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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15일 저녁이었다. 광복절이라 쉬는 날이었지만 시청에서 지역 행사가 있어서 종일 돌아다니다가 밤 9시가 돼서야 집에 도착했다. 방바닥에 널브러진 채 피곤에 지친 몸을 쉬고 있는데 휴대전화가 울렸다. 시골에 계신 어머니셨다. 이 시간이면 으레 안부 인사 겸 전화를 하시길래 별 생각 없이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자식들이 하나같이 왜 그렇게 무심해!"

어머니는 그렇게 짧은 한마디만 던지고 툭 전화기를 끊어 버리셨다. 나는 수화기를 든 채 한동안 멍하게 서 있었다. 다시 전화를 걸었다.

노기 가득한 어머니의 전화 한 통에 당황하다

"웃집 고모랑 서울 이모들은 조금만 비가와도 아침 일찍부터 별일 없냐고 안부 전화하는데 자식 놈들은 왜 그리 무심해. 아무리 애미가 너희들한테 해 준 것이 없다고 해도 너무 무심해!"

어머니는 다시 전화를 끊어버리셨다. 아뿔싸! 작은 방이 기어이 와르르 무너져 버린 모양이다. 며칠 전에도 어머니는 "비가 많이 와서 작은방 한쪽 벽이 다 무너져 내렸다"며 "애미랑 막내가 걱정도 안 되느냐"며 반쯤 서운한 목소리로 전화를 하셨다.

한 시간 정도 지나서 전화를 걸었다.

"작은 방이 얼마나 무너졌어요? 큰 방은 이상 없어요? 막내는요?"
"천장은 벌써 무너졌고 요 며칠 계속 비가 내리더니 어젯밤에 한쪽 벽이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그러길래 제가 뭐라고 했어요. 방 두어 칸짜리 전세라도 얻을 테니 이제 그만 시골살이 접으시고 올라오시라고 했잖아요. 어머니가 싫다고 하셔 놓고 이제 와서 아들 불효자식 만드시는 거예요..."

자식들한테 짐이 되고 싶지 않은 어머니

매년 여름 장마철만 되면 집이 무너질 것 같아서 불안했다. 불안하기는 겨울에도 마찬가지였다. 눈이 조금이라도 쌓이면 지붕이 내려앉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는 수년 전부터 성남으로 오시라고 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몇 년만 더 버텨보자고 하시며 올라오시기를 망설이셨다.

"나는 너한테 짐 되는 거 같아서 그랬지..."
"내일 오후에 내려갈게요."
"뭣 하러 내려와. 밤새 비는 세고 흙은 무너져 내리고 그거 치우다 보니 그냥 속상해서 한 말이야. 너 와봤자 딱히 무슨 수가 있는 것도 아니고."
"무슨 수라도 내봐야죠."

그러나 어머니는 한사코 내려올 필요 없다고 하셨다. 그럼 급한 일 생기면 연락 주시라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그날 새벽까지 잠을 설쳤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어머니에게서 연락이 왔다.

"아무래도 니가 내려와야 쓰겄다."
"작은 방 무너진 벽 흙더미를 마당으로 퍼내야 하는데 애미도 힘이 부치고 막내도 힘이 없으니 니가 내려와서 흙 좀 퍼 날라야 될 것 같다."
"형은 연락됐어요?"
"그 자식은 전화도 안 받는다. 한 달 일한 월급 아직도 못 받은 모양인데 요즘 지 사정이 더 급한 모양이다."

태풍 '볼라벤'이 오기도 전에 무너진 시골집

오후 3시께 집으로 출발했다. 아이들 수업은 다른 선생님께 부탁했다. 아무래도 차가 필요할 것 같아서 푸른학교(지역아동센터) 법인 차를 빌려서 내려갔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내내 착잡했다. '성수대교'가 무너지고 '삼풍백화점'이 무너질 때도 끄떡없던 집이 올해는 태풍 '볼라벤'이 오기도 전에 무너졌다. 태풍 '매미'와 '루사' 때도 굳건히 버티던 시골 흙집이었는데 말이다. 이미 그 집은 오래 전부터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단지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것들을 피하기 위해 이미 무너져 버린 그 집을 멀쩡하다고 여겼던 건지도 모른다. 어머니가 한사코 고집하니 나는 인정해 버렸던 것이다.

차라리 잘됐다. 낡은 시골집은 아련한 추억이나 그리움이 아니라 벗어날 길이 없는 절망이었다. 매년 명절을 보내고 올라오는 버스 차창 밖 풍경을 바라보며 언젠가는 그 낡은 집을 내 손으로 허물어 버리겠다고 마음먹은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포클레인에 앉아 육중한 쇠공으로 기둥부터 하나하나 부숴버리고 싶었다.

지난여름 장마로 무너진 창고. 작은방의 천장이 아래로 내려 앉은채 흙더미가 가득 쌓여 있다.
▲ 시골집1 지난여름 장마로 무너진 창고. 작은방의 천장이 아래로 내려 앉은채 흙더미가 가득 쌓여 있다.
ⓒ 김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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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꾸면 네 식구가 비좁은 방에서 꼼짝달싹 못한 채 허우적거렸다. 지금도 나의 공간은 눅눅한 벽지가 여섯 겹은 넘을 그 비좁은 방이 전부였다. 아무리 화려하고 넓은 곳에 있어도 내가 진정한 자유와 위안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은 지금도 딱 그만큼이다. 오후 7시가 조금 넘어서 집에 도착했다. 예상대로 작은 방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손잡이와 문짝이 떨어져 나간 가구와 두터운 이불 두 채가 무너진 천장을 겨우 떠받치고 있었다. 아침밥을 든든히 먹고 오전 9시부터 흙을 마당으로 퍼내기 시작했다.

천장을 떠받치고 있던 구조물 중간이 끊어진 채 반토막 나있다.
▲ 시골집2 천장을 떠받치고 있던 구조물 중간이 끊어진 채 반토막 나있다.
ⓒ 김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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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세 시간이면 다 될 것 같았는데 막상 시작하고 보니 하루, 아니 이틀은 족히 퍼내야 할 분량이었다. 게다가 흙을 퍼낼 때마다 천장에 남아 있던 흙들이 후두두 흘러내렸다. 천장이 더 내려앉았다. 오전이지만 햇볕이 따가웠고 삽질을 서너 번만 해도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오후에 형도 내려온단다."

형이 내려온다는 소식을 전하는 어머니의 표정에 화색이 돌았다. 흙은 퍼내도 퍼내도 줄지 않았다. 산처럼 쌓인 흙더미에 숨이 막히던 나도 살 것 같았다. 사실 나는 이런 일은 서툴렀다. 매일 아이들하고만 지내니 그럴 법도 하다. 반으로 쪼개진 천장 구조물을 어떻게 들어올려야 할지 막막했다. 삽질도 몇 년 만에 해보는 것 같았다. 서툴고 더디지만 쌓였던 흙은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막내는 이장님 댁에서 빈 수레 하나를 빌려 오더니 천장에서 떨어져 나온 썩은 나무며 창고의 잡동사니를 실어 나르기 시작했다. 웃집 고모부가 몸이 불편한데도 수시로 오가면서 흙더미 치우는 것을 도와주셨다.  

하루 세끼 밥만 해줘도 자식들에겐 남는 장사

"한 2년만 더 버텨 보려고 했는데. 노령연금이랑 국민연금 나오면 너한테도 덜 짐이 될 것 같고..."

30년 가까이 시골 생활을 하셨던 분이 갑갑한 도시생활을 견딜 수 있을까. 걱정도 앞서지만 아버지 묘만 아니면 이제 딱히 이곳에 남겨 둘 미련은 없었다. 서울에 이모 세분이 살고 계시기에 오히려 당신이 왕래하면서 지내시기엔 더 좋았다. 어머니도 어느덧 요양 보호사 육년차셨다. 기력만 되신다면 도시에서도 충분히 작은 아들에게 의지하지 않고 살 수 있을 분이다. 어머니는 '하루 세끼 밥만 해줘도 자식들에겐 남는 장사'라는 큰이모의 말을 수차례 반복하셨다. 일단 올라 가면 무슨 수든 생길 것이다. 정작 문제는 막내지만.

차를 가지고 온 덕분에 김제역까지 형을 마중 나갔다. 어머니도 모처럼 아들이 운전하는 차 좀 타보자며 막내와 함께 차에 올랐다. 부안덕이 주말만 되면 큰아들 차를 타고 읍내로 외식하러 가는 게 항상 부러우셨단다.

고모부는 어머니에게 아랫마을 김씨 아저씨에게 집수리 좀 부탁해보라고 하셨다. 목수일을 오래 하셨던 김씨 아저씨는 한번 훑어 보시더니 집에서 연장을 몇 개를 챙겨 오셨다. 그리고 무너진 천장을 떠받칠 두꺼운 원목을 2개 정도 구해오라고 하셨다.

다행히 이장님 댁 뒤편에 버려둔 두꺼운 원목이 있었다. 새로 지은 이장님 댁은 너무나 예쁘고 아름다웠다. 형과 나는 원목을 어깨에 메고서 집까지 날랐다. 오전부터 흙을 퍼 나르느라 기진맥진하던 나는 어깨가 끊어질 것처럼 아팠다. 김씨 아저씨가 시키는 대로 원목을 자르고 무너진 천장을 세우고 그 위에 기둥을 덧댔다. 어두워지기 전에 원목을 기둥으로 세우니 폭삭 내려앉은 천장 구조물이 마침내 제자리를 찾았다.

무너진 흙더미를 치우고 두꺼운 원목으로 지붕을 세운다운 붉은 천막으로 덮어 놓았다.
▲ 시골집 3 무너진 흙더미를 치우고 두꺼운 원목으로 지붕을 세운다운 붉은 천막으로 덮어 놓았다.
ⓒ 김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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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을 퍼내는 중간중간 나는 어머니에게 다시 한 번 성남으로 올라가자고 했다. 이번엔 기필코 물러서지 않을 작정이었다.

"이 집 수리해 봤자 완전히 허물고 새로 짓지 않는 이상 돈만 낭비잖아요. 돈도 돈이지만 우리 땅도 아닌데, 새로 짓는 것도 그렇고 땅주인도 허락하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더 이상 망설이지 마시고 결정하세요."

사실 땅은 물론이고 이 낡은 시골집도 우리 소유가 아니었다. 20년 전 큰집 식구들이 부천으로 이사 가면서 우리에게 내준 것이다. 1년에 쌀 서너 짝 값을 땅세로 주인에게 주고 있었다. 적어도 부동산에서 만큼은 우리 네 식구는 법정 스님의 '무소유의 삶'을 철저히 실천하고 있었다. 뒷집도 작년에 혼자 사시던 아저씨가 돌아가시자 떼국놈(어머니 표현)인 땅 주인이 집을 허물어 버리고 밭을 만들어 버렸다.

방 세칸짜리 전세로 다시 시작하는 도시의 삶

이제 곧 가을 이사철이다.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전세 시세가 심상치 않단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원룸도 벌써 10년이 넘었다. 그사이 두 번 전세금을 올려줬다. 그동안 보일러 교체하는 것만 빼면 집주인도 크게 박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그런 혼자만의 안락함(?)은 포기해야 한다. 어머니와 내 돈을 합하면 변두리에 세 식구 살 전세방 하나 정도는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남들은 이제 학부형이 될 나이이지만 중학교 졸업 이후 떨어져 살았던 식구들이 다시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한다. 사실 나는 몇 년이 지나면 시골 한적한 곳에 버려진 집이라도 얻어서 조용히 살고 싶었다. 당분간 그 바람은 뒤로 연기해야 할 것만 같다.

"형이랑 막내는 몰라도 너는 분명히 잘 될 거야!"

어머니는 마흔 이후의 삶이 '장밋빛'이라던 무속인의 말을 여전히 믿고 계셨다. 믿을 게 없어서 그런 걸 믿냐고. 예전엔 어머니가 그런 말을 할 때마다 핀잔도 줬다. 하지만 이제 나도 어머니처럼 그 무속인의 말을 믿고 싶다. 아니 꼭 그렇게 될 것만 같다. 돌아보면 나의 20대는 30대를 준비하는 과정이었다. 또한 30대는 40대를 준비하는 과정이었다.

이제는 준비보다는 조금쯤 누려도 될 그런 삶이 우리 가족에게 찾아올 것이다. 세상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다던 불혹. 그 이후의 삶.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무속인의 예언을 믿어보자. 나는 분명 잘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선 내 놓은 지 한 달이 지난 이 작은 골방이 먼저 나가야 할 텐데. 1시간 전에 부동산 주인과 함께 방을 보고 간 40대 남자의 뒷걸음이 무겁게 보이는 까닭은 왜일까.

덧붙이는 글 | 나는 세입자다. 기사 공모입니다



태그:#전세, #태풍, #장마,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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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 뉴스 시민기자입니다. 진보적 문학단체 리얼리스트100회원이며 제14회 전태일 문학상(소설) 수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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