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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들이 사는 마을이면 어김없이 있는 점 보는 집. 교회수 만큼이나 많은 것 같습니다.
 서민들이 사는 마을이면 어김없이 있는 점 보는 집. 교회수 만큼이나 많은 것 같습니다.
ⓒ 변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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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생이면 오십 살이던가요? 반평생 살았어도 여전히 제자리인 듯한 제 삶에서 지나간 세월을 떠올려 봅니다.

저는 강원도 평창면 대상리 산골에 사는 극빈자 부모의 맏아들로 태어났지요. 어머니께 들은 이야기로 그곳에서 태어난 지 두어 해 만에 먹고살기 위하여 단양으로, 제천으로, 울산으로 이사를 했었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폭력만 일삼고, 생활에 보탬을 주지 않아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둘째를 등에 업고 철로에 누워 죽으려고까지 했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얼마나 처절하게 살았었는지 저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가 없답니다.

자나 깨나 신세 타령한 어머니가 찾아갔던 점집

어려서부터 지켜본 어머니는 자나 깨나 신세 타령을 하셨습니다. 두 분이 다 문맹이셨으니 능력없는 건 그렇다손 치더라도 마음만이라도 편하게 살기를 바라신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평생을 시달리며 살았습니다. 아버지는 눈썰미도 없고, 일머리도 없어서 남의 집에 머슴을 살기도 했었으나 쫓겨나 버리기 일수였다고 합니다. '

그런데다가 술에 취하면 영 딴 사람으로 돌변하였습니다. 밤새워 큰 소리로 떠들고, 어머니만 보면 '못 잡아 먹어 환장한 사람'처럼 폭언과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또, 부잣집에서 하루 일 해주고 일당이라도 받으면 고스란히 놀음판에 날렸다고 합니다. 술, 놀음을 너무도 좋아한 아버지는 자기 뱃속만 편하면 그만인 이였습니다.

어머니는 찢어지게 가난함 속에서도 "자식들만큼 잘 키우자"며 아버지의 술주정도 참아내며 살았지요. 우리가 조금씩 커 가자 어머니는 우리를 데리고 점집에 다녔습니다. 절에다가 우리 이름을 올려놓고 자식들이 잘 되기를 늘 기도했습니다. 어머니 손에 이끌려 따라간 곳은 주변에서 풍월로 찾아간 점집입니다. 어머니가 아는 분들도 다 고만고만하게 살기에 "어디 가니까 잘 맞추더라, 어디 가니까 뭐라 카더라"는 말만 들리면 찾아가곤 했었습니다.

어느 곳엔 엽전으로 점을 보았고, 어느 곳엔 쌀로, 또 어느 곳엔 물로 점을 보았습니다. 어렸을 때라 모든 게 신기하게 여겨졌지만, 그중에 물그릇으로 하는 점이 참 신기했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울산, 용인, 서울 등지로 이사를 다니는 곳마다 점집을 다니며 경험해 보기도 했었습니다.

먼저 울산에서 어렸을 때 찾아가 보았던 점집에 대한 경험입니다. 현실이 안 풀리고 답답해 찾아간 점 집. 처음엔 점만 보러 들어갔었습니다. 어려운 현실에 관해 이야기를 하자, 점잖게 생긴 중년 여자가 굿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아마도 무당이었나 봅니다. 어머니는 무당이 달라는 액수의 돈을 준비해서 다시 찾아갔습니다.

길일을 잡아야 한다며 다른 날을 다시 잡았습니다. 무당이 잡은 날짜에 다시 찾아가니, 트럭을 타고 산 속으로 갔습니다. 그곳은 아예 굿 당을 차려놓고 영업하는 곳이었습니다. 굿을 마치니, 무당은 "뒤를 돌아보지 말고 가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무당의 말을 듣고 그렇게 했습니다.

무당은 집에 가서 할 일을 알려 주었습니다. 부적을 하나 주면서 입고 있던 속옷과 함께 가까운 산에 묻으라고 했습니다. 어머니는 그렇게 했습니다. 굿을 하고 시키는 대로 하면 좋아진다더니만, 아직 아무것도 좋아진 게 없습니다.

부산에 살 때는 어느 나이 든 남자가 하는 철학관에 찾아갔습니다. 꼬이는 인생에 대해 잘 풀리는 비결을 알고 싶었습니다. 상담을 마치고 나오니 마음이 더 답답했습니다. 돈만 날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나무 들고 서 있는데 대처승이 한 귓속말 "몸 흔들어" 

용인에 살 때였습니다. 제가 사는 동네 근처에 대처승려가 살았습니다. 남자는 승려였고, 그분의 아내는 무당이었습니다. 동네가 궁금해 돌아다니다 발견하고는 호기심이 생겨서 들어갔었습니다. 사는 게 힘들고 미래가 불안하고 두렵다고 하니 대처승은 푸닥거리(무당이 하는 굿의 하나)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승려가 말한 푸닥거리를 하려면 돈이 필요했습니다. 상차림이 푸짐할수록 좋다는 것입니다. 돈이 없다고 하니 최소한으로 상차림을 하더라도 백여만 원 안팎이 든다고 합니다.

푸닥거리는 무당이 주도하고 대처승은 거들었습니다. 대처승은 무당이 주문을 외울 때 저 보고 대나무를 하나 들고 서 있으라고 했습니다. 북과 징을 두드리며 신 나게 주문을 노래처럼 외우고 있었습니다. 가만히 서 있으니, 대처승이 옆으로 와서 귓속말로 "몸을 흔들어"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시키는 대로 몸을 흔들었습니다. 아내랑 같이 살풀이하면 더 좋다고 해서 아내도 참석했고, 아내는 저를 보고 서 있었습니다. 대처승은 아내 곁으로 가더니 뭐라 말했습니다. 나중에 아내에게 대처승이 뭐라더냐고 물어보니, "(남편이) 신들렸다 하더라"고 말했습니다.

90년대 말에 약 백만 원 정도 돈을 써서 푸닥거리했습니다. 우리 형편에는 거금을 쓴 것입니다. 뭔가 안 풀리는 흐름이 물러가고 하는 일마다 잘 풀릴까 싶은 마음에서 한 것이지요. 그 후 용인에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서울로 올라와 살게 되었습니다. 서울에서도 저는 잘 풀리지 않았습니다. 용역 경비업체에 파견노동자로 직장을 얻었습니다. 은행 청원경찰로 일했습니다. 한 달 70만 원짜리 일터였습니다.

모 방송에서 나온 계룡산에 사는 도사 정도령이 사주팔자와 신수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잘생긴 남자 점쟁이였습니다. 방송에 나올 정도면 참 유능한가 보다 생각하고 그 사람을 수소문해서 찾아 갔었습니다. 점이라기보다는 철학관 같았습니다. 인기가 좋은지 미리 예약해야 했고, 많이 기다려야 했습니다. 오래되어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높은 빌딩에 사무실을 차려놓고 영업했던 것 같습니다.

복비로 기본 5만 원을 주었습니다. 사는 게 답답해서 왔다고 하니 생년월일에 대해 태어난 시각에 대해 물었습니다. 속 시원한 답은 듣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여전히 저는 답답한 삶을 살고 있으니까요.

사십대 이후부터 저는 그런 곳에 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요. 어느 날 그런 생각이 번개처럼 뇌리에 스쳤습니다. "5만 원 내고 점이나 사주팔자를 보게 되고 그것을 믿게 되면 내 인생은 5만 원짜리 인생 밖에 안 될 것이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현재 제 나이는 오십대 초반입니다. 오십대에 접어드니 조금은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것 같더군요. 사람은 실력이 있어야 하고 능력이 있어야 잘 살 수 있습니다. 거기다 판단을 잘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부자 동네일수록 점집이 없었고, 가난한 동네일수록 점집이 많았습니다.

무당이나 철학관, 점집을 하는 사람들도 모두 고만고만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그리 멋지게 사는 방편을 잘 안다면 그들은 왜 그렇게 살고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이젠 돈과 시간을 낭비해가며 그들에게 답을 얻으려 하지 않으리라 다짐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가난한 동네일수록 점집이 많고, 무당들도 고만고만하게 살아

인생이 답답하고 잘 풀리지 않은 사람들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그곳을 찾아다닙니다. 복비가 보통 1만 원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점집이 많은 곳을 지나다가 불쑥 찾아가 물었더니, 그 남자 도사도 당황하며 말했습니다.

"제가 찾아온 이유는요. 로또 번호 좀 알고 싶어서요."
"저도 그거 알고 싶어요. 그거 알면 여기서 이러고 살겠습니까?"

저는 그때 얻은 결론이 있었습니다. 인생길은 누구나 답을 모른다는 것이고 답을 모르니까 살 만하다는 것. 그것이었습니다. 행운의 로또라지만, 이 세상에 행운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로또에 당첨된 것은 그 주에 당첨된 번호를 당첨된 사람이 가지고 있었다는 것일 뿐. 그러니까 그것은 행운이 아니라 확률 게임에 적중했다는 것이지요.

행운이나 기적이 있을까요? 만약에 그 행운이나 기적이 있다면 신에게 또는 부처에게 기도만 열심히 하면 다 이루어질 겁니다. 노력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해마다 수능 기간이 가까워지면 전국 유명 산이나 기도처, 기도원에는 사람들이 넘쳐납니다. 자식들이 수능을 잘 보게 해달라고, 대학에 붙게 해 달라고 빌러 다닙니다. 사실 수능시험이 '기도빨'에 달린 게 아니지 않나요?

살다 보니 운명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권모술수, 사기, 거짓말 등 이런 걸 잘하면 되는 곳도 있습니다. 저는 그런 요행의 집합소를 정치권에서 찾았습니다. 민심은 천심이라는 속담이 있더군요. 조선 반도에, 이 대한민국에서 하늘의 마음에 한 점 부끄럼 없이 민주주의를 위해 왕이 될 만한 사람이, 왕이 된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었을까요?

사람도 자연의 일부이니까 자연의 법칙에 의해 흘러간다고 여깁니다. 자연 속 생명체는 모두 자신의 생존을 위해 부지런히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자연의 법칙에는 행운도 기적도 없었습니다. 생존엔 선택할 수 없는 그 무엇과 선택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있었습니다.

조건과 환경에 의해 생존의 법칙도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조건과 환경이 잘 맞아 떨어졌을 때 우리는 잘 풀리는 인생을 살고 그것이 잘 안 맞았을 때 잘 풀리지 않는 인생길을 걸었습니다. 거기엔 자신의 선택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선택을 잘해야 할 듯합니다. 기능과 실력도 중요한 삶의 도구입니다. 하지만 선택도 인생길에서 꼭 필요한 것이라고 봅니다. 하루하루 선택을 잘하며 살아야겠습니다. 온갖 비리와 부정선거로 왕이 된 그런 나쁜 사람들이 한 선택 말고요. 착하고 올바른 선택으로 말입니다. 남은 인생 후회를 덜 하도록.

덧붙이는 글 | '관상' 응모글



태그:#울산 관상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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