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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부터 꿈이 있었어요. 나 개인을 위한 삶이 아닌 세상을 위한 삶을 살겠다는."

젊은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했을 때, 86세의 아나키스트는 눈가에 부드러운 주름을 지으며 어린아이 같은 웃음을 머금었다.

올해로 여든여섯 해를 넘긴 이문창 선생을 최근 서울에서 만났다. 이 선생은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정정하고 기억력도 뛰어났다. 대한민국에서 평생 아나키스트로 살아왔다는 것은 고통과 고난으로 점철된 세월을 보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선생의 얼굴엔 한이나 분노가 서려있지 않고 부드러움과 겸손함, 그리고 깊이를 알 수 없는 평화로움이 깃들어 있었다.

뒤로 보이는 골목은 악명높았던 일본 경찰 사이가가 살았던 원남동 140번지 부근이다. 사이가는 1945년 11월에도 본국으로 귀환하지 않고 조선에 남아 조선민중을 위협하는 행태를 일삼다가 이규창, 김지강, 차리혁 등의 아나키스트 혁명가들에게 처단되었다.
▲ 평생 아나키스트로 살아온 이문창 선생 뒤로 보이는 골목은 악명높았던 일본 경찰 사이가가 살았던 원남동 140번지 부근이다. 사이가는 1945년 11월에도 본국으로 귀환하지 않고 조선에 남아 조선민중을 위협하는 행태를 일삼다가 이규창, 김지강, 차리혁 등의 아나키스트 혁명가들에게 처단되었다.
ⓒ 박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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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스트 혁명가들과의 운명적 만남

충북 진천에서 나고 자란 선생은 1945년 해방되던 해에 열여덟의 나이로 상경하여 사회운동가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세상을 바꾸는 삶을 살겠다는 어린 시절의 꿈을 이루기 위한 첫 발걸음이었다.

당시 서울은 아직 철수 못한 일제 잔당들의 패악과 점령군으로 온 미군정의 일관성 없는 통치 그리고 건국의 주체세력이 되고자 하는 좌우익 사상가들의 대립으로 한치 앞을 예측하기 어려운 혼란한 상황이었다.

용산구 청파동 어느 한약국에서 중국어를 공부하며 사회운동의 꿈을 펼칠 기회를 찾던 소년은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신탁통치를 발표하자 본격적으로 운동에 뛰어들게 된다.

"모스크바 3상 회의 신탁통치 결정을 들은 사람은 누구나 속이 부글부글 끓을 수밖에 없었어요. 조선 사람 중에 신탁통치를 그대로 받아들일 이는 없었어요. 나이 어린 내가 봐도 그건 아니었으니까요."

그가 혁명세력을 수소문하여 찾아간 곳은 을지로 4가에 위치한 어느 적산가옥이었다. 이곳에서 그는 독립운동가 출신의 아나키스트 그룹을 만났고, 아나키즘이란 사상은 그에게 평생의 길동무이자 꿈이 되었다.

"그때 제가 만난 분들은 회관 이을규 선생, 우관 이정규 선생, 충남 출신의 신현상, 김명동 선생, 마산의 유창준 선생, 소산 이규창 선생, 지강 김성수 선생 등이었어요. 선생들이 주로 모이는 장소는 을지로 4가 예관동 24번지에 있는 적산가옥 2층이었는데, 거기를 찾아갔어요. 선생들이 시국에 대하여 토론하고 할 일을 이야기하는데, 그 분위기는 서로 양보하고 너그럽게 대해주고 이념이 아닌 인격적으로 배려하고… 참 놀라웠어.

해방 직후에 소위 명사들 주변에는 늘 젊은이들이 우르르 몰려들었거든요. 그러면 젊은이들은 명사들의 이용거리가 되곤 했어. 그런데 그분들은 젊은이들을 이용하려 하지 않더라고. 그래서 내가 배울게 많겠구나 하고 생각했지요."

해방 직후 남한의 아나키스트들은 두 개의 조직을 결성하였는데, 8.15출옥동지회와 자유사회건설자연맹이 그것이었다. 출옥동지회는 일제하에서 무려 18년 5개월 동안 복역한 최장기수 정이형 선생의 주도로 결성되었다. 정이형 선생은 3.1운동 후 만주로 건너가 대한통군부에 참여하고 양기탁, 오동진과 정의부, 고려혁명당을 조직했다. 그는 정의부의 제1중대장으로 항일 무장투쟁을 진두지휘하다가 1927년에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평양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독립운동가다.

이 출옥동지회 출범과 거의 같은 시기인 1945년 9월, 일제 강점기 만주에서 김좌진 장군과 함께 재만한족총연합회를 이끌었던 이을규, 이정규 선생 형제의 주도로 지하에 숨어있던 아나키스트 67명이 모여 자유사회건설자연맹을 결성하였다. 이 단체의 강령은 다음과 같았다.

1. 오등은 독재정치를 배격하고 완전한 자유의 조선을 건설한다.
2. 오등은 집산주의 경제제도를 거부하고 지방 분산주의의 실현을 기한다.
3. 오등은 상호부조에 의한 인류 일가 이상의 구현을 기한다.

자유, 평등, 그리고 상호부조의 신사회 건설 꿈

이들은 임시정부에 대한 절대 지지를 표명한다. 왜냐하면 "3.1운동 이후 조선혁명운동의 옳은 길을 걸어온 정통파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유, 평등, 상호부조의 신사회 건설을 위해서는 경제 자립과 사회 안정의 기반이 되는 농촌 농민을 깨우쳐 스스로의 자치능력을 기르는 일이 급선무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농촌자치연맹과 노동자자치연맹을 각 지역에 조직한다.

만주에서, 상해에서, 일본에서 그리고 국내에서 항일독립운동으로 단련된 아니키스트 혁명가들었지만 해방정국은 일제시대보다 더 큰 시련을 그들에게 주었다. 가까운 거리에서 이들을 도왔던 이문창 선생은 해방정국의 격변하던 정치일정을 마치 어제 일처럼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1946년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이후에 미군정은 좌익을 그냥 놔두면 안 되겠구나 했지. 그래서 정판사 사건으로 박헌영 세력을 두드려 눕히고 민족주의자들도 그냥 둬서는 안 되겠다 해서 김구 세력도 찍어 누르면서 5년간 잘 따라줄 사람들을 골라 힘을 실어줬지. 미군정에게 외면당한 순수 민족주의자들과 아나키스트들은 혁명세력을 키워보고자 의욕을 갖게 되었어. 그 1차 스텝이 3열사 봉장이었어요."

3의사 유해봉장운동은 일본에 있던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의 유해를 발굴하여 국내로 모셔오는 일이었다. 일본 각지에서 무참히 처형되어 혼백조차 찾을 수 없었던 세 분의 유해를 찾는 일은 매우 난항을 겪었으나, 일제의 패망과 함께 일본의 감옥에서 출옥한 아나키스트 혁명가 박열(1923년 히로히토 왕자 암살 기도로 검거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2년간 복역함)의 주도로 우라와 묘지에서 이봉창 의사의 유해를, 이시하야 감옥 묘지에서 백정기 의사의 유해를 수습하였다. 윤봉길 의사의 유해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으나 천신만고 끝에 가나자와에 거주하는 조선인 동포들의 도움으로 겨우 찾아냈다고 한다. 1946년 5월 말, 3의사의 유해는 부산항에 도착했다.

이봉창 의사(왼쪽). 1932년 일왕에게 폭탄을 던졌다. 윤봉길 의사(가운데). 중국 홍커우 공원에서 일본군수뇌부를 폭살했다. 백정기 의사(오른쪽). 중국에서 활동한 항일혁명가. 상해에서 체포된후 옥사했다.
 이봉창 의사(왼쪽). 1932년 일왕에게 폭탄을 던졌다. 윤봉길 의사(가운데). 중국 홍커우 공원에서 일본군수뇌부를 폭살했다. 백정기 의사(오른쪽). 중국에서 활동한 항일혁명가. 상해에서 체포된후 옥사했다.
ⓒ 국민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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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6일 아침 8시 부산을 출발한 3의사의 유골은 의사들이 흘리는 비분의 눈물인 양 때마침 쏟아지는 빗속을 달려 그날 저녁 6시경 서울역에 도착하였다. 특급 '해방자호'의 전망실에 3의사들의 유훈을 깃발로 장식하여 꾸민 영안열차가 대구, 대전, 천안 등 주요 역사를 지나갈 때마다 우산을 쓰고 운집한 민중의 울먹이는 만세 소리와 열차가 굴러가는 소리가 뒤엉켜 장엄한 교향곡을 연상케 했다는 것이 배행했던 선배 동지들의 회고담이다.
-<해방공간의 아나키스트> p191, 이문창, 2008, 이학사

징집거부하며 21일간 단식

독립촉성국민회와 건국준비위원회의 대립 그리고 김구 선생과 임시정부에 대해 배신의 칼을 보인 이승만, 미군정의 연이은 실정과 마침내 활동을 재개한 친일파. 결국 아나키스트 그룹과 순수 민족주의자들은 이승만과 친일파가 장악한 정국에서 뼈아픈 좌절감을 맛볼 수밖에 없었다.

1948년 남한 단독정부가 수립되고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20대 청년 이문창 선생은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런 일을 겪는다. 전쟁 당시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에 머물렀던 선생은 인민군에게 잡혀 고문을 당했고, 수복 후엔 국군에 붙잡혀 강제 징집에 끌려갔다. 그러나 선생은 전쟁도구가 될 수 없다며 징집을 거부해 멀리 제주도의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선생은 그곳 제주도 수용소에서 21일간 목숨을 건 단식을 했다.

1953년 휴전과 함께 다시 서울로 올 수 있었던 선생은 아나키스트 선배들이 세운 국민문화연구소에 투신하여 농촌운동, 수산(授産)운동, 생활협동조합운동에 헌신하게 된다. 당시 농촌으로 들어간 아나키스트들은 문맹률이 높은 농촌에서 글을 모르는 농부들과 아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우리 마을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를 주제로 토론회를 열었다고 한다.

그러나 5·16군사 쿠테타가 일어나자 선생은 또다시 고난을 겪는다. 국민문화연구소는 군사정권의 탄압을 받아 문 닫을 위기에 처했고, 군사정권의 눈을 피해 몰래 이사 다니며 명맥을 유지했다. 동서고금의 아나키스트 혁명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1970년대에도 농촌운동을 이어나갔고, 이들의 활동은 80년대 대학생 농활의 시초가 되었다.

1947년에 창립된 국민문화연구소의 현판. 해방 후부터 현재까지 아나키즘 운동의 산실이 되었다.
▲ 국민문화연구소 1947년에 창립된 국민문화연구소의 현판. 해방 후부터 현재까지 아나키즘 운동의 산실이 되었다.
ⓒ 박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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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인지 선생은 요즘 활기를 띠는 풀뿌리 공동체 운동에도 관심이 많았다.

"아나키즘은 100년 앞을 보고 있는 사상입니다. 풀뿌리 공동체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헌신성입니다. 국가에 대한 충성이 아니라 이웃과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공동체에 대한 헌신이지요. 아나키즘의 조직은 위에서 아래로 뻗어가는 조직이 아니라 자발적 협의에 따라 옆으로 퍼져나가는 광범위한 연대입니다. 조직이론은 매우 어렵지만 근본적인 것은 확실히 수평적인 것이지요."

선생은 또 "최근의 디지털문화가 인간을 주체로 만들어 주지 않지만, 아나키즘 문화를 확산하는데는 이바지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지역 공동체 운동 열심히 하길..."

세월이 흘러 점차 세상을 떠나는 아나키스트 혁명가들이 많아지자, 이문창 선생은 이들의 업적을 기리고자 1945년부터 해방 초기 10년의 아나키스트 운동을 정리하는 작업을 2004년부터 시작했다. 그리하여 지난 2008년 11월에 단행본으로 <해방공간의 아나키스트>(이학사)를 발간했다. 현재 아흔을 바라보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1960~70년대의 아나키스트들이 펼쳤던 농촌운동과 협동조합운동, 수산운동에 대하여 집필하고 있다.

인터뷰를 마칠 때가 되자 이미 해가 넘어간 상태였다. 오랜 시간 기자의 질문에 막힘없이 인터뷰에 응한 선생이 이번엔 기자에게 질문하였다.

"대전에서 왔다니 혹시 한밭레츠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가요?"

기자가 그 단체의 창립 회원이라고 대답하니 매우 반가워하시며 이것저것 물어보신다. 지역 공동체 운동을 열심히 하라는 당부를 마지막으로 선생은 노구를 이끌고 지하철 역사로 총총히 걸음을 옮기셨다.

60여 년 전에 선생과 같은 어르신들이 건국의 주축이 되었다면 대한민국은 지금 어떤 모습일까? 지방자치제가 더 일찍 꽃을 피우고, 작은 공동체들이 더 많이 생기고, 무한경쟁의 자본주의 질주에서 잠깐 멈춰 내 자유가 소중한 만큼 이웃의 자유는 어떠한지 돌아보는 사회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렌다. 그러나 아직 늦지 않았다. 가느다란 맥으로 이어지고 있지만 한때 선배 운동가들이 혼신을 다해 꿈꾸고 일했던 전통은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회관 이을규 선생의 아우로 중국에서 활동하다 해방후 귀국하여 자유사회건설자연맹을 결성을 주도하였다. 임정봉대운동이 무산된 후 정치권을 떠나 성균관대학 부학장을 역임하며 민족교육운동에 이바지하였다.
▲ 아나키스트 우관 이정규 선생 회관 이을규 선생의 아우로 중국에서 활동하다 해방후 귀국하여 자유사회건설자연맹을 결성을 주도하였다. 임정봉대운동이 무산된 후 정치권을 떠나 성균관대학 부학장을 역임하며 민족교육운동에 이바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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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아나키스트, #이문창, #독립운동, #상호부조, #해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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