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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도 장텃골 수해가 언제였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아마 1987년 안양천 범람 때와 비슷한 꼴이지 않았을까 싶다. 지난 1987년 7월  안양천 범람으로 영등포구 문래동 오목교가 불통되자 출근시민들이 침수된 길을 통해 시내로 향하고 있다.
 나는 아직도 장텃골 수해가 언제였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아마 1987년 안양천 범람 때와 비슷한 꼴이지 않았을까 싶다. 지난 1987년 7월 안양천 범람으로 영등포구 문래동 오목교가 불통되자 출근시민들이 침수된 길을 통해 시내로 향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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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장텃골 물난리 때문에 지금도 물이 지긋지긋하게 싫어."

카톡에 우리 남매가 어릴 적 살았던 장텃골 이야기가 올라왔다. 언니, 오빠에게 물었다.

"장텃골 물난리가 몇 년도 일이야?"

내가 질문을 올리자 카톡이 멈췄다. 더는 이야기하기 싫다는 표현인 듯싶었다. 큰언니가 '지긋지긋하다'고 할 때부터 그런 낌새를 느꼈다. 하지만 물난리가 터진 발생 년도까지 안 알려줄 줄은 몰랐다. 그때 어떤 감정이었는지 묻는 게 아니고 그냥 사실관계를 묻는 것뿐인데도. 가장 기억이 뚜렷할 큰언니는 물난리에 대해 더는 어떤 이야기도 꺼내지 않았다. 작은언니가 큰언니를 대신해서 "막내야, 아픈 기억이다"하고 내 질문에 답을 달았다.

한밤중에 내린 폭우, 우린 수재민이 되었다

찬찬히 생각해 보니 물난리가 났을 때 큰언니는 한참 예민한 중학생이었다. 그런 큰언니가 겪은 물난리는 유아인 나나 초등학생인 작은언니, 오빠가 겪은 기억보다 더 끔찍했을 것이다. 그러니 큰언니의 이런 반응이 무리는 아니다. 한밤중에 내린 폭우로 우린 하루아침에 수재민이 되었다.

장텃골은 서울 구로구 고척1동의 옛 이름이다. 영등포구에서 구로구 사이엔 안양천이 흐른다. 안양천 변으로 근방에 사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장터가 만들어졌다. 장터란 말에서 생긴 지명이 '장텃골'이다. 장텃골은 지대가 낮아서 비가 조금 많이 오기만 해도 침수가 되었다. 얼마나 침수가 잦았던지 서울시가 재개발 사업지구로 지정한 첫 마을이기도 하다.

우리 가족은 1960년도 말 장텃골로 이사했다. 우리가 세 든 집은 무허가 건축물로 D 전문대 화장실 축대 아래 첫 집이었다. 우리가 무허가 주택에 세를 든 이유는 딱 하나, 저렴한 가격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D 전문대 가까이 이사를 한 데엔 나름의 계획이 있었다. 아버지는 엄마에게 D 전문대 학생들을 상대로 하숙을 놓을 것을 권했다. 물론 세상일이 뜻하는 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엄마는 아버지의 바람과 달리 하숙을 하지 못했다. 살림하기도 바빠서 그랬으리라 추측을 하지만 정확한 이유는 모른다. 그러던 중 1971년에 막내인 내가 태어났다.

몇 년 뒤 여름날 억수 같은 비가 쏟아졌다. 장텃골에 사는 동안 우리는 크고 작은 물난리를 경험했지만, 이 사건이 가장 위험했다. 엄마에게 전해 들은 사건은 이렇다. 아버지는 의정부에서 근무하고 있었고 집엔 엄마와 중학생인 큰언니 초등학생인 작은언니와 오빠, 그리고 어린 내가 자고 있었다.

"엄마가 자고 있는데 밖에서 '우르르' 돌 구르는 소리가 나는 거야. 그래서 깼어. 밖에 무슨 일이 났나, 나가 보려고 문을 여는데 문이 안 열려. 우리 집 위에 D 전문대 화장실이 있었거든. 화장실 축대 돌들 사이에 시멘트를 안 발랐나 봐. 비가 오니까 큰 돌들이 가만히 있겠어? 축대가 와르르 무너져서 우리 집으로 내려온 거야. 장독에 독들 깨지고 담이 무너지고 돌들이 굴러서 방까지 밀고 들어왔어. 아주 큰 돌이 방 벽을 밀고 들어왔는데 집은 안 무너졌어. 자세히 보니까 장농이 방이 안 무너지게 간신히 버티고 있는거야. 그런데 어떻게 농이 돌을 버텼는지 몰라. 신기하지?"

"그래서 어떻게 됐어?"

"안방에서 연결된 작은방이 있었어. 작은방 창문을 열어 보니까 거기까지는 돌이 안 굴러 왔더라고. 그래서 너희 큰언니를 깨워가지고 큰언니가 작은언니랑 오빠 깨워서 창문으로 넘어갔어. 자는 너도 넘기고. 그때 엄청 위험했어. 까딱 잘못하면 아버지만 빼고 우리 식구 다 죽을 뻔한 거야."

밖에 나와 보니 이웃 사람들도 다 집에서 나와 있었다. 굴러 오는 돌들 때문에 집이 언제 무너질지 모르니까. 나중에 보니 피해는 우리 집이 제일 심했다.
 밖에 나와 보니 이웃 사람들도 다 집에서 나와 있었다. 굴러 오는 돌들 때문에 집이 언제 무너질지 모르니까. 나중에 보니 피해는 우리 집이 제일 심했다.
ⓒ free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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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 나와 보니 이웃 사람들도 다 집에서 나와 있었다. 굴러 오는 돌들 때문에 집이 언제 무너질지 모르니까. 나중에 보니 피해는 우리 집이 제일 심했다. 축대 아래 첫 집이라서. 다른 집은 담장만 무너지고 말았지만, 우리 집은 방도 무너졌다. 보광동에 살던 큰이모가 며칠 뒤 찾아왔다.

"얼마나 걱정이 됐던지 연락은 안 되고 하니까 너희 큰이모가 우릴 찾으러 왔어. 집이 무너진 소식은 들었지 간신히 살아났다고 하는데 얼마나 걱정이 됐겠냐? 그 해 물난리가 심했거든 직접 눈으로 보려고 보광동에서 고척동까지 그 먼 데까지 찾아온 거야."

살 곳 없어 대학교 교실 들어가 생활

그리고 우린 집이 무너져서 살 곳이 없으니까 D 전문대로 들어가서 교실에서 생활했다.

"학생들은 개학했는지 수업을 하는데 우리는 거기 교실에서 사는 거야. 곤로도 가져다 놓고 밥해 먹으며 살았어. 살 곳도 없고 보상도 받아야 하잖아."

엄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학교 교실에 살면서 중학교에 다녔을 큰언니 생각이 났다. 남의 학교 교실에서 온 가족과 피난민 생활을 하고 아침이면 교복을 입고 자기 학교에 다녔을 큰언니는 얼마나 부끄럽고 창피했을까? 그러다가 엄마가 서울시청에 민원을 넣으러 간 날이 있었다.

"구로구에서 시청까지 다녀오려면 얼마나 힘드냐? 요즘처럼 지하철이 있냐? 그땐 버스를 몇 번을 갈아타고 갔다 와야 해. 시청에서 학교로 돌아오는 길이야. 내가 운동장을 지나는데 교실 창문에 정민이 네 얼굴이 보이는 거야. 2층 창문에서 네가 이렇게 올라가서 운동장을 구경하고 있어."

장텃골 집에서 찍은 내 모습
 장텃골 집에서 찍은 내 모습
ⓒ 강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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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두 손에 깍지를 끼고 가슴팍에 대고 추켜 올린다. 작은 언니가 나를 올려 주는 흉내를 내는 것이다. 내가 저런 모습으로 2층 창문에서 운동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니 위험천만한 일이다.

"얼마나 위험하냐? 네가 떨어지게 생긴 거야. 그래서 내가 올라와서 너희 작은 언니한테 위험하게 뭐하는 짓이냐 했더니. '정민이가 보여 달라고 하잖아.' 그러는 거야. 학생들이 그때 운동장에서 체육을 하고 있는데 그게 보고 싶었나 봐. 그래서 내가 아주 깜짝 놀랐어. 보상금 받으려다가 애 다칠 뻔했잖아. 그래서 보상이고 뭐고 다 필요 없다. 내가 아주 그날부로 당장 교실에서 내려왔어. 학교 사람들은 이유도 모르고 엄청 좋아했지. 아버지는 나중에 소식을 듣고 '왜 내려왔느냐고 좀 더 있어야지' 하고 뭐라고 하시더라고."

집이 무너지고 우리 식구는 학교와 여관과 천막에서 지냈다. 천막에서 지낼 때 자다가 마루 같은 데서 땅바닥으로 떨어져서 "엄마"를 부르고 울었던 일도 있다. 엄마는 무너진 동네를 수리하는 공공근로 사업에 일용직으로 일하게 되었다. 수재민이 된 주민들에게 공공근로에 일할 우선권을 준 덕이었다. 엄마는 동네 아줌마들과 함께 일하게 되었다. 아직은 어린 나도 아침마다 엄마를 따라 공사현장으로 출근했다.

어렸지만 어렴풋이 그때 일들이 기억이 난다. 엄마와 아줌마들은 점심시간이 되면 모래를 지고 나르던 지게를 엎어놓고 그 위에 앉아서 도시락을 먹었다. 밥을 다 먹고 나면 오후 일을 시작하기 전에 잠깐의 짬이 있었다. 아줌마들과 엄마는 그 짧은 시간에 꿀 같은 쪽잠을 잤다. 낮잠에 드는 엄마는 어린 나에게 무척 중대한 임무를 맡겼다.

"정민아, 아저씨가 종을 달랑달랑 치면 엄마 꼭 깨워. 알았지?"

옆에 있던 아줌마들도 "정민아, 잘 알았지. 부탁한다"하며 나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나는 엄마가 잠든 사이 곁에서 돌멩이와 모래를 가지고 놀았다. 나는 가슴에 중요한 임무를 품고 있었다. 그 어린 나이에도 어른들이 나에게 중요한 일을 맡긴 것 같아서 긴장하기도 뿌듯하기도 했다. 작업반장 아저씨가 종을 치면 나는 옆에 잠든 엄마를 깨웠고 엄마는 아줌마들을 깨웠다.

가난은 단지 불편할 뿐이라는 말, 동의할 수 없다

공사장 위 언덕엔 기찻길이 있었다. 가끔가다 그곳으로 기차가 지나면 나는 하던 놀이를 멈추고 열심히 손을 흔들었다. 그 기차에 학교에 간 언니 오빠가 타고 있다고 철석같이 믿었다. 일곱 살 위 오빠는 학교가 끝나면 친구들과 놀 생각은 꿈도 못 꾸고 공사장으로 뛰어 왔다. 그래서는 저녁에야 일이 끝나는 엄마를 대신해서 나를 데리고 집으로 갔다.

오빠가 나를 데리고 집으로 간 장면은 내 기억 속에는 없다. 그 장면은 오빠가 해 준 이야기 속에 있었다. 오빠가 그 일을 유독 기억하는 이유는 친구들과 놀지 못했던 그 기간이 참 억울하기도 힘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형제 중 가장 많은 기억을 가지고 있을 큰언니는 내 물음에도 그때의 기억을 끝끝내 꺼내지 않았다. 40년이 지났지만, 그 기억을 꺼내기엔 상처가 크구나! 짐작할 뿐이다.

우리 4남매는 같은 사건을 겪었지만 각각 조금씩 다른 기억을 가지고 있다. 나는 너무 어렸던 이유로 장텃골의 물난리 기억이 그리 고통스럽지는 않다. 그냥 아련하게 그립다. 하지만 중학생인 큰언니는 지긋지긋했던 기억이라고 했다. 초등학생이었던 작은언니와 오빠의 기억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장텃골 집은 내가 태어난 곳이라 우리 4남매가 모두 지낸 어린 시절의 추억이 담긴 장소다. 엄마는 그 집 이야기만 꺼내면 우리의 어린 시절이 생각이 나서 절로 웃음을 지으신다. 그만큼 우리에겐 소중한 추억의 장소이다.

하지만 집값이 싼 동네 무허가 집에 세를 들었다는 이유로 우리 가족은 위험에 처했다. 다행히 빨리 집에서 탈출한 덕분에 우리 누구도 다치거나 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에 상처는 4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남아 있다. 물난리를 입에 올리는 것을 싫어할 정도로 언니의 추억엔 상처가 남아 있다. 마냥 좋기만 해야 할 어린 날의 추억이 물난리로 사라졌다. 가난은 단지 불편할 뿐이라는 말에 동의가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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