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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의 봄은 개나리보다 노란 산수유꽃으로부터 온다.
 구례의 봄은 개나리보다 노란 산수유꽃으로부터 온다.
ⓒ 지리산닷컴 권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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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의 겨울은 적요하다. 매서운 된바람에 사위는 잔뜩 웅크리고 있다. 여름 바람은 내리 불고 겨울 바람은 치 분다고 했다. 남해에서 발원한 바람이 섬진강을 타고 내륙으로 오르다 지리산으로 길을 트는 즈음쯤, 자리 잡고 있는 고장이 전남 구례다. 입춘을 갓 지난 지금, 구례는 고요한 가운데에서도 봄 마중을 싸목싸목 준비하고 있다.

구례의 봄은 산동면의 산수유꽃으로부터 시작된다. 개나리보다 더 노란 이 꽃이 피는 삼월이면 사람들은 비로소 봄이 왔음을 실감한다. 창백했던 겨울의 회억을 잊기 위해 전국에서 여행객이 모여 드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어지는 벚꽃과 매화의 향연. 연분홍의 벚꽃이 19번 국도를 가득 채울 때면 사람들은 내남없이 자동차를 몰거나 걸으면서 계절이 주는 푸짐한 선물을 만끽하고 마는 것이다.

아이보리빛 매화는 구례의 산야에 지천이다. 지리산과 그의 형제들이 곳곳에 똬리를 틀고 있는 산촌이라 매화가 피면, 허리띠를 맨 것처럼 산허리가 하얗다. 눈에 보이는 것만 그뿐이지 대지에 납작 엎드려 고개를 내민 야생화는 또 얼마인가. 그래서 구례는 '꽃의 고장' '자연의 화원'이라 할 만하다.

'자연의 화원' 구례에 문화콘텐츠도 풍성해져

구례 군민극단 '마을' 창립공연작 <인생콘서트39°5"> 포스터.
 구례 군민극단 '마을' 창립공연작 <인생콘서트39°5"> 포스터.
ⓒ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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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년과 달리 올 봄 구례에는 작은 변화의 몸짓도 꿈틀댄다. 위대한 자연의 향연에 비길까마는, 인간 사는 세상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시도인지라 전국에 자랑하지 않을 수 없다. 군민극단 '마을'이 지난 1년여의 수고 끝에 비로소 창립공연의 막을 올리는 것이다. 작품 이름은 <인생콘서트 39°5">. 2월 18~19일 늦은 4시, 구례 섬진아트홀에서다.

구례의 자생적 극단인 '마을'은 구례로 귀농·귀촌한 도시민과 원주민이 하나가 돼 '군민극단'을 지향하며 만들었다. 이 극단의 이상직 대표는 "돈 있고 고상한 사람들만 연극을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남사당패가 장터에서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렸듯 누구나 참여하고 누리는 공연을 지향한다"고 말한다. "다양한 작품을 구례 군민 스스로 만들어, 군민이 배우이고 군민이 관객 되는 '일체(一體)'의 공연에서 희망을 보고 싶다"는 바람도 덧붙인다.

극단 '마을'의 가장 큰 특징은 극단 이름부터 작품 선정과 연습에 이르기까지 모든 공정에 군민이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민주적으로 결정한다는 데에 있다. 2011년 5월 24일, 이상직 대표를 포함해 불과 세 사람이 모여 뜻을 모을 때만 하더라도 창립공연의 막까지 올리리라곤 그들조차 상상하기 힘들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지리산과 섬진강으로 둘러싸여 아늑한 분지에 자리 잡은 전남 구례를 '풀뿌리 문화의 고장'으로 뿌리 내리게 하고 싶다는 단원들의 간절한 마음이 이후의 예기치 못했던 난관을 모두 극복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극단 이름만 해도 '우리 동네' '논빛' '누룩' 등의 후보명을 스태프가 각자 내고 전원의 의견 조정을 거쳐 정한 바 있다. 뿐만 아니라, 작품 연습장소도 구례가 문화의 고장으로 꽃 피기를 바라는 원주민의 아낌없는 희사로 어렵사리 해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처럼 무사히 창립공연을 올리게 된 데에는 이상직 대표의 공이 크다. 이 대표는 2010-2011 국립극단 공연 <오이디푸스>의 주연을 맡아 열연했고, '2000 백상예술대상' '2004 히서연극상 올해의 연극인상'을 수상한 대한민국의 정통 연기파 배우다. 그러나 뜻한 바 있어 귀농을 결심, 이곳 구례로 내려온 그는 산과 강의 낭만을 만끽하다 불현듯 산야에서 정직하게 농사를 지으며 평생을 일구는 구례의 농부들에게 눈길을 돌리면서 그들과 함께 하는 삶에 대해 고민을 거듭하게 된다.

"문화가 별것은 아니잖아요. 도회에서는 관람료만 내면 원하는 모든 이가 감상할 수 있는데, 우리네 시골에서는 낮에 힘든 육체 노동을 해야 하기 때문에 저녁에는 힘들어 아무것도 하시지 못하더라고요. 그래서 '찾아가는 연극'을 지향하려는 겁니다."

그의 계획대로라면 창립공연이 끝난 다음, 극단 '마을'은 구례에 산재한 130여 곳의 '마을'을 찾아 다니며 공연을 하게 된다. 그 옛날 남사당패가 그랬던 것처럼.

지리산 오지마을까지 찾아 다니며 공연 열 터

구례 군민극단 단원들이 창립공연 <인생콘서트39°5"> 작품연습에 열정을 다하고 있다.
 구례 군민극단 단원들이 창립공연 <인생콘서트39°5"> 작품연습에 열정을 다하고 있다.
ⓒ 전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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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공연은 닐 사이먼 원작의 <굿닥터>를 구례 상황에 알맞게 각색해 <인생콘서트 39°5">이라는 작품으로 막을 올린다. 러시아 희곡작가 안톤 체호프가 젊은 시절 신문에 연재했던 짧은 이야기를 옴니버스식으로 구성한 것이다. 이 중 이번에 올리는 이야기는 '재채기' '아줌마' '치과의사' '유혹' '오디션' '의지할 곳 없는 신세' 등의 여섯 개 단막이다.

'재채기'는 말단 공무원의 재채기로 인한 심리적 갈등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아줌마'는 깐깐한 사모님이 착하기만 한 아줌마를 통해 살아가는 방법을 익살스럽게 보여 준다. '치과의사'는 오버하는 수녀님과 시건방진 조수를 통해 서로에 대한 신뢰의 중요성을 보여 주고, '유혹'은 남의 아내를 노리는 남자와 남편의 입을 통해 변화하는 아내의 심리적 갈등이 적나라하게 표현되며, '오디션'은 순박한 시골처녀의 재능이 발현되는 과정에서의 진한 페이소스를 관객에게 전달한다. '의지할 곳 없는 신세'는 지점장과 괴팍한 노파가 벌이는 한판의 굿이다.

여기에 출연하는 모든 인물과 상황을 구례 상황에 맞게 설정한 것과 구례 주민인 배우들이 구례 사투리를 마음껏 쓸 수 있도록 한 것이 이번 작품의 감상 포인트. 이런 내용과 형식은 관객에게 연극을 통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끔 하고, 보다 친숙하게 연극이란 문화 장르를 느낄 수 있도록 해 줄 것이라 기대된다.

창립 공연 후 구례 군민극단 '마을'은 일회성 공연에 그치지 않고, 지속적인 공연과 활동을 통해 지역주민과 지속적으로 함께 할 수 있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이와 관련해 극단의 이행은 사무국장은 "공연수익금의 일정 부분은 마을로 직접 찾아가는 공연 기금으로 조성되고, 5월 어린이날에는 아동극을 올리며, 다양한 계층과 관심 있는 군민들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도록 내용과 형식을 다변화해 꾸려나갈 계획"이라고 말하고 있다.

최근 자본주의의 시스템에 신물이 난 도회인들의 귀농·귀촌 러시가 전국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들은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자본의 메커니즘에 어쩔 수 없이, 저도 모르게 따라가다 보니 자기 인생의 즐거움을 찾을 수 없었다고 한결같이 이야기한다. 메마른 인생을 탈피하기 위한 방책의 하나로 시골살이를 택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눈여겨볼 것은, 이들은 도회생활에서 익힌 '밥벌이 기술' 한 가지씩은 전부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시골살이에서 이는 누군가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굳이 표현을 하자면 '기술 기부' '기술 나눔'이라고 할까. 어떠한 종류의 기술이든 상관 없다. 마케팅은 마케팅대로, 보일러 기술은 보일러 기술대로, 또 이상직 대표처럼 연극 연출력은 그대로 이곳에서 활용할 수 있다. 그는 "진정으로 농사 지으며 연극하고 싶다"고 말한다.

이렇게 한 명 한 명이 주민과 공동으로 실천할 때 전국의 각 고장은 자생적 풀뿌리 문화 콘텐츠로 풍성해질 것이다. 그 길을 '자연의 화원' 구례가 앞장서고 있다.


태그:#구례, #산수유꽃, #군민극단, #인생콘서트, #풀뿌리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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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줌도 되지 않는 자본의 권력가를 위해 99%의 희망 없는 삶으로 지내왔던 지난 날을 통렬히 후회하며, 조금더 나은 삶을 찾아 보고자 지리산과 섬진강 도도한 전남 구례로 이사 왔습니다. 농사도 짓고, 여행도 하면서 사는 일상이 흥미롭습니다. 여러분도 '지금' 결단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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