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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화의 특징 중 하나가 '빨리빨리 문화'다. 무슨 일이든 '빨리 빨리'를 빼고는 얘기가 되지 않는다. 한국전쟁의 상흔을 딛고 초고속 경제성장을 이루게 된 배경에는 이런 '빨리빨리 문화'가 긍정적으로 작용한 면도 있겠지만, 한국인들은 급해도 너무 급하다.

화장실에 들어가기도 전에 바지 지퍼부터 내리고, 볼 일이 끝난 후 지퍼를 채 다 올리기도 전에 화장실 문을 나서는 남성분들 때문에 민망한 경우를 겪는 건 예삿일이다. 한국인의 이런 급한 성격을 부추기듯 TV는 물론 영화관과 거리 곳곳에서도 '빠름~ 빠름~'을 부르짖는다. 

물론 '빨리 빨리'의 추구가 한국만의 특징은 아니다. 산업화시대를 지나오며 '현대는 속도전'이라는 말이 전 세계를 몰아쳤다. 빠른 것은 느린 것에 비해 효율적이고 생산적이며 더 많은 이익을 보장한다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그런데 과연 빠른 것이 정답일까?

'빠름 빠름'을 외치며 속도전으로 밀어붙인 '4대강 사업'은 22조원이라는 어마어마한 돈을 쏟아부었지만 총체적 부실로 판명 났고, 곳곳에서 그 부작용이 드러나고 있다. '사고 공화국'의 오명을 안겼던 90년대의 성수대교 붕괴와 삼풍백화점 사고 역시 '빨리빨리 문화'가 만들어낸 대표적인 예다. 

<속도의 배신> 겉표지
 <속도의 배신> 겉표지
ⓒ 추수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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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레 해도 되는 일을 왜 내일까지 끝낸단 말인가?"라고 비판하던 미국 소설가 마크 트웨인의 불만처럼 도대체 왜 우리는 기다림과 늦춤, 미룸을 모른단 말인가. 공자는 논어에서 '욕속즉부달(欲速則不達)' 즉 '빨리 하고자 하면 도달하지 못한다'라고 말한 바 있다.

프랭크 파트노이의 <속도의 배신>(추수밭 펴냄)은 제목 그대로 빠른 속도가 성실과 효율의 상징이며 이익과 성공을 보장한다는 일반의 믿음을 배신한다. 즉 느린 건 게으름과 비능률의 표상이며 손해와 패배로 이어진다는 생각에 반기를 든 것이다.

2004년 <전염성 탐욕>(필맥 펴냄)으로 월가의 위기를 예견했던, 미국 샌디에이고대 법학·경제학 교수이자 금융 전문가인 저자는 의사결정과 시간을 다룬 심리학, 행동경제학, 신경과학, 법, 금융, 역사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 성과를 분석한다.

그리고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늦춤'과 '미룸'의 가치를 새롭게 조망한다. 원제 <WAIT-THE ART AND SCIENCE OF DELAY>가 말해주듯 이 책은 늦춤의 기술과 과학을 통찰한다. 저자는 빠름을 추구하는 속도전의 시대에 오히려 늦추고 미루는 것이 의사결정에서 더 현명한 선택이라고 주장한다.

사과는 '늦춤의 미학', 미루는 것이 정답이다

잘못을 저질렀을 때 그 즉시 사과를 해야 할까? 일반적으로 우리는 잘못을 하면 즉시 사과해야 한다고 배웠다. 그런데 아니란다. 복잡한 지하철에서 타인의 발을 밟는 것처럼 의도가 전혀 없는 단순한 실수가 아닌 이상, 사과는 즉시하면 안 된다. 사과에도 타이밍이 있기 때문이다.

사과는 늦춤의 미학이다. 친한 친구나 가족에게 잘못을 하거나 직장에서 다시 주워 담고 싶은 말 실수를 저질렀을 때의 교훈은, 오늘이 아닌 내일, 또는 지금 당장이 아닌 몇 시간 후에 사과를 한다면 피해를 입은 상대방이 어떻게 반응할지를 상상해 봐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내가 사과를 늦추어서 친구나 친척, 동료가 반응하고 느낌을 말할 기회를 가지며 내 후회를 들어 줄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다면, 지금 당장 하는 것보다는 미루는 것이 정답이다(본문 186쪽).

잘못을 한 후 즉시 사과를 하는 것은 사과의 효과가 떨어지고 부정직해 보일 수도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몇 시간이든 혹은 며칠이든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사과하는 것이 더 진정성 있고, 사과 받는 사람에게 잘못을 저지른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사과는 즉시 하는 것보다 늦추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경우에도 곧바로 사과하는 것보다는 타이밍을 생각해 봐야 한다. 먼저 잘못을 인정하고, 상대의 말을 들은 후, 잠시 멈추고 언제, 어떻게 다음 단계를 취할지 생각한 다음, 정황을 설명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충분히 시간을 가진 후 가능하면 가장 늦게, 미안하다고 사과하라고 저자는 말한다. 너무 뜨겁거나 차갑지 않고 따뜻하게!

일반적으로 현대인들은 생산성과 효율성에 강박관념이 있기 때문에 미루는 것을 싫어하고, 심지어 미룸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기도 한다. 그래서 항상 책상 앞에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마라',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와 같은 격언을 붙여두고 스스로를 다잡는다. 하지만 이런 부지런함에 대한 강박관념이 항상 있어왔던 것은 아니다.

고대 이집트와 로마인들은 오히려 미루는 것을 유용하고 현명한 일로 여겼다고 한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18세기 중반까지도 미루는 것을 문제시하는 것은 소수 의견에 불과했다. 명사들 중에는 상습적으로 할 일을 미뤘던 사람들이 많은데, 아우구스티누스, 레오나르도 다 빈치, 애거사 크리스티, 빌 클린턴 전 대통령과 같은 사람들이 바로 대표적인 예다.

그들은 서둘러서 일을 빨리 끝내기보다는 미룸을 통해서 스트레스나 다른 문제를 겪지 않고 많은 훌륭한 일들을 성취해 낼 수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 아우구스티누스는 "주여, 저를 정갈하게 해 주소서. 그러나 오늘 당장은 아니 되옵니다!"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이처럼 역사에서 미룸은 항상 있어 왔으며, 어떤 학자들은 미룸을 인간 본성의 중심에 깊이 자리한 현상으로 파악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러니 새해를 맞아 분 단위로 시간을 쪼개가며 바삐 살아갈 한 해의 계획을 세웠다면 자신에게 이야기해 볼 일이다. '너무 서두르지 말라고'

미룰 수 있는 한 미루어라... 느림 속에서 나타나는 '혁신'

심리학자인 짐바르도와 보이드는 인간에 대해 '메가헤르츠의 시대에 사는 헤르츠의 기계가 되었다'고 말한다. 해가 떠서 질 때까지 태양의 움직임에 따라 일을 하던 시절과 달리, '60분=1시간'이라는 인위적인 단위가 하루를 분할하게 되면서, 시간은 인간의 행동을 조직화하고, 효율성이라는 개념으로 인간을 통제하게 되었다.

효율성이란 정해진 시간 내에 빨리 일을 처리하는 것이다. 대개 효율성의 추구는 속도주의와 단기성과주의로 나타난다. 그러나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도, 팀 버너스 리의 월드 와이드 웹도 어느 날 문득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다가 혹은 친구들과 정보를 주고받기 위해 불현듯 생각해낸 아이디어가 아니다.

저자는 대부분의 위대한 아이디어는 어렸을 때의 강박적인 행동에서 비롯되며, 무작위로 충돌하고 부정 출발을 하는 확장된 사춘기를 지나, 마침내 처음 뿌리를 내린 때부터 수십 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꽃을 피운다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세계 바둑의 최강자 이세돌이 은퇴를 선언하면서 남긴 이야기는 사뭇 가슴에 남는다.

한국 바둑계가 바둑의 무한한 길을 스스로 깨우치도록 어린 꿈나무들의 창의력이나 가능성을 살리지 못하고, 마치 입시처럼 단기간의 성적향상을 위한 주입식 교육에만 매달리고 있다는 그의 쓴소리는 비단 바둑계에만 해당하는 얘기는 아니다.

저자는 늦춤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심오하고도 근본적인 인간 조건 중 하나이며, 늦춤에 관한 질문은 실존적이라고 말한다. 삶은 시간과 대항하는 경주라는 것이다. 따라서 본능을 뛰어넘어 시계를 멈추고 현재 내가 무엇을, 왜 하는지 파악하고 이해한다면 삶은 더욱 풍부해진다고 말한다.

유속이 빠른 강에는 고기가 살기 어렵다. 고기가 살기 위해선 바위도 있고 수초도 있어 멈추고 쉴 수 있어야 한다. 하니 눈앞의 이익과 현실을 좇아 너무 바쁘게 서둘기보다 한 박자 쉬고 두 박자 느리게 가는 건 어떨까.

덧붙이는 글 | <속도의 배신>, 프랭크 파트노이 지음, 강수희 옮김, 추수밭 펴냄, 2013년 1월, 1만 5000원



속도의 배신 - 왜 어떤 이는 빨라도 실패하고, 어떤 이는 느려도 성공하는가

프랭크 파트노이 지음, 강수희 옮김, 추수밭(청림출판)(2013)


태그:#속도의 배신, #프랭크 파트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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