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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처참한 마음으로 인천공항에서 리무진버스를 타고 광주에 내려왔다. 내 지나온 삶에서 손가락에 꼽을 만큼 처참한 날이었다. 창피하기도 하고 어디에 하소연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내 마음은 온통 나에 대한 자학으로 꽉 차 있었다.

내 머리는 공황 상태였다. 공항버스 대기실에 멍하니 앉아 있다가 버스를 놓칠 뻔하기도 하고 버스를 타고 오다가 들른 휴게소에서도 15분 휴식시간을 안 지켜 공항버스 운전사에게 눈총을 받기도 하였다. 한 가지 큰 실수를 저질러 버리니 온갖 작은 실수들이 계속 이어졌다.

6개월 전부터 준비한 미국행이었는데...

6개월 전부터 준비한 미국여행, 부푼 마음을 안고 공항에 도착했는데...
 6개월 전부터 준비한 미국여행, 부푼 마음을 안고 공항에 도착했는데...
ⓒ sx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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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에서 은퇴한 이후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리 교회 장로님이 경영하는 회사에 채용되었다. 장로님이 집에만 있지 말고 나와서 조금 도와 달라는 부탁에 가벼운 마음으로 나가게 된 것이다. 그런데 실수가 잦았다. 장로인 사장이 지시한 사항을 잊어버린다던지, 차 안에 뭔가를 두고 내린다던지 하는 자잘한 실수들이다. 그래서 노트에 무슨 일이든지 기록하는 습관이 생겼다.

6개월 전부터 준비한 미국행이었다. ○○방송 어린이 합창단이 미국 순회공연을 하는데, 그 일정에 동행하는 것이었다. 우리 일행은 이날 새벽 광주에서 버스를 대절해 타고 인천공항으로 출발했다. 공항은 설을 기해 미국에 가려는 사람들로 수속을 밟는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우리 일행도 긴 줄에 합류해 수속을 밟으려고 기다렸다. 기다리다가 입국 수속을 하는 여직원에게 우리 4명의 여권을 제시했다. 나는 아무 의심도 없이 여권을 건네 주었다. 그때까지는 아무 생각도 안 했다.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생각조차 못했다.

공항 여직원이 여권 하나를 내밀며 "이 여권은 구권이에요" 하고 내민다. 모두 나를 쳐다봤다. 그제야 내 여권이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아, 내가 3년 전에 여권을 갱신했는데 신여권을 놓아두고 구여권을 가져 왔구나.'

그래도 설마, 6개월간 계획하고 준비했던 미국 여행을 가지 못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혹시 신여권이 집에 있는가 물었다. 아내가 찾아 보더니 책상서랍에 신여권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공항직원에게 "팩스로 받으면 안 되겠느냐"고 물었다.

직원은 "안 된다"고 했다. 여기서 출국을 해도 저쪽(미국)에서 입국할 수 없으니 발권 취소를 하라는 것이다. 일행은 내년에도 똑같은 프로그램이 있으니 올해는 포기하고 내년에 가라고 위로를 했지만, 위로가 될 리 만무했다. 우선 너무 창피했다. 공항에 구여권을 가지고 가서 해외여행을 포기했다는 말은 들어 보지도 못했다.

머리를 둔기로 하나 얻어 맞은 것 같았다. 내가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우왕좌왕 하고 있었다. 서울에 있는 딸에게 알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딸에게 전화를 했다. 딸은 주말이라 행정 처리가 되지 않으니 우선 광주로 내려가라고 했다. 사장한테도 알려야 할 것 같았다. 전화를 해서 모기 소리만 하게 사실을 알렸더니 역시나 대뜸 화부터 낸다. 내가 남에게 피해를 끼친 것도 아닌데... 손해는 내가 본 건데 말이다.

집에 돌아와 아픈 사람처럼 누워 버렸다

광주에 내려와서 집에 오니 아무도 없다. 나는 아픈 사람처럼 누워 버렸다. 내 주위 사람들은 모두 내가 미국에 가고 있는 것으로 알텐데 이제서야 구여권을 가져가서 못 가버렸다고 알릴 수도 없다. 그냥 일주일 동안 아무도 안 만나기로 하고 누가 미국여행에 대해 물어보면 얼버무리기로 했다. 한참을 누워 있는데 핸드폰이 울린다. 받아보니 미국에 교환학생으로 가 있는 아들이다. 아들한테도 아내가 사실을 알렸나보다. 아들이 말했다.

"아빠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지. 너무 상심 마."

이제 25살, 항상 어린 녀석으로만 알았는데 나를 위로할 줄도 알고 대견하다. 그래도 누구한테 하소연이라도 해야 마음이 위로가 될 것 같았다. 친한 후배에게 전화를 했다. 후배도 내가 미국에 가고 있는 줄 알았는데 뭔 일이냐며 깜짝 놀랐다. 구여권을 가지고 가서 못 가고 돌아온 애기를 했더니 후배도 안타깝기는 하지만 다음에 더 좋은 기회가 올 것이라며 위로를 한다. 그리고 우리 60대들의 공통적인 실수를 지적했다.

"우리 나이 먹은 사람들, 아무리 챙기고 또 챙겨도 결정적인 때 실수를 한단 말이요. 우리 머리 속에 뇌세포가 죽어가니 어쩔 수 없어라. 그러니 형님도 이제 조직생활은 젊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니 안 맞어라. 나같이 노는 데 적응해야 한단 말이요."

후배는 금융권에서 명퇴를 해서 10년째 아무것도 안 하고 놀고 있다. 나더러 조직생활 하지 말고 자신처럼 노는 데 적응하라는 것이다. 퇴직을 해서 노는 데는 후배가 나보다 선배다. 그 말도 맞기는 맞다. 은퇴 이후 다시 조직 생활하는 것은 문화의 차이 등에서 힘들었다.

그렇다고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싶지는 않다. '은퇴 후 인간형'에 항상 바쁘게 살아야 불안하지 않는 현직형과 여유를 즐기고 고독력이 강한 은퇴형이 있다는데 나는 현직형에 속하는 듯하다. 목적이 있고 바빠야만 살 맛이 난다. 그렇다면 더 나이 들어 가면서 어떻게 실수를 줄일 수 있을까.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길, 반드시 확인하는 길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여권을 갱신받은 분들은 반드시 구여권을 없애버리시길. 나처럼 해외여행시 아무 생각없이 구여권을 들고 나와 여행을 못 가는 창피한 일을 겪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태그:#구여권, #해외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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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여행에 관한 글쓰기를 좋아합니다. 여행싸이트에 글을 올리고 싶어 기자회원이 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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