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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꽃으로 꽃말은 '정의' '애수' 또는 '슬픈 그대가 좋아'다.
 용담꽃으로 꽃말은 '정의' '애수' 또는 '슬픈 그대가 좋아'다.
ⓒ 임소혁 사진작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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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군 이야기

나는 이 겨울 일제강점기 독립군 이야기를 쓰고 있다. 어린시절의 오랜 꿈을 이루고 있는 셈이다. 나의 할아버지는 애주가셨다. 그래서 나는 주전자를 들고 이웃 공씨 술도가에 가서 막걸리를 받아오는 술심부름을 자주했다.

내가 주전자를 들고 그 집 대문에 들어서면 공씨 할아버지는 반갑게 맞았다.

"뚜야 왔냐?"

그런데 공씨 할머니는 인사에 앞서 앞치마로 눈물부터 닦았다. 이따금 술을 거르는 동안 그 집 마루에 앉았으면 할아버지는 만주시절 이야기를 하셨다. 나는 후일에서야 그 까닭을 알게 되었다. 공씨 할아버지가 하필이면 내 이름 '도'를 "뚜"라고 발음한 것은 중국식 발음이요, 할머니가 나만 보면 눈물을 흘리는 것은 당신 손자가 나와 동갑인데, 그 손자를 6·25 전쟁 때 잃었고, 당신 아들마저 그 이전 해방공간에서 행방불명이 되었기 때문이다.

어른들이 수군대는 말로는 그 아들이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였다고 했다. 또, 할아버지는 약주를 드시면서 진짜 애국자는 국난 때 나라를 구하는 이라고, 눈보라 속에 신출귀몰한 만주 독립군 얘기를 하셨다.

아마도 그때부터 추운 겨울 말을 타고 만주벌판을 누비던 독립군 이야기가 내 머릿속에 새겨진 모양이다.

글 감옥

나는 지난 10월 5일부터 <오마이뉴스>에 실록소설 '들꽃'을 연재하고 있다. 이 연재를 시작하기 전에 나는 지인 몇 분에게 "스스로 글 감옥에 갇히고자 실록소설 '들꽃'을 연재한다"는 메일을 보낸 적이 있다.

사실 작가에게 한 매체에 소설을 연재한다는 것은 기쁨이요, 동시에 괴로움이다. 나는 그동안 월간, 주간 등의 연재를 해 보았다. 아무튼 월간은 한 달 내도록, 주간은 일주일 내도록 글 감옥에 갇힌 기분이다. 다행히 그 기간 동안 좋은 글감을 만나 술술 잘 쓰일 때는 더 없이 기쁘지만, 그 반대일 때의 괴로움은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흔히들 창작을 '피 말리는 작업'이라고 하나보다.

글이 술술 써지지 않을 때는 벼랑에 선 심정이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나 빈 센트 반 고흐가 권총 자살한 근본 이유도 글이, 그림이 그려지지 않기 때문이었으리라.

나는 이 작품 '들꽃'의 글감을 15년 전인 1999년에 찾았다. 그해 여름 8월 1일부터 11일까지 한 독지가(이영기 변호사)의 후원으로 독립지사 후손 이항증(석주 이상룡 선생 증손) 선생과 김중생(일송 김동삼 선생 손자) 선생과 함께 중국 대륙에 흩어진 항일유적지를 답사했다.

1999년 8월 4일 오전, 동포 서명훈 사학자의 안내로 하얼빈 역 플랫폼에서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곳을 답사했다. 다시 서 선생의 안내로 안 의사가 한동안 구금된 옛 일본총영사관으로 갔다. 그 무렵 싸구려 여인숙(지금은 화원소학교)으로 변한 일본총영사관 지하 감방을 둘러본 뒤,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동북열사기념관이었다.

하얼빈 동북열사기념관
 하얼빈 동북열사기념관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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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열사기념관

동북열사기념관은 중국 동북 헤이룽장성 일대에서 일제강점기 때에 일본 관동군 및 위만군과 정면으로 맞서 싸우다가 순국한 항일열사 100여 분의 유물과 영정, 모형들을 진열한 곳이었다. 서명훈 선생은 거기 모셔진 열사 가운데 허형식, 양림, 리추악, 리홍광, 박진우, 차순덕 등 32분이 조선족 열사들로, 기념관에 모셔진 동북항일 열사 중 삼분의일이나 된다고 했다. 그때 동행한 이항증 선생은 나에게 부연 말씀을 했다.

"허형식(許亨植) 열사는 박 선생 고향 분이에요."
"네?"

나는 깜짝 놀랐다. 솔직히 나는 그때까지 허형식이란 인물을 몰랐다.

"허형식 열사는 임은동 태생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태어난 상모동과는 철길 사이로 이웃 동네지요."
"네에?"

이 선생은 나를 두 번 놀라게 했다. 이 선생의 어머니는 허은 여사로 왕산 허위 선생의 당질녀였다. 내가 어찌 구미 임은동과 상모동을 모르겠는가? 두 마을은 같은 금오산 자락으로, 밤마실을 다니는, 부르면 대답할 거리다.

순수한 독립전사

대부분 작가들은 유년시절 이야기나 고향이야기를 평생 우려먹으며 산다. 그래서 나는 젊은 날 고향 출신 박정희 대통령을 이야기를 쓰다가 아버지한테 충고를 받았다. 예로부터 살아있는 인물은 함부로 글로 쓰지 않는다는 말씀과, 그분은 만주군 출신이라는 점 등을 부적절한 예로 드시면서 좀 더 의로운 인물을 찾아 먼저 그런 분 얘기부터 쓰라고 말씀하셨다.

헤이룽장성 경성현 청봉령에 있는 허형식 희생비를 찾아간 필자(2000년 8월)
 헤이룽장성 경성현 청봉령에 있는 허형식 희생비를 찾아간 필자(2000년 8월)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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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무식하고 게으른 탓으로 오래도록 고향 출신의 의로운 인물을 찾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 뜻밖에도 하얼빈 동북열사기념관에서 항일명문 임은 허씨 가문과 허형식 장군을 알게 되었다. 그때의 기쁨이란 태평양을 처음 발견한 에스파냐 탐험가 발보아의 심정이었다.

더욱이 대학도서관에서 찾은 동북아 장세윤 연구위원의 <허형식 연구>에서 다음과 같은 평가를 읽었다.

"1940년대 초 동북항일연군 지도자(김일성·최용건·김책 등)들은 일제의 극심한 토벌을 피해 러시아로 월경했다. 그러나 허형식 장군은 한 번도 국경을 넘나든 적이 없이 끝까지 고집스럽게 만주 땅을 지키다가 위만 토벌군에 장렬히 산화했다.

그는 그 어느 독립전사보다 순수하고 투쟁정신이 앞섰다. 그런 분들의 희생으로 동북의 조선족들은 중국 해방 후, 땅과 자치권을 얻을 수 있었다."

두 여인

허로자 할머니. 그의 아버지가 구미에서 일제 등쌀에 쫓겨 만주로, 연해주로 이주. 1936년 10세 때 스탈린의 강제추방으로 우즈베키스탄에서 살다가 84세 처녀할머니가 되어 2009년 고국에 돌아왔다.
 허로자 할머니. 그의 아버지가 구미에서 일제 등쌀에 쫓겨 만주로, 연해주로 이주. 1936년 10세 때 스탈린의 강제추방으로 우즈베키스탄에서 살다가 84세 처녀할머니가 되어 2009년 고국에 돌아왔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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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듬해인 2000년 여름, 나 혼자 북만주를 헤매며 허형식 장군의 자취를 뒤쫓았다. 그런 뒤 귀국하여 애써 구한 그분의 사진을 확대 인쇄하여 액자에 담아 서가에 두고 '영웅을 찾아서'라는 가제로 장편소설을 집필했다. 하지만 1910~1940년대의 만주벌판의 독립군, 관동군, 마적들의 각축전이 나에게 육화되지 않아 번번이 도중에서 절필하고 말았다.

그때마다 나는 나 자신과 가족, 그리고 언저리 사람들에게 부끄러웠다. 그런 가운데 세계 여기저기에서 부평초처럼 떠도는 임은 허씨 후손들을 만났다. 그들 중 일부는 친지들의 도움으로 고국으로 귀화는 했지만, 고국에서 생계대책이 없어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다시 중앙아시아로, 러시아로 돌아가는 이들도 있었다.

마침 한 모임에서 만난 왕산 선생 손녀의 초라한 모습은 나에게 다시 붓을 잡게 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오마이뉴스> 연재라는 배수진을 치고 시작했다. 45회 정도를 목표로 현재 19회 연재를 마쳤다. 이번만은 끝까지 쓰고자 독한 마음으로 몸부림치고 있다.

이즈음 나는 두 여인이 눈에 아른거린다. 이웃 마을에서 만주로 간 두 집안 딸들의 오늘 사는 모습이 한 세기가 지난 지금도 극명하다. 한 사람은 권력의 정점에 서 있는가 하면, 다른 한 사람은 만주로, 연해주로,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에서 유랑하다가 2010년 귀화하여 구로동에서 생활보호대상자로 살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9일 오전 청와대 위민관 영상국무회의실에서 열린 청와대-세종청사 간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9일 오전 청와대 위민관 영상국무회의실에서 열린 청와대-세종청사 간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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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사람뿐 아니라 죽은 이도 마찬가지다. 한 사람은 동작동 가장 높은 곳에 묻혔고, 다른 한 사람은 북만주 외진 산골에서 위만군의 총탄에 쓰러진 뒤 목은 효수되고, 나머지 시신은 짐승에 의해 훼손된 뒤 뼈만 수습돼 그 자리에 초라한 희생비만 남아 있다.

나는 2000년 조촐한 그 희생비를 찾아가 들꽃을 바쳤다. 더불어 그분 이야기를 세상에 전하는 게 최소한의 작가적 양심으로 여기며 이 연재를 이어가고 있다.

역사가들은 승자의 기록을 중시할지라도 작가는 패자의, 땅에 묻힌 양심을 되살리는 게 그 소명일 것이다. 내 부족한 점은 후일 누군가 메워주시리라.


태그:#들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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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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