에게서 나는 무엇을 보는가

돌아보니 알량한 집수리 좀 한다고 어머니를 굶긴 날이 참 많았다. 내게 일중독 비슷한 증세가 있다는 것을 이번에 알았다. 한참 뭔가를 좀 한다고 뚜닥거리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하늘의 해를 찾아보면 항상 저녁에 가까워 있었다. 그리고 그제야 내 자신도 배가 고팠다.

추석 직후에는 먹을 것들이 제법 많이 남아 있어서 금방 어떻게 해결할 수 있었다. 그 많은 먹을 것들이 떨어진 뒤에는 밥 때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오늘은 뭘로 끼니를 때우지? 국은 뭘로 끓이지? 밥 짓는 일이 이렇게도 난감하고 거대한 사업일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고 하면 내가 참 세상을 헛되이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어쨌든 그랬다.

가끔은 낭창낭창하게 잘 익은 홍시 몇 개로 대충 끼니를 떼우기도 했다. 작년에는 감을 3백 개도 넘게 수확을 해서 두 달 이상 어머니의 간식거리가 되어주었는데 금년에는 막판의 폭우로 죄다 떨어지고 몇 개 안 남은 것마저 까치들이 공격을 해서 일찍 수확해 버렸다. 그것으로 가끔 잊어버린 점심 대용을 하는데 그때마다 어머니는 깜짝 놀라서 감탄사를 연발하신다.

"오매 이바지네 이바지여. 먼 홍시가 이렇게도 크다요. 고맙소, 고맙소 야."
"너무 많이 고마워하지 말아요. 밥 못 챙긴 내가 미안해지잖어."

사실로 그렇다. 어머니가 고마워하면 할수록 나는 몸둘 바를 모르게 된다. 그러나 어머니는 거기서도 한 걸음 더 나아가신다. 그 진도의 내용이 어찌나 독창적이고 창의적인지 모르는 사람은 아마 웃다가 배꼽이 빠질 것이다.

"아이고 참말로, 이 고마운 것을 으찌케 나 혼자 먹을 것이요. 집이 어머니 깨워서 항꼬 잡숫자고 하시오, 야?"
"어머니요? 우리 어머니를 깨우라고?"
"아따 참말로, 이 좋은 것을 으찌케 나 혼자만 먹을 것이요. 얼른 깨워 오시오, 잉?"
"금매, 그럴께라우? 우리 어머니도 깨워 올께라우?"
"아이 그래야제라. 잠자는 사람 잠잔다고 내버려 두고 먹는 거, 그것 참말로 죄로 가는 것이요 잉? 얼른 깨우시오, 야? 얼르은."

눈곱 만큼도, 털끝 만큼도 농담이 아니다. 재촉하는 어머니의 마지막 말에는 "아이고 어쩌까, 큰일났네"하는 투의 애닯음마저 절절이 깔려 있다. 이러한 애닯음은 아마도 다른 사람의 눈과 귀에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을 것이다. 다년간의 동거로 익숙해진 마음이 아니고는 느낄 수 없는 인간사의 내밀한 점액성, 정이라는 이름으로나 번역이 가능한 이 끈적끈적한 것이 내 가슴을 돌고 돌다가 마침내는 쿵, 쿵 울리는 북소리로 환원한다.

그나저나 이런 때는 할 말이 막히고 난감하다. 어머니로부터 어머니 깨워오라는 당부를 받았는데 나는 어디 가서 어떤 어머니를 깨워야 하는가.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 앞에서 북 치고 장구 치며 노래하고 춤을 췄다 해서 후대에 두고두고 여러 가지 말을 낳은 장자(莊子)의 심중에 들어 있던 것이 무엇이었는가를 이제야 조금은 알겠다는 느낌도 있다.

 "오매 이바지네 이바지여" 위에 조끼는 한쪽 팔을 어떻게 꼬았는지 스님들의 가사처럼 벗겨져 있는데도 하나도 부자유스럽지 않게 자유롭게 활동을 하신다.
 "오매 이바지네 이바지여" 위에 조끼는 한쪽 팔을 어떻게 꼬았는지 스님들의 가사처럼 벗겨져 있는데도 하나도 부자유스럽지 않게 자유롭게 활동을 하신다.
ⓒ 김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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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한티 빤스를 입혀 줄 것이요"

사실 '고맙다'는 말은 어머니의 트레이드마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치매라는 이름의 괴물에게 잡히기 전에도 어머니의 입에는 늘 "고맙다", "감사하다, "이것을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다", 등등의 인삿말이 붙어 있었다. 그 대상은 남녀노소 성별에 구분이 없었고, 자식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예전에는 아들을 아들로 인식해서 "고맙다"였지만 지금은 아들을 주인아저씨나 오빠로 인식해서 "고맙습니다"한다는 것 정도였다. 다른 것은 다 잊어버려도 고마운 마음만은 그 어떤 경우에도 잊어서는 안 된다는 듯 마치 주문이라도 외우듯이 당신 몸에 앉아 있는 파리 한 마리만 잡아도 "아이고 나는 알지도 못한 파리를 잡았네, 고맙습니다" 하시는 거였다.

어머니의 입에서 고맙다는 말이 가장 많이 나오는 경우를 들자면 아무래도 목욕을 하기 전후라 해야 할 것이다. 금년 봄까지만 해도 목욕통에 물을 받아놓고 "목욕합시다" 하면 약간의 시행착오는 있어도 당신 스스로 옷을 벗고 들어가고 끝난 뒤에도 역시 당신 스스로 몸을 닦은 뒤에 옷을 입곤 했지만 이즈음은 그게 거의 불가능해지고 말았다.

옷을 벗고자 하면 한쪽 팔을 위로 올려야 할 때 아래로 내리거나 아래로 내려야 할 때 위로 치켜든 채로 다른 한쪽 팔을 움직이는 까닭에 마치 실타래가 엉키듯이 이상하게 꼬인 자세가 되어 꼼짝을 못하기 일쑤였고, 옷을 입을 때는 바짓가랑이 하나에 다리 두 개를 다 넣으려고 안간힘을 다하거나 팬티를 허벅지에 걸친 채로 바지를 입으려다가 넘어져서 혀를 물리거나 코피를 흘리기 일쑤였다.

그렇다고 아무 때나 달려들어 거든다고 하기도 어려웠다. 아무 때나 달려들면 어머니는 즉각 "내가 할게요" 하고 뿌리치거나 "나도 할 줄 안당게요" 하면서 돌아앉아 버리기 때문이었다. 순간포착을 잘해서 아주 적절한 시기에 안 하는 듯이 슬쩍 한 번 손을 보태면 어머니의 입에서 "아이고 고맙소" 하는 소리가 나오지만, 순간포착을 잘못하면 어머니의 자존심만 훼손하고 마는 것이었다.

이것으로써 어머니가 지금 달아나는 당신의 정신을 붙잡고자 얼마나 극도의 노력을 다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는 일이었지만, 어쨌거나 그런 와중에서도 나는 그동안 속옷만은 가능한 한 손을 대지 않으려고 애를 써 왔다. 손을 댄다 해도 어머니의 손을 잡아서 속옷의 현재 상태가 어떠어떠하니 어떻게 하라는 정도에서 해결을 보곤 했다. 그런데 어제(7일)는 그것조차도 아니었다.

   화장실을 다녀오시는 어머니. 다리가 후들거려서 항상 위태위태 아슬아슬하다
 화장실을 다녀오시는 어머니. 다리가 후들거려서 항상 위태위태 아슬아슬하다
ⓒ 김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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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욕을 끝내고 몸을 닦은 뒤에 언제나처럼 방바닥에 옷가지들을 전시라도 하듯이 식별이 잘 되도록 좌악 늘어놓고 "여그 앉아서 옷 입으시오, 잉?" 하고 싱크대 앞으로 가서 설거지를 끝내고 커피나 한 잔 마실까 생각 중인데 갑자기 "아이고, 나 좀, 나 좀 으찌케 해주시오, 야?" 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가 삼각팬티의 통로 셋 가운데 하나는 버려둔 채 두 개만을 활용해서 다리 두 개를 한꺼번에 넣어버린 모양이었다. 그것조차도 한 번에 넣은 것이 아니라 한쪽을 넣은 뒤에 팬티를 한 번 꼬아서 다른 쪽 다리를 넣은 탓에 완전히 무슨 수갑이라도 찬 형국이 되어 있었다. 그런 형태인 채로 어떻게 일어설 수 있었는지 하여튼 일어서서는 두 손으로 문고리를 붙잡고 넘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어머니와 나 사이에 새로운 경험 하나가 추가되었다. 그랬다. 어머니의 팬티를 직접 입혀드리기는 어제가 처음이었다. 어머니에게도 아마 그런 경험은 처음이라는 인식이 어렴풋이나마 있었던 것인지 그 어느 때 어떤 경우보다도 감격적인 목소리로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하고 있었다.

"고맙소, 고맙소, 참말로 고맙소."
"아이 참, 그만 좀 고마워 해에."
"아니제라우. 고마운 일이제라우. 시상에 누가 나한티 빤스를 다 입혀줄 것이요, 그러니 어찌 안 고맙겠어요. 고맙습니다. 참말로 고맙습니다."

고맙다고 연거푸 말씀하시는 어머니의 그 '고마움'이 내 살거죽을 뚫고 살을 뚫고 뼈를 뚫어서 마침내는 영혼마저 뚫어 버렸는가. 갑자기 고개가 숙여졌다. 다시는 고개를 들지 못할 것 같았다. 이렇게도 부끄러웠던 마음이 예전에도 있었던가 싶었다. 안도현씨가 시 '연탄재'에서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고 쓴 것처럼, 나는 한 번이라도 누구에게 진정성 가득한 마음으로 고맙다고 말한 적이 있었는지, 통절하게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어찌 고마워해야 할 일이 없었으랴. 무수하게도 많았을 것이다. 그때마다 의례적으로 그저 간단하게 감사합니다, 정도에서 해야 할 일 다했다는 듯 이내 잊어버리곤 해 왔을 것이다. 정말로, 정말로 이즈음은 내가 사람이라는 것이 고맙다. 어머니가 내 곁에 계신다는 사실이 또한 고맙다. 지금 이런 때가 아니면 또 언제 이런 고급한 것들을 공부할 수 있으랴.


태그:#치매, #어머니, #감사하는 마음,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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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것이 일이고 공부인, 공부가 일이고 사는 것이 되는,이 황홀한 경지는 누가 내게 선물하는 정원이 아니라 내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우주의 일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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