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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체 야간학교에 다니던 17살 여공 신경숙은 무단결석을 일주일이나 해버렸다. 결국 선생님으로부터 반성문을 쓰라는 벌을 받았다. 잘못을 반성하는 평범한 글 정도로만 기대했던 선생님은 반성문을 보고 할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의 반성문은 대학노트 20쪽이 넘는 한편의 단편소설이었던 것이다. 선생님은 그녀의 문학적 가능성에 반해 "너 소설 한번 써봐라"고 툭 던졌고, 결국 이 한 마디가 오늘의 신경숙 작가를 만들어냈다고 한다.

 

글쓰기에 강했던 수학전공자...서술형 시험은 '떼어 놓은 당상'

 

그렇다. 특별히 누구에게 글쓰기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닌데 어려서부터 글재주가 남달랐고 총명한 문학 소년이 바로 나였다(비록 야간학교에 다니는 여공은 아니었지만). 신경숙 작가는 나의 학창시절 모습 그대로이다. 대학시절 수학교사인 이모부의 꾐에 빠져 울며 겨자 먹기로 수학을 전공했지만 숨겨진 재능은 어쩔 수 없었나 보다. 문예창작이나 국어국문학 근처에 얼씬도 못했지만 누구보다 남다른 글 솜씨(?)를 자랑했으니….

 

벌써 25년 전이다. 대학시절 공부를 지지리도 싫어하던 나는 해석학, 미분방정식, 복소수함수론, 통계학 등 전공과목은 낙제점만 겨우 면하는 그야말로 '먹고 대학생'이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전공과는 먼 선택과목에서는 유감없는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특히 교양과목인 문장작법을 비롯하여 경영경제 선택과목인 경제학원론, 노사관계론 등에서 A학점은 모조리 '떼어 놓은 당상'이었다. 공부는 꽤 한 것 같은데 막상 시험 문제를 받아보면 머리가 하얗게 된다는 친구들과 달리, 서술형 시험문제를 받아 든 나는 유난히 눈이 반짝였다.

 

유난히 '썰(?)을 잘 풀었다'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에게 서술형 시험문제는 숨겨진 기교를 발휘할 최고의 기회였다. 답안지에 제목과 요지만 대충 나열하고 나온 친구들과는 달리, 철저히 교수님의 입장에서 답안을 작성해 나갔다. 어차피 내가 모르는 것은 교수님도 모르는 것 아니겠는가.

 

시험 하루 전에 수박겉핥기로 대충 훑어본 얄팍한 지식이지만, 살을 붙이고 그럴싸하게 포장하는데 일가견이 있었으니 이건 거의 논문 수준이다. 답안용지가 부족해 별지까지 첨부하니 교수님이 딱 좋아할 답안이다. 물론 성적은 단연 최고점이었다.

 

사보학교 과정 모집광고... 눈이 번쩍 뜨여

 

 

2학년 때부터는 학보, 교지 등에 원고를 투고하면 으레 눈에 가장 잘 띄는 지면에 우선순위로 실렸다. 인문사회학도들도 어려워 하는 글쓰기를, 뭘 믿고 그렇게 기고만장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어디 그뿐인가, 누구에게 특별히 배운 것도 아닌데 편집 능력까지 탁월해 학회지의 편집은 도맡았다. "넌, 학과를 잘못 선택했어…. 문예창작이나 산업디자인이 더 어울려"라며 부추기는 선후배들의 말은 나를 더욱 기세등등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고도 남았다.

 

그러던 중 대학 3학년 때 교내게시판에 붙은 '사보학교 OO기생 OO명 모집'이라는 안내문이 우연히 눈에 들어왔다. 눈이 번쩍 뜨이고도 남는다. 선택의 여지는 없다. "바로, 이거야. 신은 역시 나를 버리지 않았어!" 사보학교는 기업체에서 홍보를 목적으로 발간하는 사내·외보를 담당하는 사보기자를 육성하는 일종의 출판 편집 분야의 직업훈련 과정에 불과했지만 당시 홍보분야 전문가를 육성하는 기관이 전무했던 시절이었다.

 

그 해 여름 서울 남산아래 작은 건물에서 뙤약볕을 맞아가며 사보학교에서 여름을 보내고, 결국 대학 졸업 후 당당히 유명 건설회사의 홍보팀(사보편집실)에 입사했다. 하지만 물 만난 고기처럼 열심히 재주를 부리던 나는 차츰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하더니 입사 3년도 채 지나지 않아 그 일을 그만두고 말았다.

 

건설회사 홍보실이라는 안정된 직장을 그만두고 과감히 이직을 선택했다. "나름 동종업계"라며 끈질기게 유혹하던 편집자 모임 선배들의 입김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이때부터  '종이밥'을 먹는 새로운 생활이 시작됐다.

 

새로 받은 명함은 'OO타임스 편집부 기자'. 이 전문지의 상근기자는 취재부문4~5명, 사진기자 1명, 편집기자 2명이 전부였지만 고정전문필진과 지역별 통신원 10여 명까지 포함하면 그나마 외형은 어느 정도 갖춘, 서울에 본사를 둔 '중앙지'였다.

 

대우는 그리 좋지 않았다. 취재 사진기자의 경우 박봉에 시달렸지만 그래도 매주 전국의 가판대에 깔린다는 자부심으로 그나마 기사를 썼다. 편집기자의 경우 급여도 꽤 높은 편이었다. 지금이야 매킨토시 등 전자출판용 편집프로그램을 이용하여 편집과 레이아웃 자체가 화상에서 가능하지만, 당시만 해도 일명 '따붙이기'(기사를 크기에 맞게 사진식자로 출력하여 편집대지에 붙인 후 다시 촬영하여 필름을 만드는 작업) 시절이었다.

 

기사의 제목을 멋지게 뽑아내고 시각적인 편집 작업 능력이 있는 편집기자만 있다면야 기사가 부실하더라도 신문제작에 큰 무리가 없었다. 여기서도 편집 실력을 어느 정도 인정받은 나는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또 다른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단조로운 업무에서 벗어나 새로운 매체에서 창조적인 작업을 할 수 있다는 매력에 이끌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는 과감히 지방일간지로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여기서도 몇 번의 이직 후 한 지역의 일간지 편집부 데스크로 자리 잡게 된다.

 

사보기자에서 주간지로, 다시 일간지 편집기자로

 

하지만, 이직의 설렘은 잠깐이었다. 여기서 나는  내 평생 잊지 못할 경험을 하고 만다. 1990년대 중반, 지역이름을 빌린 'OO매일' 'OO일보'라는 제호로 난립하기 시작한 지방일간지는 중소 규모의 자본이 대부분이었고 시장규모도 영세해 경영 압박이 심각했다.

 

그러니 광고, 취재, 편집, 제작, 보급 등 어느 하나라도 제대로 이뤄지는 것을 기대하기란 힘든 일이었다. 모기업이 튼실한 일간지의 경우 연합뉴스와 뉴스 전재 계약을 맺어 기사를 제공받기에 취약한 취재영역의 지면 채우기엔 문제가 없었다. 시간별로 연합통신의 단말기를 통해 계속해서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기사는 친절하게도 '관련사진 있음'이라는 표시와 함께 제공되기에 지역특종 1~2건만 터트려준다면야 그야말로 금상첨화였다.

 

하지만 열악한 지역일간지의 경우, 연합통신과 전재 계약을 하지 않은 경우라면 보통 16면에 달하는 대판지면을 채우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 지면은 아직도 세상의 흐름에 동떨어진 편집방식과 기사선택 방식이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또, 전국 단위의 정치경제기사와 스포츠, 경제면은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표절의 유혹에서 결코 해방될 수 없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묻지마 베끼기'였다. 지역 로컬뉴스시간의 보도 멘트를 받아 적는 일은 취재기자들의 빠질 수 없는 일과였다. 또, PC통신의 '주요뉴스'를 클리핑 하여 기사 앞뒤를 적절히 조합하는 것도 부족해, 오후 1시쯤에 발행되는 서울지역 석간신문을 팩스로 입수하여 헤드라인부터 시작하여 본문까지 토씨하나 바꾸지 않았다.

 

원고 마감시간에 편집부에 부서별로 취합되어 들어온 기사를 보노라면 한숨이 앞선다. PC통신에서 출력한 정체불명의 기사, 팩스로 받은 석간신문, 손 하나 대지 않은 관공서 보도자료 원문….

 

묻지마 베끼기... 기사 만들기가 가장 쉬웠어요

 

'또 이 짓을 해야 하나' 회의가 든다. 매일 치르는 전쟁이기에 그러려니 하며 어느새 무덤덤해지지만 기사는 표절일지라도 편집자의 자존심상 제목까지 그대로 따라할 수는 없다. 고심 끝에 제목을 만들어내고 한눈에 들어오는 시원시원한 편집을 고민한다.

 

편집기자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자존심이기 때문이다. 남의 기사로 신문을 만들어내지만 자신들만의 색깔을 가진 신문으로 옷을 갈아입히는 편집기자의 사명(?)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당시 겨우 30대에 접어든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내가 편집부 데스크를 맡고 있어 대우는 신문사내에서 가장 좋았지만, 결혼 후에도 계속 이 짓(?)을 해야 할 것을 생각하니 잠이 오지 않았다. 그렇다, 다른 매체의 기사의 표현과 문장을 출처를 밝히지 않은 채 '재사용'한 죄를 방임했던 큰 죄인이었다.

 

기사는 발로 쓰는 것이라는데, 참 신문지면 채우기 쉬웠다. 하지만 그보다 더 참기 힘든 것은 표절의 유혹이 아니었다. '선데이 서울' 보다 더 저질 수준으로 특정기업의 홍보지로 전락한 지면, 주재기자와 사장은 명함 자랑에 그치는 제호를 누가 알아봐 주겠는가? 호봉체계나 정기적 임금인상도 없고 사주가 그때그때 개별적으로 인상하는 게 전부였다.

 

기자들을 더욱 힘들게 만드는 것은 '열악한 임금+촌지+왜곡=사이비'라는 등식을 갖고 바라보는 주위의 시각들이었다. 혹시라도 처우개선 등 작은 움직임만 보여도 미련 없이 발행 중단으로 맞서니, 싸움 시작 전에 이미 직장을 잃어버리는 사태가 돌발하는 것이다. 당시 이직도 눈에 띄게 늘었다. 원인은 크게 두 가지. 신문사의 경영난과 기자직에 대한 회의가 그것이었다. 회사에 대한 실망도 크게 작용했다.

 

'참 언론, 바른 언론'에 뜻을 품었다가 자의반 타의반 그만둔 선배들의 마음고생을 이제야 알 것 같다. 회사의 성장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느낀 나도 과감히 이직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날짜만 명기하지 않은 사표를 이날 이후 가슴에 품고 다녔다.

 

신문사 악몽 벗어나는데 15년 결려

 

'과연 내 시각에서 직장을 다니는 첫째조건 이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일이 좋기를 하나, 사람이 좋나? 아니면, 보람이 있기는 하나? 그렇다고 돈을 많이 주기는 하나? 그것도 아니지 않은가?'

 

내가 소속되어 있는 곳이 없어진다는 것 자체가 좀 불안했지만 '나의 꿈' '나의 기대' '나의 비전'이 현실과 불일치됨을 확인하고 나니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그렇게 결심을 하고, 도망치듯 그 곳을 뛰쳐나온 나는 고향으로 내려왔다.

 

하지만 사표를 내는 순간은 드라마였지만 그 후는 리얼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IMF 이후 경제불황은 끊이지 않고 취업난은 극심했다. 대학원 공부를 시작하는 과정도 그리 쉽지 않았다. 하지만, 뼈를 깎는 아픔으로 새로운 분야에 과감히 뛰어 들어 지금은 수처리분야의 환경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렇게 신문사의 악몽에서 벗어나는데 15년이 걸렸다.

 

요즘은 '종편·보도전문채널'에도 진출하고 대우도 엄청나게 좋다고 하니, 신문사 근무할 만한가? 앞으로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다는 종이신문, 그렇지만 나에게 그곳에서 다시 근무하는 꿈만큼이나 무서운 악몽이 또 있을까?

 

"이 직업에서 잘못을 발견했을 때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최대한 빨리 잘못을 정정하는 것이다." (2003년 NYT '허위·표절기사 사과합니다' 중에서)

덧붙이는 글 | '이직 때문에 생긴 일' 응모글입니다. 


태그:#이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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