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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가방 뭐야?"

슬쩍 모른 체 하고 넘어가도 되는데 기어코 캐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에게도 감추고 싶은 비밀 하나쯤은 있는데 말이죠. 누가 그렇게 물어 대냐고요? 남의 일 참견하는 직업을 가진 이들이죠. 바로 기자들.^^

제겐 아홉 살 큰딸과 여섯 살 작은 딸이 있습니다. 이젠 제법 컸지만 그 아이들이 젖먹이이던 시절, 저는 그놈의 가방 얘기를 지청구처럼 늘 듣고 다녀야 했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튀는 차림임엔 틀림없었으니까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보통 가방이 한둘이지 네 개씩 들고 다니는 경우는 없으니까요.

아니, 웬 가방을 네 개씩 들고 다녔냐고요?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여기자의 육아분투기가 여기 있습니다. 살다보니 이런 날이 오는구나 싶게 애들이 어느덧 기저귀도 떼고 젖도 뗐지만 그 시절엔 정말 어려웠답니다.

모유수유를 하던 내내 제 가방은 모두 4개였습니다. 노트북가방, 지갑이나 소품을 넣는 개인용 사물가방, 유축기 가방 그리고 아이스박스였지요. 아니 웬 아이스박스까지 갖고 다녀? 하시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어요.

애만 봐준다면 어디든 이사를 다녔던 저는 당시 회사와 집이 멀어 늘 아이스박스에 하루 종일 짠 모유를 넣어 모유팩 숫자를 세며 퇴근하는 게 일이었습니다. 당시엔 스마트폰도 없어서 지하철에서는 네 개의 가방을 무릎 위에 얹고 책을 읽거나 아이스박스 지퍼를 열고 모유팩을 세며 "오늘도 선방했다" 속으로 외치곤 했지요.

직업의 특성상 하루 종일 아이들과 떨어져 지내야 하는 저는 가급적 아이들과 저를 잇는 끈을 놓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모유수유만큼은 꼭 한다, 가급적 길게!'가 제 지론이 있었지요. 오전 9시에 출근했다가 저녁 6시까지 모두 한 자리에 앉아 일을 하는 경우라면 그래도 모유수유가 수월한 편인데, 저처럼 하루 종일 사방팔방 콩 튀듯 뛰어다녀야 하는 사람에게 모유수유란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수유패드 사이로 젖이 흘러 블라우스에 동그랗고 선명한 우유자국이 생기면 얼른 화장실로 뛰어가야 했고, 젖이 불어도 기사마감에 쫓겨 젖을 짜내지 못해 띵띵 불었던 적도 한두 번이 아니지요.

지금껏 기자생활 하면서 어느 순간 가장 힘들었냐고 묻는다면 바로 애들을 키우면서 기자생활을 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라고 답할 것 같습니다. 전국의 모든 워킹맘들은 대개 저와 사정이 비슷하겠지만 정말로 육아와 살림, 업무를 한꺼번에 해낸다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 같습니다.

언젠가 손봉숙 전 민주당 의원이 여성과 남성의 차이를 '멀티플레이'로 비교 설명한 적이 있었습니다. 여자들은 매순간 멀티플레이가 가능한데, 남자들은 그게 안 된다는 거예요. 여자들은 집에서 애 업고 후라이팬 뒤집고 동시에 전화받고 한쪽 발로는 쓰레기통의 페달을 밟아 쓰레기를 버릴 수 있는게 일상인데, 남자들은 그게 안 된다는 거지요. 이쯤되면 여자들이 유전적으로 더 우월한 존재 아니겠습니까? ㅋㅋ 그런데도 사회적으로는 푸대접을 받고 있으니 여성들이 일어나야 한다 뭐 이런 식의 결론이었습니다. 그때는 그냥 웃으면서 들었는데 지금 가만 보니 그게 딱 제 퇴근 후의 일상이더라고요.

어느새 저도 결혼 10년차 주부가 됐지만 여전히 육아와 살림은 난제 중 난제이지요. 잠 못 자고 새벽에 일어나 젖을 물릴 때는 그때가 제일 힘든 것 같지만, 막상 어린이집 보내려고 밤새 줄을 서보니 젖 물릴 때가 가장 쉬웠고, 학교에 입학시켜놓고 보니 차라리 어린이집 보낼 때가 마음이 편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이 키우는 일은 갈수록 태산이네요.

우리 사회는 일하는 엄마가 맘 편히 아이를 맡기고 살 수 없는 환경입니다. 저도 제 아이에게 그나마 괜찮은 어린이집을 찾아주려고 무려 50군데 이상의 어린이집에 전화를 걸어보았고 발품 팔아 찾아가보기도 했습니다.

아침에 눈 떠 하루 종일 엄마와 떨어져 지내야 하는 아이들에게 어린이집은 그야말로 믿고 맡길 수 있는 곳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한데, 시설이 좋으면 돈이 비쌌고, 돈이 맞으면 시설이 엉망이었습니다. 그래서 찾게 되는 곳이 국공립 보육시설인데요. 돌아온 답변은 이랬습니다.

"이 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쯤 돼야 자리가 날 것 같은데 대기하시겠어요?"

정말 황당하기 짝이 없는 답변들을 들을 때마다 눈물을 훔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시설 좋고 믿을 만한 곳은 전부 대기번호가 심지어 1000번을 넘기는 곳도 있었습니다. 한눈에 보기에도 시설이 엉망인 어린이집조차 우리 원에 올 아이들은 많으니 당신 자녀 따위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태도로 나올 때는 정말 국가와 사회가 원망스럽더군요.

도대체 국공립 보육시설 확대는 왜 그렇게 어려운 것일까요?

정치권 관계자들은 하나같이 민간보육시설의 문제를 듭니다. 로비집단화 돼 있는 민간보육시설장들이 공공보육시설의 확대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이들은 대개 선거조직과도 연계돼 있어 정치인들이 눈치 보지 않을 수 없다는 말들을 종종 합니다. 어린아이들과 엄마들에게는 생사여탈권이 걸린 문제지만 정치인들에게는 그저 표일 뿐일까요?

지난 대선 당시 박근혜 대통령은 공공보육시설 확충을 약속한 바 있습니다. 김현숙 인수위원도 "공공보육을 늘려 보육의 공공성을 강화한다는 게 새 정부의 국정운영 방향"이라며 여성공약으로 국공립어린이집과 공공형 어린이집 확충을 약속하기도 했습니다.

매년 국공립 어린이집 50개소는 새로 짓고 기존운영시설 100곳은 국공립으로 전환한다는 내용인데요. 김 위원은 당시 "공공형과 국공립어린이집은 부모가 질의 차이를 못 느낄 정도가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최근 국공립 보육시설이 늘어났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국공립 보육시설에 들어가려면 대기를 걸어야 하고 한해에 겨우 한두 명 정도의 티오가 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국공립 보육시설에 들어가려는 아이들은 차고 넘치는데 정작 국공립 보육시설은 '좁은 문'인 현실입니다.

프랑스는 유아학교가 모두 공립이라네요. 영유아가 다니는 집단보육시설의 64%는 지방정부, 29%는 부모협동 등 단체가 운영하고 있고, 주로 미취업모가 이용하도록 하는 일시보육시설의 경우 49%는 지방정부, 45%는 단체, 7%는 부모협동단체가 운영한다고 합니다.

핀란드는 기관이용 아동 대다수가 공공기관을 이용하고 있으며 사립기관 이용 아동은 5% 미만에 불과합니다. 보육료 상한선을 책정해서 운영하고 있고 공립보육시설 이용료는 저소득층은 면제, 이외는 가족 규모와 소득수준에 따라 차등적으로 지급된다고 하고요.

국내에 소개된 몇 나라의 경우를 살펴보면 대개 어린이집, 유아학교 등은 의당 공공, 비영리시설 중심으로 보육이 이뤄지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많은 국가에서 시설보조금으로 보육료의 80% 이상을 부담하고 있지요.

그런데 우리는…. 박근혜 대통령이 대선 공약으로 국민행복시대를 열겠다고 했지요. 어떠십니까? 좀 기다려보자 싶으신가요? 아님 싹수가 노랗다 싶으신가요? 정치부 기자인 저는 지근거리에서 박근혜 정부의 '와치독' 역을 맡고 있는데요. 여러분을 대신해,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겠습니다. 그리고 생생하게 전하겠습니다.

그나저나, 지금 이 글을 쓰는 이 순간, 밤 10시 59분. 여섯 살 꼬맹이는 제게 묻습니다.

"엄마, 도대체 몇 시까지 일할 거야? 이제 좀 자자."

<약속해, 뿡뿡!> <우리 가족이야> <해치와 괴물 사형제> 세 권을 들고 와서 엄마 일 다 끝날 때까지 기다릴 거라고 채근댑니다. 미안한 마음이 또 밀려오네요.

다음에 쓸 때는 꼭 낮에 써야겠습니다.^^


태그:#육아, #국공립 보육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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