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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식(방송통신위원회 부위원장)이 스무살에 쓴 시 중에 '사막의 노래'라는 게 있었다. 1967년의 '7일 전쟁' 이후 이스라엘과 이슬람 국가들 간의 숙명적인 전쟁, 그 피의 메시지가 우리 사회를 전율시킬 때였다. 김충식은 뜨거운 사막 위에서 민족 간에 벌어지는 중동전쟁을 '생존 권력'의 id(인간이 선천적으로 지닌 본능적 욕구)라는 관점에서 시로 풀어썼다.

만만치 않은 장시인 동시에 서사시였다. 문학동인회 문집을 만드느라고 김충식의 원고를 받은 나는 혀를 내둘렀다. '아직 어린 나이에 국제문제, 그것도 권력의 문제를 시로···' 김충식의 글은 그렇듯 조숙했다. 당시 나는 김충식에게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 정치평론을 하지 않을까."

권력자간에 암투와 골육상쟁을 야기했던 권력 id

 '남산의 부장들' 표지
ⓒ 폴리티쿠스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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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20년 뒤 김충식은 <남산의 부장들>(동아일보사)을 책으로 펴냈고, 다시 20년이 된 지금, 같은 제목의 개정 증보판(폴리티쿠스 출판사, 교보문고 eBook 동시간행)을 출간했다. 이 책이 처음 나왔을 때도 그랬지만, 지금 나는 젊은 시절 '사막의 노래'를 접했던 느낌이 그대로 되살아남을 깨닫는다. 김충식의 정신과 글솜씨 그리고 그것으로 시도하는 권력 대해부.

남산(KCIA, 과거 중앙정보부의 별칭)의 부장들. 이들이 박정희 통치 18년간 민주주의 사막이었던 한국에서 벌였던 온갖 행태, 즉 안보·외교에서 정치공작, 선거조작, 이권배분, 정치자금 징수, 미행, 도청, 고문납치, 언론·문학·예술의 사상 평가, 심지어 지도자의 여색 관리에서 밀수·암살에 이르기까지···. 나랏일 전반(백성의 사생활에까지)을 무소불위로 주무르고 난도질했으며 그들 권력자간에 암투와 골육상쟁을 야기했던 권력 id.

누구나 당하거나 짐작했고, 또는 듣고 보아서 알고 있었지만 실체를 이렇게 적나라하게 파헤친 이는 없었다. 김충식이 최초로 파헤쳤다. 그러나 말하고 싶은 것은 김충식의 '최초'라는 신기록이 아니다.

아직 남산의 권력이 서슬 푸른 엄혹한 시절에 감히 펜대 하나로 그 몸통을 파고들었다는 점이다. 권력의 이면을 파헤친 논픽션은 지금까지 나라 안팎에 많았다. 하지만, 살아있는 중앙정보기관을 매개로 권력의 행태를 샅샅이 파헤쳐 햇볕 속에 드러낸 기자는 어느 나라에도 흔치 않다.

자의성이 거부되는 기자의 시린 운명

1985년 8월, '중공기 승무원 송환' 관련 기사로 남산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았던 일이, 오히려 김충식에게는 다시 한번 기자 정신을 다진 계기가 된 것일까. 김충식은 책의 후기에서 이렇게 썼다.

"기자의 운명이란 해석보다는 군더더기 없는 사실 기록을, 미사여구보다는 증언과 자료의 리얼리티를 중시하는 것. 그러므로 자의성은 거부된다. 바로 그것이 기자의 시린 운명이다···."

기자라면 누구나 평생 뇌리에서 제거할 수 없는 말이다. 객관적이고 정확한 그리고 건조한 '사실', 이러한 사실들을 구성해서 만드는 게 사실 기사(스트레이트)다. 의견기사라고 할지라도 객관적인 사실의 전제 위에서 기자의 의견을 밝혀야한다. 그래서 '사실과 의견을 구분하라'는 것은 기자들에게 십계명과 같은 저널리즘 강령이다.

'사실'은 객관적인 것이며 '의견'은 주관적인 것이다. 하지만 때로 '사실'은 강한 주관이 된다. 그 자체로 강력한 '의견'이 되고 탁월한 정치평론이 된다. 도도한 웅변이 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남산의 부장들'은 비사나 비화의 모음집이 아니다. 기자가 충실한 취재를 통해 발굴해낸 객관적이고 정확한 사실들의 정사이자 이 시대에 던지는 강력한 의견이다. 탁월한 서사시며 정치평론이다. 스무살 때 그의 시 '사막의 노래'를 읽고 '정치평론을 하겠다'고 밝혔던 나의 예측은 결과적으로 맞았다.

'남산의 부장'은 또 다른 점에서 저널리즘의 개가라 할 수 있다. 기자가 취재해 쓴 객관적이고도 건조한 기록, 논픽션 책이 52만부가 팔리는(일어판 포함) 기록을 세운 것이다. 논픽션 책이 이 정도 팔렸다면, 단순히 그 책의 내용이 충실한 취재, 정확한 '사실'들 때문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독자에게 주는 감동과 재미가 없다면 나오기 힘든 기록이기 때문이다. 충실한 취재·정확한 사실 외에 뛰어난 문장 솜씨가 있기에 가능한 결과다. 같은 사실이라도 문장 속에서 어떻게 관리할 것이며, 전체 글의 구성은 또 어떻게 할 것인지 등 문필 소양과 내공이 없이는 어려운 일이다.

기이한 역사의 인과와 섬뜩한 데자뷰

이 시점에서 저자의 말처럼 기이한 역사의 인과와 섬뜩한 데자뷰(旣視感)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박정희가 죽은 지 30년이 넘은 지금, 그의 딸 박근혜는 여당 대통령 후보이다. 그 경쟁자인 야당의 문재인은 과거 박정희에 항거했던 대학생이었다. 그는 김영삼·김대중 밑에서 자란 반항정객 노무현의 친구이기도 하다. 박근혜와 여당 내에서 맞섰던 이재오·김문수 역시 박정희 시대의 투사들이었고.

그런가하면 박근혜와 당내 경쟁자였던 정몽준은 박정희 시대의 권력이 키운 정주영의 아들이다. 얼마 전 민주당 대표직에서 물러난 이해찬 역시 운동권 학생이었고 민주당내 대통령후보 경선에 나섰던 손학규 역시 반유신 대열에 앞섰던 인물이다. 여당내 대통령후보로 명함을 내밀었던 임태희는 군사정권 시대 하나회 출신 중 핵심이었던 권익현의 사위다.

실로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다'라고 한 E.H. 카의 말이 실감난다. 아니, 한국의 경우,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결이라고 할까. '2012 대선'을 앞두고 다시 죽은 박정희와 죽은 노무현이 치열하게 대결하고 있다.

우리가 발 딛고 서있는 지표, 바로 그 밑 지층에는 아직도 제대로 잠들지 못하는 박정희 시대의 흰 뼈들이 있다. 그래서, 이젠 그 뼈들을 편히 잠재우고 새로 시작하자 해서 '안철수 현상'이 오랫동안 한국 사회를 휩쓸었던 것일까.

정치권력에서 민초들의 삶에 이르기까지 그 원형질을 물들이고 급기야 DNA화 했던 18년의 시대, 또는 전두환·노태우까지 그 이상의 시대. 지금 '남산의 부장들' 개정 증보판을 다시 읽어보면,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우리 삶의 형질을 새삼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성찰하게 된다.

덧붙이는 글 | 필자 김지영(EBS 이사)은 <경향신문> 편집국장을 지냈다.



남산의 부장들 - 개정 증보판

김충식 지음, 폴리티쿠스(2012)


태그:#김충식, #남산의부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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