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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교양 배워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나는 지난 가을 학기 '법과 인권'이라는 학부 교양 과목을 담당했다. 로스쿨이 만들어진 다음 학부 수업을 못했는데, 1년간 연구년을 유럽에서 보낸 다음 귀국하자 어떻게 해서라도 교양 과목 하나를 맡고 싶었다. 실용적인 면에서는 조금 거리가 있을지라도 무엇이 진짜 '앎'인지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나는 '법과 인권'을 가급적 인문교양적 관점에서 강의하려고 노력했다.

인권교육은 감수성과 지식 두 가지를 함께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이 중에서 역시 가르치기 어려운 것은 감수성 교육이다. 대체로 인권교육 시간에 학생들이 선생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꾸벅꾸벅 존다면 그것은 감수성을 자극하는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권 감수성을 자극하는 교육은 어떻게 해야 할까. 경험으로 터득한 것이지만, 인문적 방법으로 인권을 접근할 때 학생들의 인권 감각은 살아난다. 인권을 인간의 본성과 인간의 역사 속에서 실감나게 그릴 때 법조문의 숲에서 무료함으로 허우적대는 학생들에게 앎의 새로운 지평이 열린다.

'법과 인권' 강의에는 20개가 넘는 학과 소속 학생들이 참여했다. 이중 법대생들은 전체 수강생들의 10분의 1도 안 되는 숫자다. 그러니 나로서는 이 과목을 더욱 인문적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꼈다.

특히 내 강의에는 공대생들이 많았다. 이들 몇 명으로부터 내 강의에 참여한 이유를 들어 보았다. 말인즉 자신들에게 부족한 인문적 사고를 내 강의를 통해 채우고 싶다는 것이었다. 내 책임감이 커졌다.

종강을 앞둔 어느 날 나는 공대생들을 의식하고 이런 말을 했다.

도로 위로 차들이 질주한다. 저 차들을 개발하고 만든 이는 과학자요, 기술자다. 그러나 저 차들이 저 도로 위를 질주할 수 있도록 한 이들은 이 나라의 정치가나 행정관료들이다. 만일 그들이 자동차의 유용성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다면 저 길이 만들어졌을까?  혹시 이런 생각을 해보진 안 했는가. 만일 자동차 회사가 차를 팔기 위해 저 도로까지 만들어야 했다면 저 차들의 가격이 얼마나 되었을까, 모르긴 몰라도 지금보다 10배는 더 비싸야 했을 것이다. 그렇게 비싼 차라면 자동차는 팔리지 않았을 것이고 지금의 자동차 문화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 올림픽대로 도로 위로 차들이 질주한다. 저 차들을 개발하고 만든 이는 과학자요, 기술자다. 그러나 저 차들이 저 도로 위를 질주할 수 있도록 한 이들은 이 나라의 정치가나 행정관료들이다. 만일 그들이 자동차의 유용성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다면 저 길이 만들어졌을까? 혹시 이런 생각을 해보진 안 했는가. 만일 자동차 회사가 차를 팔기 위해 저 도로까지 만들어야 했다면 저 차들의 가격이 얼마나 되었을까, 모르긴 몰라도 지금보다 10배는 더 비싸야 했을 것이다. 그렇게 비싼 차라면 자동차는 팔리지 않았을 것이고 지금의 자동차 문화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 유창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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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대생들은 자신들이 배우는 과학기술을 나 같은 일반인들에게 알기 쉽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공학도의 언어가 아닌 일반언어로 알기 쉽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 과학기술이 인류사회에 왜 필요한지, 그것이 인류사회에 어떻게 공헌할 수 있을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자동차는 과학기술자들이 개발했지만, 그것을 길 위에서 달릴 수 있게 한 것은 그들이 아니다. 과학기술 전문가가 아닌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인들이 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런 이해를 위해서 과학기술자에게 필요한 것이 인문교양이다. 인문교양이 없는 과학기술자가 현대의 복잡다기한 과학기술을 일반인에게 알기 쉽게 설명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로마문명 이야기를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이 글의 목적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기 위해서다. 나는 이 글을 통해 역사라는 인문적 지식이 그저 옛날 이야기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지혜를 주는 보고임을 우리 모두가 깨닫기를 바란다.

로마문명은 이태리인만의, 아니 서구인만의 역사가 아니다. 그것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오늘을 사는 현대인에게도 많은 것을 시사한다. 2000년 전 로마인들이 바로 우리 곁으로 다가 와 이야기를 거는 것이다. 그 이야기는 그들만의 문제가 아닌, 우리 모두의 문제, 인류의 문제이다. 그만큼 로마인의 역사는 인류가 경험한 보편역사의 한 부분이다.

로마문명은 2000년 전 로마인들이 만든 수많은 유적을 통해 아직도 우리의 눈 앞에 생생하게 나타난다. 역시 철학은 희랍인에게, 건축은 로마인에게 배우라는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하지만 우리가 로마인에게서 무엇인가 배우기를 원한다면 로마인 스스로 직접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말한 그것만큼 직접적인 것이 없다. 그들이 말한 것이 남아 있다. 글의 형태로 말이다. 2000년의 시간을 극복하고 로마인의 말은 글에서 글로 이어져 왔다.

로마인들의 글은 2000년의 역사를 담은 건축의 금자탑 콜로세움이나 판테온에서 경험할 수 없는 감동이다. 그것은 이제 라틴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세계의 지식인들에게 다가간다. 로마인들이 전하는, 비록 2000년 전의 이야기지만, 역시 사람의 경험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고전이다. 고전은 아무리 시간이 지난들 그것에 의해 마모되지 않는다. 언제나 우리의 삶을 자극하면서 지혜를 준다. 그 옛날 공자의 말씀이 논어로 기록되어 2천 년 동안 수많은 사람을 자극한 것처럼 로마인들의 이야기도 비슷한 기간 동안 비슷한 방법으로 사람들을 자극했다.

그리스 데모스테네스와 라틴문학의 왕자 키케로

키케로의 흉상은 마치 살아 있는 키케로를 박제한 것과 같이 사실적이다. 역시 로마인들이 만든 이런 흉상은 단순한 예술품이 아니라 돌로 만든 초상화다. 키케로의 얼굴을 자세히 보면 카이사르와 같이 머리 숯은 적고, 이마는 넓다. 무엇인가 강인한 의지를 엿볼 수 있는 인상이다.(이 사진은 위키피디아 공개 사진입니다)
▲ 키케로의 흉상, 기원후 1세기 중엽 추정, 로마 카피톨리노 박물관 소장 키케로의 흉상은 마치 살아 있는 키케로를 박제한 것과 같이 사실적이다. 역시 로마인들이 만든 이런 흉상은 단순한 예술품이 아니라 돌로 만든 초상화다. 키케로의 얼굴을 자세히 보면 카이사르와 같이 머리 숯은 적고, 이마는 넓다. 무엇인가 강인한 의지를 엿볼 수 있는 인상이다.(이 사진은 위키피디아 공개 사진입니다)
ⓒ Glauco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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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나는 또 다른 로마인을 소개한다. 그 이름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기원전 106~43). 키케로는 로마의 정치인이자 웅변가로 잘 알려진 사람이다.

나는 이미 이 사람에 대해서는 카이사르를 쓰면서 간단히 언급했다. 로마 공화정이 위기에 처해 있을 때 그는 공화정의 옹호자로서 황제정을 구상하는 카이사르의 정적이 되지 않으면 안 되었던 비운의 정치인이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도량이 넓은 위인이었기에 키케로를 죽이지 않았다. 키케로가 폼페이우스 편을 들어 그에게 반기를 들었지만 카이사르는 내전 이후 키케로를 사면함으로써 그의 정치적 소신을 존중했다.

그렇지만 키케로의 운명은 카이사르의 죽음과 함께 다하고 말았다. 카이사르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이들은 더 이상 반대파를 용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카이사르의 오른팔이었던 안토니우스는 어느 날 자객을 키케로에게 보냈다. 그의 목이 베어졌고, 팔이 잘려졌다. 화려했던 60년 삶은 그렇게 처참하게 종지부를 찍었다.

키케로는 로마시대 이미 영웅적 평가를 받았다. 플루타르코스는 <영웅전>에서 키케로를 다루면서 그를 희랍 시대의 정치인이자 웅변가인 데모스테네스(기원전 384~322)와 비교했다.

 사실 나는 2012년 겨울 칼스버그 박물관에 갈 때까지 이 사람에 대해서 잘 몰랐다. 그런데 그 앞에 서자 무엇인가 강한 포스를 느꼈다. 순간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에 자연스레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말았다. 집에 돌아와 이 인물에 대하여 자료를 찾아 보았다. 내가 데모스테네스를 알고 그를 키케로와 연결시키는 순간이었다.
▲ 데모스테네스 입상, 코펜하겐 칼스버그 박물관 사실 나는 2012년 겨울 칼스버그 박물관에 갈 때까지 이 사람에 대해서 잘 몰랐다. 그런데 그 앞에 서자 무엇인가 강한 포스를 느꼈다. 순간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에 자연스레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말았다. 집에 돌아와 이 인물에 대하여 자료를 찾아 보았다. 내가 데모스테네스를 알고 그를 키케로와 연결시키는 순간이었다.
ⓒ 박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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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모스테네스가 누구인가? 그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그리스 전역을 통일하기 이전 선왕 필리포스에 대적하여 반마케도니아 운동의 선봉에 선 인물이었다. 그는 결국 알렉산드르로스 사후 마케도니아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게 되자 도주하여 음독자살함으로써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했다.

참으로 재미있는 역사의 재연이다. 역사는 돌고 도는가. 알렉산드로스에 비교되는 카이사르, 그에 반기를 든 키케로, 그리고 처참한 죽음…. 그러니 키케로는 데모스테네스의 삶과 많이 닮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키케로가 안토니우스에 의해 죽임을 당했지만, 그의 운명이 그것으로 다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남긴 말과 글이 2000년 동안 사람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키케로는 로마의 최고 지성으로서, 라틴문학의 왕자로서 후대의 사람들에게 말을 건다. 적어도 그는 모든 로마인들 중에서 카이사르 다음가는 명성을 얻었다. 로마시대는 물론 그가 죽은 다음 천 년이 넘어 서양세계에 르네상스의 바람이 불 때, 그는 라틴문학의 왕자로서 화려하게 다시 등장했다. 윌 듀란트는 키케로에 대하여 이렇게 찬사를 보낸다.

"분명히 키케로 이전이나 이후 라틴어를 그렇게 유혹하듯 매력적이고 유창하게, 그렇게 열정적으로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키케로야말로 라틴어 산문의 정점이었다." (<문명이야기 3-1>, 277쪽)

이런 찬사는 키케로 생전에 그의 정적 카이사르가 직접 말하기도 했다. 카이사르는 <키케로와의 유사성>이라는 책을 써서 키케로에게 헌정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웅변술에 관한 모든 보물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처음으로 그 보물을 사용했습니다. 그럼으로써 당신은 로마인들에게 엄청난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당신 조국의 명예가 되었습니다. 당신은 가장 위대한 장군들이 거둔 승리보다 더 값진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왜냐하면 로마제국의 경계보다 인간 지성의 경계를 넓히는 것이 더 고귀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문명이야기3-1>, 277-278쪽)


태그:#세계문명기행, #로마문명이야기, #키케로, #인문학, #라틴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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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학교 로스쿨에서 인권법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30년 이상 법률가로 살아오면서(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 역임) 여러 인권분야를 개척해 왔습니다. 인권법을 심층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오랜 기간 인문, 사회, 과학, 문화, 예술 등 여러 분야의 명저들을 독서해 왔고 틈나는 대로 여행을 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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