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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대국은 단숨에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인공지능 시대가 본격적으로 도래하면 디스토피아가 펼쳐질 것이라는 어두운 전망부터 건강, 교통 등 삶의 다양한 영역에 인공지능을 활용하면 삶이 더욱 윤택해질 것이라는 주장도 팽팽하게 전개되었다. 이유야 어쨌든 대국을 지켜본 모두가 인공지능의 진보와 능력에 놀랐다.

그런데,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척척 계산해내고 감정에 휘둘리는 법 없이 정해진 알고리즘을 따라 예측하는 알파고만 놀라운 존재일까. 슈퍼컴퓨터 1200대로도 읽어낼 수 없는 인간의 예측 불가능성, 이것이야말로 더 놀라운 일이 아닐까 싶다. 알파고 쯤은 가볍게 뛰어넘어 여기저기 럭비공처럼 튀는 아이들은 늘 나를 들뜨게 한다.

새우, 담배 그리고 독립선언

야자가 싫어 알러지 반응이 있는 새우튀김을 먹어버린 경민이...
 야자가 싫어 알러지 반응이 있는 새우튀김을 먹어버린 경민이...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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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적·정신적 문제로 교육활동에 주의가 필요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요보호학생 상담을 하던 중 경민(가명)이를 만났다. 학기 초에 배부한 요보호학생 조사지에 새우 알러지가 있다고 적어 냈길래, 주의사항을 일러줄 참이었다. 최근에 새우 알러지로 고생한 적이 있었느냐고 물었더니 상담 바로 전날 알러지가 생겼다는 거다. 학교 급식에서 석식 메뉴로 새우튀김이 나왔는데, 눈 질끈 감고 먹었다는 것. 토끼 눈이 돼 놀란 내게 경민이가 들려주는 새우튀김 시식기는 상상도 못해봤던 이야기다.

고등학생이 된 후 야간 자기 주도 학습을 열심히 할 생각이었는데, 연이어 며칠 참여해 보니 피곤해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아무 이유 없이 중도에 귀가하는 것은 자존심상 스스로 용납이 안 돼 기왕에 맛있는 새우튀김도 먹고, 알러지로 당당하게 귀가해 푹 쉬고 싶었다는 거다. 제정신인가 싶어 차마 입을 다물지 못하는 내 앞에서 경민이는 해맑게 활짝 웃는다. 알러지를 이용해 그럴듯한 핑계를 만들어내는 비상한(?) 능력, 과연 알파고라면 이렇게 비합리적이고 무모한 일을 벌일 수 있을까.

명모(가명)는 근래에 보기 드문 예의바른 학생이었지만, 화려한 경력을 자랑하는 '골초'였다. 괜히 학교에서 담배 피우다가 걸려 학생인권부에 불려가면 학교생활이 얼마나 힘들어질는지 잘 알기에, 학교에서는 단 한 개피도 피우지 않는 영민한 아이였다. 대신 아파트 소화전에 담배를 숨겨두고 등교 전, 하교 후에 담배를 피운다고 했다.

담배의 해악과 금연의 이유에 대해 정신없이 쏟아내는 나를 향해, 자신을 남들과 구별해줄 각성의 도구로 담배를 찾아냈다고 답변했다. 나는 순간 할 말을 잃어버렸다. 명모는 졸업할 때까지 가장 많은 상담을 한 학생이었고, 끝내 담배를 끊지는 못했지만, 대신 신학과 철학에 조예가 깊은 아이의 관심사를 공유하는 경험을 했다.

신혜(가명)는 고3이 된 후에도 여전히 게으른 생활 태도를 보인다며 아버지에게 혼나고는 보건실을 찾았다. 아버지에게 혼나서 서러웠든지 눈물을 글썽이다가는, 굳은 결심을 했다며 결연한 의지를 보였다. 뭔가 대단한 결심을 했구나 싶어 내심 기대하고 있었는데, 신혜의 다짐을 듣다가 순간 크게 웃어버릴 뻔했다.

이제는 스스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는 거다. 인생은 어차피 누구나 스스로 살아내야 한다고 했더니, 자기는 지금까지 아버지에게 너무 기대서 살아온 것 같다며 아기 취급하는 아버지로부터의 독립을 위해 당장의 힘듦을 참아내겠단다. 이유야 어찌됐든 독립을 쟁취하겠다니 다행인데, 구체적인 계획은 없이 여전히 스스로 살겠다만 외치고 있는 형국이다.

많은 날에는 하루 100여 명, 적은 날에는 50~60여 명의 아이들이 찾아오는 보건실에서 알파고의 이면에는 크게 놀라면서도, 아이들의 존재에는 왜 탄성을 지르지 못하는지 다시금 반성하게 된다. 하나에서 열까지 단 한 명도 같은 생각, 같은 행동을 하는 아이가 없다. 모두가 새로운 세계이며, 생경한 우주다. 알파고를 향한 관심, 그 반에 반만이라도 날마다 새로워지는 아이들에게 돌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부천자치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알파고, #보건실, #보건교사, #학교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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