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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추 다섯 포기 샀어! 아주 실해"

작년 이맘 때쯤 동네 사는 일본 친구 유키코에게서 밤에 전화가 왔다. 근처 슈퍼에 주문해 놓은 배추가 도착해서 구입했다고 신나했다.

전부터 유키코를 포함한 세비야에 사는 일본 친구들이 김치를 먹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다.

"기무치 맛있어! 언제 만드는 거 가르쳐 줘."

나도 집을 이사하고 나서, 새 숙소에 같이 사는 친구가 김치 냄새를 싫어하는 바람에 김치를 못 담가 먹어 아쉽던 참이라 겸사겸사 같이 김치를 담아서 먹으면 좋겠구나하고 배추가 구해지면 같이 날 잡아 김치를 담구자고 약속을 해두었던 참이었다.

"그래? 그럼 내가 지금 갈게."

밤 늦게 유키코 집에 들러 다섯 포기의 배추를 자르고 굵은 소금에 저렸다. 자취하는 학생들이 큰 다라이가 있을 리 없고, 큰 냄비, 세수대야까지 동원하여 배추를 나누어 담아두고는 다른 친구들에게 문자를 넣었다.

"내일 오전 11시 칼, 도마, 김치 넣어갈 통 (냄새가 날테니 잘 밀봉할 수 있는 것으로)들고 유키코 집에 모이기."

메시지 보내기가 무섭게 "와우!" "너무 좋아!" 연달아 답장이 왔다. 그렇게 세비야의 김장 날은 시작되었다.

김치 초짜가 어쩌다가...

한국에서 김치를 담궈본 적은 없다. 회사 그만두고 외국 살이를 준비하며 한번 시험삼아 담궈봐야지 했던 계획도 당장 필요하지 않으니 자꾸만 뒤로 미루다가 결국 한번을 못 담궈 보고 한국을 떠났다. 한동안 잘 버텼으나 워낙 입맛이 한국 입맛인 지라 김치 없이 사는 일이 영 쉽지가 않았다. 중국 슈퍼에서 고춧가루를 사고, 인터넷을 뒤져 오이 무침부터 시작하여, 김치를 담그기까지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주변에 맛있는 김치가 없고, 내가 담그는 김치가 먹을 수 있는 유일한 김치이다보니 맛은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좀 넉넉히 담글 때는 한 병 정도는 잘 묵혀두었다가 연례행사라도 하듯 돼지고기를 사서 김치찌개를 끓여먹는 날이면 기념일이 따로 없었다.

그렇게 간간히 담가먹던 김치 담그는 실력으로 이제 다른 나라 친구들과 김장까지 하게 될 날이 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세비야 김장 날

다음 날 아침 일찍 절여 놓은 배추를 씻으러 다른 친구들이 오는 시간보다 일찍 유키코 집에 갔다. 그 전날 물 뺄 그릇과 도구가 없어 어떻게 할까 고민하며 헤어졌는데 집에 도착하니 유키코가 뿌듯한 표정으로 나를 반겼다.

"내가 정말 좋은 방법을 알아 냈어"

유키코가 안내한 김장을 할 거실에는 빨래대가 떡하니 펼쳐져있고 빨래대 밑에는 물을 받을 수건들이 깔려있다.

"와..천잰데..하하하"

배추를 잘 씻어 하나하나 빨래대에 걸고 있으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배추 물이 빠지는 동안, 다른 친구들이 오는 동안 근처 커피집에서 커피 한잔을 하고 있으니 왠지 노동전의 여유로움이 느껴져 기분이 좋았다.

시간이 되자 친구들이 도마와 칼을 들고 모였다. 마늘을 까고, 생강을 다듬고, 열심히 다지기를 했다. 중국 슈퍼에서 산 고춧가루는 입자가 너무 굵어 믹서기로 한번 갈아줘야했다. 온 거실이 마늘냄새, 고춧가루 냄새로 가득했다. 유키코과 같이 사는 친구들이 오면 무슨 일 난 줄 알겠다며 걱정은 되면서도 마냥 신이 났다.

밀가루 풀을 쓰고, 고춧가루, 마늘, 생강, 설탕을 섞어 그야말로 초 간단 김치 양념을 완성하고, 빨랫대에 걸려있는 배추를 먹기 좋게 썰고, 양념 뭍이기 돌입했다. 전날 슈퍼에서 채소담는 용으로 비치해둔 비닐 장갑을 몇 개 들고 와 유용하게 사용했다.

마침 한국에서 친구가 다녀가며 주고 간 무말랭이가 있어 함께 뭍였더니 배추 다섯포기와 함께 제법 많은 양이 되었다.

각자 준비해 온 지퍼팩과 유리병에 각자의 몫을 담고 남은 김치를 반찬 삼아, 마침 유키코 집에 있는 떡국 떡으로 간단하게 떡국을 끓여 김치와 함께 점심 한끼를 했다. 김장날 족발은 아니지만 족발 못지않은 김장후식이었다.

"와. 너무 맛있어! 다음에 또 해먹자"

다행히 친구들은 몇 달간 김치를 맛나게 먹었다고 한다. 나도 그 김장덕에 비닐 세 겹으로 꽁꽁 싸서 냉장고에 넣어두고 같이 사는 친구없을 때 살짝 꺼내 한 동안 맛있는 김치를 먹을 수 있었다.

얼마 전 시장에 가니 겨울이라 실한 배추들이 시장에 나와 있어 그날의 김장날이 떠올라 웃음이 났다. 요즘도 종종 김장하자! 말은 하는 데 영 시간이 나지 않아 못하고 있다. 겨울이라 입맛도 없고, 뜨끈하고 매콤한 김치찌개가 그리워지는 배추 철 가기 전에 하루 빨리 날을 잡아보아야 할 텐데 말이다.

제 2의 세비야 김장날을 기대해 본다.
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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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장기사 응모



태그:#세비야 김장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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