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이중섭, 백년의 신화전'이 열리는 덕수궁미술관 입구 및 대형전시홍보물
 '이중섭, 백년의 신화전'이 열리는 덕수궁미술관 입구 및 대형전시홍보물
ⓒ 김형순

관련사진보기


국립현대미술관이 박수근 탄생 100년전은 열지 못했지만 올해 이중섭(1916-56) 탄생 100년을 맞이해선 회고전 형식으로 그의 개인전을 열어 참으로 반갑다. 이번에 60여 개 소장처로부터 대여한 이중섭 작품 200여 점과 자료 100여 점이 선보인다.

이중섭은 '국민화가'로 불리지만 사실 우리는 그에 대해 모른다. 그의 그림을 도판으로 봤지 진본을 본 적은 드물다. 이번에 유화 60여 점 외에 뉴욕 모마(MoMA) 소장품 은지화를 포함해서 엽서화, 편지화, 표지화, 드로잉, 사진 그리고 일본감독 '사카이 아츠코'가 만든 다큐(2014) 등 작품 200여 점, 자료 100여 점 등을 전시해 볼거리가 풍성하다.

제 1전시실 '1부-엽서화' 1916-1950 평원, 평양, 정주, 도쿄, 원산, '2부-사진자료' 1950-1953 서귀포, 부산, 제 2전시실 '3부-은지화' '4부' 1953-1954 통영의 전성기, 제 3전시실 '5부-아내와 주고받은 편지화' '6부' 1954-1955 서울, 제 4전시실 '7부' 1955 대구 '8부' 1956 서울, 정릉 영상, 아카이브, 문학지 표지화 등을 볼 수 있다.

이번 전을 기획한 국립현대미술관 김인혜 학예연구사에게 이번 전시가 지난 이중섭 전시와 차별성이 뭐냐고 물었다.

"기존의 이중섭 연구 성과가 모든 다 반영되었고 그동안 연보 등 잘못된 오류도 바로 잡았고 최초로 공개하는 일본유학시기 자료, 전쟁기 자료, 사진자료 등이 많아 전시의 완성도를 훨씬 높였다."

식민 시대, 모던연애를 하다

이중섭 I '부부' 종이에 유채 40×28cm 1953. 국립현대미술관소장. '마사코'가 가장 좋아하는 이중섭 작품이다.
 이중섭 I '부부' 종이에 유채 40×28cm 1953. 국립현대미술관소장. '마사코'가 가장 좋아하는 이중섭 작품이다.
ⓒ 국립현대미술관

관련사진보기


1916년 평안남도 평원에서 태어난 이중섭은 척박한 일제강점기를 겪었다. 동족상잔의 비참한 전쟁을 겪으며 모친과 형수를 두고 큰 조카와 아내와 두 아들만 데리고 남하할 수밖에 없는 사연 등 그의 시대는 잠시도 이중섭을 마음 편하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우리는 그를 통해 그 어떤 역사책보다 더 리얼하게 한국근대사를 엿볼 수 있다.

그는 초등학교(종로공립보통학교) 시절 당시 발굴된 고구려벽화를 자주 관람하며 영향을 받은 것 같다. 1931년 정주오산학교에서 도화와 영어를 담당한 예일대학 서양화과 출신 임용련과 역시 프랑스에서 공부한 백남순 교사의 지도를 받았다. 이 학교는 김소월, 백석 시인을 선배로 둔 3.1운동 33인 중 하나인 이승훈 선생이 세운 민족 학교였다.

1932년 이중섭 가족은 원산으로 이사해, 원산은 그의 제2의 고향이 된다. 해수욕과 낚시, 음악 감상과 시도 즐겼다. 1936년에는 형의 허락을 받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고 처음엔 '제국미술학교'를 다녔으나 학내 사정이 안 좋아 다시 더 자유로운 '도쿄문화학원(분카가쿠엔)'으로 옮겨 졸업했다. 다시 연구과(고급단계)까지 마치고 1943년 8월 귀국한다. 

여기서 도쿄문화학원에 대해 잠시 설명하면 당시 일본미술계에는 관학파와 재야파가 있었다. 학원이 이런 구분을 벗어나 일본제국주의 성격을 거스르는 '세계시민주의' 경향을 보이자 일본당국은 이 학교를 1943년 폐교시켰고 이 학교 교장인 '니시무라 이사쿠'를 옥에 감금시킨다. 이런 학풍은 이중섭이 보다 창조적 작가가 되는 데 도움이 됐으리라. 

귀국 전 그에게 일어난 대사건은 바로 '야마모토 마사코'라는 일본기업가의 딸과 연애다. 그녀는 문화학원 후배였고 졸업 후 프랑스유학 준비 중이었다. 그때 이중섭은 문화학원을 졸업하고 마사코는 재학 중이었기에 서로 만날 수 없게 되자 1940년 12월부터 그림만으로 된 무언의 프러포즈 엽서를 1년에도 80통이 넘게 몇 년간 꾸준히 보낸다.

그런 와중에 이중섭은 1943년에는 '일본자유미술가협회'가 주최하는 '망월'을 출품해 일본인도 타기 힘들다는 '태양상'을 수상하면서 화가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굳힌다.

다시 '마사코' 이야기로 돌아와, 1945년 4월 도쿄는 태평양전쟁 말기라 미군공습으로 초토화되었다. 그런 와중에도 그녀는 현해탄을 건너는 연락선을 타고 부산에서 이중섭과 만나 원산까지 같이 올라온 뒤 양가 허락을 받고 이중섭과 혼인했으니 대단한 여성이다.

이중섭은 마사코에게 '따뜻한 남쪽에서 온 덕이 많은 여자'라는 의미가 담긴 '남덕(南德)'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는 예술가답게 식민지종주국 일본이라는 국경과 현실의 벽을 넘어선 세기의 사랑을 이룬다. 당시의 통념으론 이루기 힘든 파격적 사건이었다.

그들의 결혼은 행복했지만 같이 산 기간은 겨우 7년도 채 안 된다. 최근 모 일간지에서 부인은 7년을 살고 그 사랑의 추억으로 60년을 버텼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사랑에 대해 한 번도 후회한 적은 없단다. 96세인 이남덕은 지금도 도쿄에 살고 있다. 위 '부부'는 두 사람의 절박한 그리움과 애달픈 사랑을 잘 형상화했다.

민족의 원형을 '소'에서 찾다

이중섭 I '흰소(떠받으려는 소)' 종이에 유채 34.2×53.0cm 1953-1954 개인소장 근접촬영
 이중섭 I '흰소(떠받으려는 소)' 종이에 유채 34.2×53.0cm 1953-1954 개인소장 근접촬영
ⓒ 김형순

관련사진보기


이중섭은 '폴 발레리' 시를 프랑스어로 술술 외웠고 유학기에 배운 야수주의·표현주의나 거친 붓 터치에 익숙한 모던보이였지만 늘 민족정서의 원형을 탐색했다. 그래서 고구려벽화에 나오는 봉황, 청룡을 차용해 이걸 현대화했다. 그게 바로 닭과 소 그림이다. 그의 말처럼 '정직한 화공', '민족의 화가'가 되고자 했다. 한글 서명 또한 용감한 일이었다. 

소 그림은 이중섭의 자화상 혹은 민족의 자화상이라 해도 좋으리라. 소의 퉁방울눈이 이중섭 눈을 닮았다. 그의 소는 농사짓는 소가 아니라 시대의 난고를 초인적 의지를 가지고 이겨내려는 소다. 그가 이런 사투를 벌이며 절규하는 소를 그리지 않았다면 소용돌이 치는 그 시대를 견디지 못했으리라. 또 그의 소 그림은 시대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이중섭의 소는 확실히 오리지널하다. 분노와 격정이 드러나고 여과 없니 뼈를 드려낼 정도로 파워풀하다. 씩씩거리며 콧김을 내뿜고 화가 난 소는 온 세상을 뒤집어엎어 놓을 것 같다. 격렬한 운동감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민족의 순박함 이면에 잠재한 역동성을 잘 구현했다. 그런 그의 소도 이중섭 말기에는 왠지 힘이 좀 빠져 보인다.

이제 다시 1950년 12월 피난이야기를 해보자. 이중섭은 1946년 첫 아들을 디프테리아로 잃었고, 그의 형 중석은 탁월한 청년실업가였으나 그해 반동으로 몰려 죽임을 당했다. 이중섭 그림도 사상 검증에 시달렸다. 그래서 거동이 힘든 칠순 노모와 형수는 원산에 둔 채 이중섭은 아내와 두 아들, 큰조카를 데리고 UN군 수송선을 타고 부산으로 피난했다.

이중섭의 정처 없이 떠도는 험한 인생행로는 그때부터 시작된다. 부산항에 도착해 출입조사를 마치고 겨우 피란증명서를 발급받아 불청객으로 부산 거리를 다닐 수 있게 되었다. 거기서 우연히 김환기와 유영국 등을 만났다.

김환기는 이중섭에 대해 "형(중섭)의 그림을 보면 예술이라는 건 타고난 것 없이는 하기 힘들다는 것이 절실히 느껴진다. 형은 참 용한 것을 가지고 있다. 어떻게 그런 걸 생각해내고 또 그렇게 용한 표현을 하는지 그런 게 정말 개성이요 민족예술인 것 같다. 형은 내가 가장 존경하는 화가로 우리 화단에 일등으로 빛나는 존재이다"라는 글도 남겼다.

이중섭은 부산 판자촌 범일동에 거처를 마련했지만 당장 가족들 끼니를 해결해야 하기에 부둣가에서 막노동도 했다. 이중섭은 몰골이 말이 아니었고 한때 프랑스유학을 꿈꾸던 부잣집 여대생이었던 그의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5살과 3살이던 두 아들 태현과 태성도 날로 여위어갔다. 이중섭은 어쩔 수 없는 부산을 떠나 좀 나은 제주도로 향한다.

벌거벗은 춤 속에 이상향 구현

이중섭 I '사나이와 아이들' 38.5×48cm 1950년대. 근접촬영 분청사기에서 보는 스며듦의 기법도 드러난다
 이중섭 I '사나이와 아이들' 38.5×48cm 1950년대. 근접촬영 분청사기에서 보는 스며듦의 기법도 드러난다
ⓒ 김형순

관련사진보기


이중섭은 이런 시대에 가족의 소중함이 얼마나 큰지 일찍 깨달은 것인가. 그의 그림에 소와 닭만 아니라 가족 그림이 많은 것도 이런 연유일 것이다. 1952년에는 이산가족이 되는 아픔도 겪는다. 그래선지 그의 가족 그림에는 그가 꿈꾸는 유토피아가 담겨 있다.

그는 "인간의 소박한 마음을 떠난 그림은 있을 수 없다"라고 말했지만 그의 가족화를 보면 우선, 어린이 같은 천진성과 해학성이 녹아 있다. 다음으로, 사람과 사물, 자연과 인간의 구분이 없는 친밀한 교감의 절정을 보여준다. 그것도 발가벗은 채로 말이다. 그는 이렇게 인간과 자연의 원초적 교접에서 인간의 해방과 구원을 찾았는지 모른다.

1949년 원산에 살 때 이야기인데 화가 '한묵'은 원산 시절부터 죽는 날까지 이중섭과 절친한 친구 사이다. 원산 시절 그의 집에 우연히 들렀다가 아래와 같은 장면을 목격한다.

"소리 없이 대문 안으로 들어가서 장지 틈으로 보았더니 네 식구 모두 홀딱 벗은 나체로 이불 위에서 뒹굴고, 엄마 아빠의 이불을 아이들이 마구 잡아당길라치면 아빠는 '요놈' 하면서 소처럼 엉금엉금 기어 좁은 방을 돌고, 아이들은 깔깔대었고 중섭의 불알이 덜렁이는 걸 볼 수 있었지. 우리는 그걸 보고 참다 못해 킥킥거리며 후다닥 도망쳐 나왔어."

성(에로티시즘)은 생명 그 자체

이중섭 I '부부' 은지화 1950년대 이중섭 전시포스터 사진
 이중섭 I '부부' 은지화 1950년대 이중섭 전시포스터 사진
ⓒ 김형순

관련사진보기


이중섭에게 '성'은 생명 그 자체였다. 그에게 인간해방은 발가벗은 채 춤을 추는 것에서 시작한다. 거기엔 때 묻지 않은 에로티시즘이 짙게 깔려 있다. 이런 열락의 경지를 우리는 '상락(常樂)'이라고 하는데 '라캉'이 말하는 '주이상스(jouissance)', 이건 고통이 담긴 최고의 쾌락이나 열락을 말하는 것으로 이중섭이 그린 '도원(桃園)'과도 통한다.

그의 에로스는 이렇게 따사로운 살의 접촉에서 시작한다. 태초의 벌거벗은 누드로 돌아가 뽀뽀는 물론이고 얼굴을 수없이 어루만지고 비비는 장면이 많다. 어린이와 물고기가 구분 없다. 가족 뿐만 아니라 닭, 게, 비둘기, 벚꽃, 석류, 달빛이 혼연일체가 되어 함께 춤추는 세상이다. 동양에서 이상향인 무아지경이나 물아일체의 미학도 담겨 있다.

이런 원초적 생명감이 넘치는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그의 유토피아의 근간이 된다. 이런 경향은 여러 작품에서 드러나고 '애정' 등과 같은 은지화에서 강력하게 노출된다.

이중섭 I '물고기와 노는 두 어린이' 종이에 유채 41.8×30.5cm 1950년대 근접촬영
 이중섭 I '물고기와 노는 두 어린이' 종이에 유채 41.8×30.5cm 1950년대 근접촬영
ⓒ 김형순

관련사진보기


프랑스 문필가 '조르주 바타이유'는 "죽음 속에서 삶을 찬양하는 게 에로티시즘의 핵심"이라 했는데 삶에 대한 차원 높은 축제의식을 화폭 속에 그만의 방식으로 시각화했다.

이런 그림이 나온 배경에는 현실의 삶이 너무 참담하고 힘들어서 그랬는지 모른다. 그래서 더더욱 이런 지상낙원을 그린 것 같다. 사기와 횡령, 미움과 질투가 난부하는 세파에서 이런 상상은 조화와 균형과 공존과 평화로움을 꽃 피우기에 더없이 좋은 주제다.

이중섭의 그림을 보면 거미줄처럼 끈으로 끊임없이 이어진 작품이 많다. 우리네 인생은 바로 이런 수많은 인연과 인드라 망으로 이어져 있다는 주제 같다. 그는 이런 긴밀한 연대감이 인류의 평화공존을 위해서 꼭 필요하다고 본 것인가. 이런 네트워킹은 우리가 되찾아야 할 소중한 가치가 아닌가. 그런 면에서 요즘 같은 인터넷 시대를 선점한 셈이다.

은지화, 재료의 독창성으로 현대미술 되다

이중섭 I '두 아이' 은지화 8.8×11.5cm 1950년대 이중섭 전시포스터
 이중섭 I '두 아이' 은지화 8.8×11.5cm 1950년대 이중섭 전시포스터
ⓒ 김형순

관련사진보기


이중섭을 알아가다 보면 그는 열악한 환경에서도 얼마나 열심히 뭔가를 그렸다는 걸 알 수 있다. 식욕이전에 '미욕(美慾)'이라고 할까. 그는 어려서도 사과를 먹기 전에 먼저 그렸단다. 그런 회화 충동이 담배 은박지에도 그림을 그리게 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이 은지화는 현대미술에서 그 재료의 독창성으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독창적인 것이다.

또한 회화, 조각, 판화, 드로잉이 합쳐진 것 같은 은지화는 못이나 송곳으로 긁고 그 위에 물감을 바른 후 닦아내면, 긁힌 부분에만 물감이 배어 평면이면서 입체적 효과를 주는 매력을 발산한다. 또한 칼끝으로 재현한 생생한 선묘가 살갑다. 그는 약 300점의 은지화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번엔 수준 높은 것으로 40여 점을 선보인다.

은지화 전시방에서는 뉴욕 모마 소장품 3점도 볼 수 있다. 1955년 미도파화랑에서 이중섭 전이 열렸을 때 미국인 문정관 '맥타가트'가 구입한 것으로 1956년 모마에서는 만장일치로 이 작품을 소장하기로 결의했단다. 그건 바로 그 독특한 재료 때문이리라. 현대미술에서 재료의 독창성은 최우선 가치가 아닌가.

애틋한 부부애, 울림 주는 편지화

이중섭 I '부인에게 보낸 편지' 종이에 펜, 채색, 26.5×21cm 1954년 11월. 국립현대미술관소장. 편지를 보면 이중섭의 호가 '대향(大鄕)'이고 그의 애칭이 '아고리'이고, 이남덕의 애칭이 '아스파라거스' '발가락'임을 알 수 있다.
 이중섭 I '부인에게 보낸 편지' 종이에 펜, 채색, 26.5×21cm 1954년 11월. 국립현대미술관소장. 편지를 보면 이중섭의 호가 '대향(大鄕)'이고 그의 애칭이 '아고리'이고, 이남덕의 애칭이 '아스파라거스' '발가락'임을 알 수 있다.
ⓒ 국립현대미술관

관련사진보기


부산 피난에 이어 1951년 4월부터 이중섭 가족은 제주도 생활을 시작했다. 제주도에서도 서귀포가 좋다는 말에 그 곳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다행히 지금도 생존하고 있는 김순복 씨가 1.4평짜리 방을 내줘 온 가족이 옹기종기 몸을 누일 수 있었다.

많은 평론가는 이중섭 생애 중 1951년 봄부터 겨울까지를 남루하고 가난했지만 가족과 함께 보낸 가장 풍요롭고 행복한 시절이었다고 평가한다. 이중섭도 "삶은 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운 것 허나 아름답도다('소의 말' 중에서)"라는 시도 남길 정도였다.

그는 피난민증명서를 내고 식량배급신청을 해 양식을 구했지만 이거로 배를 채울 수는 없기에 여기서 게를 많이 잡아먹었단다. 그래서 제주도 그림에는 게 그림이 많다. 하지만 여기에서의 생활도 한계점이 도달했고 그래서 다시 12월에는 부산으로 향한다.

1952년부터 다시 부산생활, 그러나 3월부터 부인은 폐결핵에 걸려 각혈을 했다. 풀과 밀가루를 섞어 만든 죽을 먹으면 아이들은 배탈이 나 얼굴이 누렇게 떴다. 게다가 장인의 죽음 이후 딸인 아내에게도 약간의 유산이 생겨 일본에 가도 어느 정도 생활할 처지가 되자 이중섭은 눈물을 머금고 가족을 일본으로 보낸다.

가족이 떠난 이후 이중섭은 동가식서가숙의 떠돌이 생활을 했다. 1953년부터는 아내와 아이들이 너무 보고 싶어 편지를 많이 보냈다. 처음에는 이제 곧 가족을 만날 것 같은 생각에선지 편지 분위기가 들떠 있었다. 아내뿐만 아니라 두 아들을 각별하게 염려한 이중섭은 글도 모자라 그림까지 곁들이며 그리움의 강도를 실감나게 부각시킨다.

위 일어편지는 1954년 11월 아내에게 보낸 것으로 그 중 일부를 여기에 옮겨본다.

"끝없이 훌륭하고, 끝없이 다정하고, 나만의 아름답고 상냥한 천사여 […]  더욱 힘을 내서 더욱 더 건강하게 지내줘요. 화공 이중섭은 반드시 가장 사랑하는 현처 남덕씨를 행복한 천사로 하여 드높고 아름다운 끝없이 넓게 이 세상에 돋을새김을 보이겠어요, 난 자신만만, 자신만만 […] 내 사랑하는 아내 남덕 천사 만세, 만세"

아내와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절절 배인 그의 편지에는 애틋한 부부애, 뜨거운 가족애가 곳곳에 묻어있다. 때로 편지지 가장자리 사방팔방에 '뽀뽀'라는 말을 써 붙이는 것 또한 터치의 열락에 갈급한 사랑을 찾는 낭만주의자 이중섭식 방식인가. 뽀뽀를 합치고 또 합치면 우주만물도 돌릴 수 있는 무한정의 힘이 생길 거라는 바람으로 쓴 것 같다.

통영 전성기, 우정으로 지옥탈출

이중섭 I '욕지도 풍경(통영앞바다)' 종이에 유채 39.6×27.8cm 1953. 개인소장
 이중섭 I '욕지도 풍경(통영앞바다)' 종이에 유채 39.6×27.8cm 1953. 개인소장
ⓒ 김형순

관련사진보기


궁핍한 이중섭의 사정을 잘 아는 아내는 남편 모르게 해운공사에 다니는 오산학교 후배에게 일본서적을 외상으로 사 주고 그걸 팔아 이윤이 나면 그중 일부는 그가 갖고 일부는 남편에게 준다고 약속을 받았다.

하지만 그 후배는 사기를 쳐 이중섭과 부인에게 심적 물적 타격을 준다. 이중섭은 나중에 이를 알고 아내가 진 빚을 갚으려 큰 전시를 기획한다.

이중섭은 사기와 모함뿐만 아니라 6.25때 남보다 늦게 월남을 했다며 빨갱이로 몰리는 모욕을 당하기도 했다. 아내가 떠난 후 경제난과 외로움 등으로 지옥 같은 나날을 보내면서도 열심히 그림을 제작하며 나름 천국의 시간을 확보하려 했다.

그런데 그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건 바로 그의 우정철학과 남다른 휴먼네트워크가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문인과 화가 등이 그를 도왔다. 대표적 인물로는 호형호제하며 그를 돌봐준 구상 시인과 동향인 한묵 화가 등을 들 수 있다. 구상은 부인이 의사라 경제적 여유가 좀 있었다. 그밖에도 시인인 김광균과 김광림, 소설가인 최태웅 등 많았다.

아내 남덕이 이중섭을 홀로 두고 일본에 간 것도 그가 따뜻한 성품의 소유자인데다 성격과 인품이 좋고, 덕과 의리가 있어 인기가 높았으며 주변에 그를 도와주려는 사람이 많았기에 그들이 그를 돌봐 주리라는 믿음이 어느 정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모성편집증이 심한 이중섭이 조금씩 정신분열증을 보이기 시작했다고 보는 의견도 있다. 이중섭은 북에 어머니를 두고 온 형편에 어머니 같은 아내마저 일본으로 떠나자 그런 증상이 심해졌다는 것이다.

이중섭은 가족을 너무나 그리워하는 와중에 가족이 한국을 떠난 지 1년 만인 1953년 7월에 항만청장과 몇몇 지인의 도움으로 선원증을 입수해 화물선을 타고 고베와 오사카를 거쳐 도쿄로 간다. 일본에 도착했으나 초라한 행색에 장모는 그를 문전박대했고 남에게 빚지고 못 사는 성미와 게다가 일본에 정착해 돈 벌 자신이 없자 귀국한다.

일본에서 부산으로 돌아온 이중섭을 보고 친구들은 놀랐다. 마음을 달래주려고 1954년 6월 이중섭처럼 남하한 함경도 출신 공예예술가 '유강렬'의 주선으로 통영 '나전칠기전습소'에 강사 자리를 만든다. 생활이 좀 안정되자 '한반도의 나폴리'라 불리는 통영의 멋진 풍경을 유화로 많이 남겼다. 그리고 이때 그의 대표작 '흰 소'도 나온다.

사실 통영은 많은 예술가 예컨대 '전혁림, 김춘수, 김상옥, 유치진, 윤이상' 등을 배출한 곳이다. 이중섭은 가족과 떨어져 있었지만 나름 그의 르네상스기를 맞을 수 있었다.

1955년 미도파 전시와 말기 정릉시대

이중섭 I '정릉풍경' 종이에 연필, 크레파스에 유채, 1956. 개인소장. 근접촬영. 분위기가 왠지 처연하다
 이중섭 I '정릉풍경' 종이에 연필, 크레파스에 유채, 1956. 개인소장. 근접촬영. 분위기가 왠지 처연하다
ⓒ 김형순

관련사진보기


이제 그는 개인전을 통해 자신의 화력을 빛내고 아내의 빚을 갚을 기회가 온다고 기대했다. 마침내 1955년 1월 18일부터 2월 7일까지 '미도파화랑'에서 유화 41점, 은지화 10여 점 등을 선보이며 첫 전시가 열린다. 대성황이었으나 봉황을 그린 그림은 당국에 의해 이름이 바뀌었고 은지화 50여 점은 외설스럽다 하여 경찰에 의해 강제 철거되었다.

작품 중 20여 점이 팔리긴 했으나 수금이 안 돼 아내 빚도 못 갚고 외상 술값만 남게 되었다. 같은 해 4월 시인 구상의 도움으로 대구 미국공보원에서 다시 전시를 열었으나 실패한다. 그 후 그는 가장 역할도 못한다면서 공밥만 얻어먹고 무슨 대단한 예술가가 될 것처럼 세상을 속인다고 자책하며, 거식증을 동반한 정신질환에 시달렸다.

이중섭은 뇌 문제가 좀 있었다. 그 사연은 이렇다. 1945년 미군정 때 헌병에게 뭇매를 맞는 사람을 말리다 방망이로 맞아 머리가 터졌고, 1950년 아이를 때리는 군인을 막다가 개머리판에 머리를 심하게 다쳤다. 그가 병이 있었다면 정신질환이 아니라 뇌질환이리라.

낙관적인 그도 가족과 생이별, 금전압박, 영양실조로 심신이 지쳤고 급성간염 등으로 대구근처 왜관에 살던 구상 집에서 요양도 했다. 그때 나온 작품이 바로 '시인 구상의 가족'이다. 이중섭은 두 아들에게 자전거를 사 주겠다고 약속을 했건만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한 안쓰러움과 구상네 아이들이 자전거 타는 걸 부러워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육군병원, 성베드로 병원 등을 전전하던 이중섭은 1955년 12월경부터 정릉에서 한묵과 소설가 박연희, 시인 조영암 등과 동숙한다. 급성간염에 거식증까지 더해지면서 건강이 급속하게 악화된다. 여전히 그가 살았던 정릉풍경을 그렸고 '돌아오지 않는 강' 연작 등도 발표했지만 결국 서대문적십자병원에서 1956년 9월 6일 무연고자로 생을 마감한다.

숨을 거둔 3일 뒤 이 사실을 안 초등학교 때부터 도쿄문화학원까지 동창인 '김병기'와 그를 돕던 '김광균, 구상, 박고석, 한묵, 황염수' 등의 도움으로 장례가 치러진다. 화장한 뼈 일부는 망우리 공동묘지에, 일부는 일본부인에게 전해져 그녀 집 뜰에 모셔졌다.

그는 사라졌나. 아니다. 미술평론가 최열의 <이중섭평전> 서문에서 "전쟁으로 상처받은 이에게 필요한 건 황폐한 시절을 견뎌낼 만큼의 순결한 영혼이었고, 이중섭은 폭발하는 천재이자 맑은 영혼의 모습으로 부활했다"고 말했는데 그는 정말 죽어서 신화가 되었다.

ⓒ 김형순

덧붙이는 글 | [전시정보] http://www.jungseob.com/ 화·목·금·일: 오후 7시까지 수·토: 오후 9시 전시설명: 오전 11시, 오후5시(주중, 주말 동일) 성인 7000원 초중고 4000원 [참고도서] 최열, 오광수, 고정일, 김영진, 양억관 등이 저술하거나 번역한 이중섭 편지 및 평전



태그:#이중섭, #소 그림, #은지화 , #엽서화/편지화, #한묵과 구상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5,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문화 중 현대미술을 대중과 다양하게 접촉시키려는 매치메이커. 현대미술과 관련된 전시나 뉴스 취재. 최근에는 백남준 작품세계를 주로 다룬다

공연소식, 문화계 동향, 서평, 영화 이야기 등 문화 위주 글 씀.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