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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1층 교실에서 6학년 담임을 한 적이 있었다. 고학년은 보통 위층 교실이 배치되는데 우리 반만 1층 교실을 썼다. 우리반 학생 한 명이 4학년 때 창문에서 뛰어내리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 학생이 배정되는 반은 매해 1층 교실을 썼다.

그 학생이 창문에서 뛰어내리려 했던 이유는 아마도 다른 학생들의 괴롭힘 때문이었던 것 같다. 지능이 다소 낮아 수학과 국어를 특수학급에서 공부했던 그 학생은 다른 학생들과 서로가 존중하는 관계로 맺어지지 않았다. 다른 학생들의 놀림을 받았고 특별한 괴롭힘을 당하지 않을 때에도 환영받거나 자신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무시와 외면은 그 사람을 숨 막히게 했으리라. 교사인 나는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6학년 담임을 맡았던 다른 한 해에는 학생사회의 권력층이 매우 분명하게 형성되었다. 학생사회에서 상대적으로 더 권력층인 사람들과 상대적으로 힘없는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나타나지만 그 해에는 좀 더 극명했다. 특별실 수업을 가서는 여러 명의 학생들이 체구가 작은 학생 한 명을 둘러싸고 때리기도 했다. 교사인 나는 훨씬 나중에서야 그 일을 알았다.

어느 해에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고 매일 우는 학생을 만나기도 했다. 그 학생은 감정조절에 곤란을 겪고 있었는데 자신의 감정이 빨리 사그라들지 않는 것에 대해 스스로도 굉장히 힘들어했다. 그게 너무 괴롭다고, 분노가 사라지지 않아 머릿속이 터질 것만 같다는 그 사람과 나는 매일 싸우고 씨름하며 보냈다.

그 사람이 다른 학생들과 거칠게, 혹은 서로 인권침해적인 관계로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것을 보았지만 어디서부터 무엇을 변화시켜야 하는지 그 끈을 찾는 것은 몹시 어려웠다. 화를 자주 내고 감정이 폭발하면 짧은 시간 소위 '필름이 끊기는' 학생을 만난 적도 있었다. 다른 학생을 때려도 어떻게 누구를 때렸는지 기억을 못했다.

마치 일수도장 찍는 것 같은 느낌인 'NEIS 기록'

하교를 하고 있는 한 초등학생의 모습
 하교를 하고 있는 한 초등학생의 모습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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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과 같은 학교 폭력 정국에서 내가 만났던 학생들은 '주의학생'일 것이다. 그래서 학생과 씨름할 때마다 NEIS(나이스)에 접속해 몇 분 동안 어떤 주제로 이야기했는지 입력하고 학생상담카드에 교우관계/성적/가정문제/게임과몰입/학교폭력/자살충동 등으로 분류해서 기록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 기록이 쓰이는 곳은 단 하나다. 어떤 사건이 생겼을 때 나와 학교가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물적 증거. 교육부와 교육청에서는 학생들의 상담과 지도에 필요한 자료라고 하지만 사실 그렇게 되려면 더 다양한 자료들이 포함되어야 한다. 내가 만약 자살충동 상담을 했다고 NEIS에 입력했다면 적어도 몇 가지 조언이나 관련된 기관들의 연락처, 다음 상담에서 쓸 수 있는 몇 가지 전략들이 팝업으로 떠야하는 게 아닌가.

그건 시스템 상으로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정말로 그 기록들을 상담이나 교육적 의도로 사용한다면 그 정도의 노력은 존재해야 한다. 그러나 이미 끝난 상담에 대한 기록을 열어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정말 아무 데도 쓰이지 않는다. 그저 몇 회, 몇 분 동안 상담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는 것 그 자체가 가치의 전부다. 이건 마치 일수도장을 찍는 느낌이다.

답답한 마음에 이곳 저곳 다녀보았다. 하루는 교사, 경찰, 심리학자, 상담가 등등 여러 영역의 전문가들이 모여 학교 폭력 예방과 자살 충동 해결에 대한 포럼을 연다고 해서 찾아갔다. 그런데 청소년들의 자살 충동을 중심으로 상담한다는 심리학과 교수는 학교 폭력에 대해 교사가 '세게!'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일진이 있으면 그 일진보다 교사가 더 세게 나가야 한다고 말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말은 내게 일진보다 더 센 초일진이 되라는 말이지 않는가.

내가 체벌을 하지 않아도, 교실은 무너지지 않았다

2011년. 스승의 날이자 세계병역거부자의 날인 5월 15일에 나는 공개적으로 '양심적 체벌거부 선언'을 했었다. 당시 많은 보호자들이 내게 '때려도 괜찮으니 잘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말하고 동료 교사나 학교의 관리자들이 더 엄하게 학생들을 다루어야 한다고 늘 조언했다. 학생들이 교사를 무서워하지 않아 질서가 무너지고 사고가 나고 공부를 잘 하지 않고 예의가 없어진다 했다.

난 체벌을 강요받는 느낌이었다. 아니 강요받았다. 하지만 난 체벌 후 학생들이 날 바라보는 그 혐오와 거부와 불안의 눈빛을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겁이 많은 건지도 혹은 무책임한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교사로 존재하는 시간 내내 혐오 당하고 거부 당하고 누군가를 항상 위협할 수 있는 '괴물'로 존재하고 싶지 않았다. 괴물이 되고 싶지 않다는 것이 한국 교사가 언감생심 가져서는 안 되는 과분한 욕심인가?

설혹 내가 무책임하더라도, 설혹 내가 겁쟁이더라도, 내게 체벌을, 폭력을 행하지 않을 자유는 있지 않은가. 체벌하지 않으면 학생들이 숙제를 해오지 않고, 체벌하지 않으면 복도에 줄을 서지 않는다면 그건 사실 불가능한 일이다. 나의 죄악으로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만들어야 유능한 교사라면 나는 무능해지겠다. 그렇게 선언했다. 

그로부터 2년. 내가 무능해지고 체벌을 하지 않아도 교실은 무너지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더' 무너지지는 않았다. 교실붕괴는 교사가 어떻게 한다고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좀 더 확실히 체감했다. 무능한 교사인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교실은 폭발하지 않았다. 학생들이 모두 다 멍청이가 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나와 만나는 학생들이 교사인 나와 학교를 좀 더 좋아하게 되지는 않았다. 교실붕괴는, 그리고 학생들이 가지는 학교에 대한 거부감은 교사가 행하는 폭력만으로 형성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지금의 학교, 지금의 교육이 가지는 기만과 위선이 더 본질적인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실제로는 순응하고 침묵하는 사람으로 조형하면서 겉으로는 '학생을 위한다'고 말하는 위선 말이다.

왜 교사는 학생을 폭력으로 누르고 관리해야 하나

한 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이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한 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이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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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에서 보낸다. 부모들은 이를 가리켜 '아이를 사회화시킨다'라고 말한다. 배울 게 하나 없다고 해도 학교는 아이들에게 좋다는 것이다. 적어도 아이가 친구들과 놀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교에서는 진정한 동료애를 쌓을 수 없고 자신의 표현을 마음대로 할 수도 없다. 오히려 학교는 사회 통제의 왕국이라 할 수 있다.

학교는 아이들을 길들이고 고화시키는 곳이다. 학교는 너무 똑똑하지도, 너무 멍청하지도 않으며 사회 모델에 순응하는 일반적인 프랑스인들을 만들어내는 곳이다. '틀'에 잘 맞는 사람들, 정해진 해에 읽는 법을 배우는 사람들, 군소리하지 않고 바보 같은 연습 문제를 푸는 사람들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학교는 규범을 대단히 중시한다. 학교는 기술적 능력이나 특별한 지식을 요하지 않는 평범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들어내고자 사람들을 포맷하는 역할을 한다. 산업사회는 따분한 일을 군말 없이 하고 여가를 통해서나 겨우 만족하는 멍청한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 학교는 이런 멍청이들을 양성하는 훌륭한 등용문이다. - 코린느 마이어. 이주영 역(2008). <아이를 낳지 말아야 하는 40가지 이유, NO KID> 중

내게 조련사가 되길 강요하던 이 사회는 이제, 교사인 내가 강력한 통제자가 되길 바라고 있다. 사람이 자신과 관련되어 벌어지는 일에 대해 사람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다. 그 일에 동의하거나 부정적인 반응을 보일 수 없거나. 즉 지지를 얻거나 힘으로 누르거나. 학교 폭력에 대해 답답한 마음을 나누고 싶어 간 토론회에서 심리학과 교수가 말한 일진에게 더 세게 나가기는 명백히 후자로 학생들의 부정적 반응을 줄이라 말하는 것이다.

그 교수 뿐 아니라 교육청, 교육부, 보호자, 교사 등 많은 사람들이 교사인 내게 학생들의 폭력을 누르고 '관리'하라고 명령한다. 철저하게 힘과 권력으로 이루어지는 관리. 한 학생이 '사고'를 치면 나는 즉각적으로 그 학생을 '잡아야' 하고 보복하고 응징해야 한다. 그리고 잘 응징했다고 보고해야 한다. '까불어서 밟았어요'라고 말하는 조폭이나 학교 폭력 가해자들과 무엇이 다른가. 다른 점은 국가적으로 조직되어 더 체계적이고 더 권위를 갖춘 폭력이라는 것뿐이다.

폭력의 이유나 근거가 중요하진 않다. 설혹 도벽이 있는 학생이 교사의 엄한 목소리에 쫄아서 다시는 다른 사람의 물건에 손을 대지 않게 되었다 하더라도 교사의 위협이 정당하진 않다. 그 학생에게 새겨진 공포와 폭력의 상처가 정당하지 않는 첫 번째 근거이고 자기보다 더 힘없는 존재에게 엄포를 놓고 위협하는 폭력적 행위를 행한 교사에게 새겨진 폭력의 습이 두 번째 근거 그리고 민주적 의사소통이 아니라 '힘'으로 변화되는 폭력적인 학교의 모습이 폭력의 이유가 가지는 정당성이 얼마나 허구인지를 알려준다. 

나는 학생을 관리하고, 교장 교감 업무부장은 나를 관리하고, 교육청은 학교를 관리하고, 교육부는 교육청을 관리하고, 대통령은 교육부를 관리한다. 이 대규모의 폭력조직은 끊임없이 힘으로 학생을 관리하라고 명령한다. 학교라는 조직을 버티지 못하는 이가 조직을 이탈하지 않도록 관리하고 사고를 치지 못하도록 관리한다. 내 학급, 내 교실은 내가 관리해야하는 곳인지도 모르겠다. 그 속에서 학생들은 학교라는 조직에서 벗어나기 위해 손가락 하나가 아니라 목숨을 걸어야 한다.

교사로 밥벌이를 하는 시간 동안 교사-학생 사이로 만난 학생이 천 명 가량이다. 그 중에 반 이상이 학생간 폭력으로 절박하게 고민하고 있었고 매해 한두 명은 전쟁 같은 혹은 언제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일상을 살았다. 나는 예전에도 올해도 그 학생들에게 무력하기 짝이 없는 쓸모없는 선생이다. 그 자괴감이 나를 좀먹는다 하더라도, 매일이 실패감으로 가득차 괴로워하더라도 내가 그들의 위기를 좀 더 가볍게 해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그리고 가끔은 그들을 코너에 몰아넣는데 내가 기여하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미안하고 그래서 부끄럽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내게는 폭력을 행하지 않을 자유가 있다. 조폭에 가담하지 않을 자유가 있다. 내가 무능하고 문제 해결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사람이라도 나는 조폭이 되는 것을 거부할 권리를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스승의날이자 세계병역거부자의 날인 5월 15일을 빌어 선언한다.

스승의날이자 병역거부날에 다시 한 번 선언한다

1. 학생에게 행해지는 모든 체벌을 거부한다.
- 이것은 내가 느끼는 충동과 욕구에 대한 거부이기도 하다. 직접 체벌이나 신체에 고통을 주는 간접 체벌을 하지 않겠다는 선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에게 일시에 동일한 행동을 하도록 하는 행위, 예를 들어 열중쉬어나 손머리 등을 하지 않는 것 그리고 수업준비 혹은 주변청소 등을 꼬투리 잡아 학생을 위축시키는 형태의 심리전에 대한 모든 시도를 포기하고자 한다. 학생을 관리하기 위한 학습 훈련 혹은 기초생활습관 형성이라는 이름의, 상대의 주체적 선택에 관한 고려는 전무한 각종 전략들에 대해 거부한다.

2. 각종 형태로 이루어지는 학생 사찰을 거부한다.
- 책임소지를 가리기 위해 전방위적으로 이루어지는 정보수집과 기록에 동참하지 않겠다. 학생의 성취수준과 현재의 특성들에 대한 평가 및 조언을 기록하는 것은 교사로서의 직무이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서는 대인관계, 가족관계, 사적인 발언과 행동들에 대한 기록은 인권침해이며 과도한 정보의 집적이다. 나는 학생상담카드를 거부한다.

3. 학교 폭력 예방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국가적인 폭력 조직에 포함되는 것을 거부한다.
- 더 센 힘으로, 더 큰 억압과 통제로 학생들을 관리하는 폭력 조직에 난 포함되고 싶지 않다. 그리고 그것이 절대 학교 폭력을 해결할 수 없음을 난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4. 물질적 선물을 거부한다.
- 5월이 되면 온갖 쇼핑몰에서 스승의날 선물을 준비하라고 광고메일을 보낸다. 아무리 3월 신학기부터 유난을 떨어도 한두 명의 보호자들은 선물을 가지고 찾아온다. 사례는 물론, 그 모든 물질적 선물을 거부한다. 물질적 선물을 거부한다는 것은 그렇게 선물로 예의를 차려야 하는 교사와 보호자간의 관계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사탕, 선물, 스티커 등 교사가 학생들에게 제공하는 물질적 선물에 대한 거부를 포함하는 것이다. 그 역시 높은 자가 낮은 자의 복종에 시혜를 베풀어 상대를 길들이기 위한 물질적 수단들을 나의 선택지에서 배제시키는 것이다.

 2013년 5월 15일
스승의날이자 세계병역거부자의날에.

덧붙이는 글 | 2011년 5월 15일에 오마이뉴스에서 한 양심적체벌거부선언의 후속입니다.



태그:#스승의날, #학교폭력, #교사, #체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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