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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가운데 최고령이었던 이순덕 할머니가 4일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 글은 지난 2007년 고 이순덕 할머니를 직접 찾아 뵙고 인터뷰한 내용으로, 이국언 <빼앗긴 청춘 돌아오지 않는 원혼>(시민의 소리, 2007)에 소개된 내용을 바탕으로 재작성했음을 알립니다. - 기자 말

빈소에 마련된 고 이순덕 할머니 영정 사진
 빈소에 마련된 고 이순덕 할머니 영정 사진
ⓒ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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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가운데 최고령이었던 이순덕 할머니가 4일 끝내 일본정부의 사죄를 받지 못한 채 한 많은 삶과 이별했다. 향년 100세. 1918년 전라북도 익산 모현에서 태어난 할머니는 작고하시기 전까지 생존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중 최고령이었다.

평생 고단한 삶이었다. 어릴 적 기억이라고는 단칸방 초가집 한 채에 소작지 하나 없는 가난한 살림뿐. 남의 집 삯일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야 했던 시절, 감히 학교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하루는 어머니가 길쌈을 해 시장에 내다 팔고 오는 길에 장에서 공책하고 연필을 사다 주더라고. 그런데 아버지는 여식을 가르쳐 놓으면 나중에 시집가서 친정에 편지한다고 연필을 바로 분질러 버리더라고. 공책은 부엌에서 불 질러 버리고. 그래서 완전 까막눈이었지."

집안일을 돕고 있던 1937년 봄 어느 날이었다. 열아홉 살 때였다. 가난한 농촌에 먹을 것이 없는 농민들은 할 수 없이 쑥을 뜯어다 보리밥에 섞어 허기를 때우고 있었다. 그 해는 또 유난히 흉년이기도 했다.

"저녁이라도 준비한다고 혼자 논두렁에서 쑥을 캐고 있는데, 30, 40대 가량 보이는 남자가 오더니 이런 고생하지 말고 배불리 먹을 것도 주고 좋은 신발도 주는 곳을 알아봐 준다고 자기만 따라오라는 거야."

된장국에 밥 한 끼 어디서 얻어먹으면 그나마 다행인 시절, 배불리 먹을 데가 있다는 그 한마디는 그 무엇보다도 강렬한 유혹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따라나서고 만 것이다.

안면부지의 남자를 따라 철길을 따라 걸어가던 중 그녀는 문득 어머니 생각이 났다. 어머니, 아버지를 뵙고 인사라도 드려야 할 것 같았다.

"집에 잠깐 들렀다 가겠다고 그랬지. 그런데 여기까지 왔는데 안 된다는 거야. 그러더니 시간이 없다면서 덥석 손목을 틀어잡더라고."

순간 깜짝 놀라고 당황해 했다. 손목으로 전해 오는 힘은 완강했다.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면서 울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그 사내는 그의 뺨을 후려 갈기더니 강압적으로 길을 재촉했다. 태도도 이전과는 180° 바뀌어 있었다.

익산 읍의 여관까지는 한 시간 반쯤 걸음이었다. 여관에 도착하니 이미 14, 15명의 처녀들이 도착해 있었다. 모두 그녀와 같은 처지의 농민의 딸들이었다. 같이 저녁을 먹고 한 방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두려움에 밤새 잠 한 숨 잘 수 없었다. 모두 무엇 때문에 어디로 끌려가는지 모르고 밤새도록 울기만 했다. 그러나 방문 바깥은 이미 자물쇠로 잠겨있어 도망 갈 수도 없었다.

트럭을 타고 이동 중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
 트럭을 타고 이동 중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
ⓒ 독립기념관 '잃어버린 청춘 떠도는 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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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 카키색 군복을 입고 다리에는 각반을 찬 일본군 3명이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허리에는 총을 두르고 있었다. 이어 이들의 지시에 의해 행선지도 모르고 기차에 올라탔다.

기차에서 이틀 밤을 보내고 도착한 곳은 중국 상해(上海)역이었다. 식사를 마치자 곧바로 트럭 한대에 태워졌다. 3시간 정도 달려간 곳은 한 일본 육군의 주둔지였다. 군용텐트와 병사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여자라고는 없었다. 이어 인솔자들은 여기 저기 서 있는 오두막 같은 곳에 끌고 온 처녀들을 한 사람씩을 따로 따로 떼어 들여보내고 있었다.

오두막은 다다미 2, 3장 쯤 넓이로 침대 형식의 잠자리는 낙엽 위에 대나무로 엮을 깔개가 마련돼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국방색의 모포가 깔려 있었다. 전시 중 야전에 마련된 임시 거처인 셈이라 비 단속도 허술할 수밖에 없었다. 비만 오면 빗물이 안으로 새어 들어왔다.

사흘간은 아무것도 없이 오두막에서 쉬고 있었다. 군복과 같은 색의 상의와 몸뻬를 지급받았다. 그 사이 혈액검사와 606호라 불리는 주사를 맞았다. 그때만 해도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지 못했다.

같은 처지의 조선 처녀들끼리는 서로 얼굴도 볼 수 없었다. 각자 떨어져 있었고, 식사는 군인이 오두막 앞에 가져다 놓고 문 밖에서 종을 울려 표시를 했다. 그러면 각자 식사를 챙겨 안으로 가지고 들어가 먹는 것이었다.

4일째인 어느 날. 군복에 별이 3개가 붙어있던 '미야자키' 또는 '미야자와'라는 이름의 노 장교가 오두막에 들어왔다. 그리고 겁에 질려 있는 그녀에게 잠자리를 강요했다. 부대에서 제일 직급이 높아 보이는 그 장교는 그로부터 사흘 밤 매일 오두막을 찾았다. 그는 토요일에는 자기가 올 것이기 때문에 다른 병사를 상대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미야자와가 돌아간 다음날부터 오두막에는 병사들이 행렬이 이어졌다. 저항이란 있을 수 없었다. 일어나면 때리고 다시 일어나면 발길이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일본군 위안소 앞에서 차례를 기다리며 줄선 일본군 병사들
 일본군 위안소 앞에서 차례를 기다리며 줄선 일본군 병사들
ⓒ 독립기념관 '잃어버린 청춘 떠도는 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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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전선 병참사령부 위안소 게시판에 적힌 위안소 이용 주의사항
 중국전선 병참사령부 위안소 게시판에 적힌 위안소 이용 주의사항
ⓒ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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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죽이기를 파리 죽이는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취급했어. 한번은 어떤 놈이 술을 처먹고 와서 갑자기 같이 있던 어떤 친구의 목을 내리쳐 버렸어. 그 자리에서 목이 떨어져 나가더라고. 피가 얼마나 솟구치던지, 아휴~ 끔찍해.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지. 말도 못해 그 놈들."

평일에는 8, 9명, 일요일에는 15, 16명의 병사를 상대해야 했다. 평일에는 아침 9시부터, 일요일은 그보다 이른 아침 7시나 8시경부터 병사들이 몰려왔다. 심지어 생리기간에도 남자를 상대해야 했다.

606호라는 주사는 2주에 한 번씩 맞는 것 외에 검진은 따로 없었다. 당시에도 '샤크'라 불리던 일종의 콘돔기구가 지급되고 있었지만 모든 병사들이 이것을 착용한 것은 아니었다.

"친구들을 전혀 만날 수 없었지. 군인들이 항상 문 밖에서 지키고 있었으니까. 우리들끼리 만나면 어디 도망가자고 모의할까봐, 식당에서 만나도 얘기도 못 붙이게 했어. 얘기 하다 걸리면 맞아 죽다시피 했지. 가막소도 그런 가막소가 없었어."

처음에는 일본 말을 못한다고 맞기도 많이 맞았다. 1년쯤이 지나자 어느 정도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해방 한두 달 전 어느 날이었다. 한 장교가 들어오더니 왜 자기 이외에 딴 남자랑 잤느냐며 군화발로 배를 걷어찼다. 그리고 갑자기 긴 칼을 꺼내더니 그녀의 등을 그대로 내리쳤다. 그 자리에서 졸도해 버렸다. 다시 정신을 차려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바닥이 흥건하게 피에 젖어 있었다.

"아마 머리를 바로 내리쳤다면 나도 그 자리에서 죽었을 거야. 그런 놈들은 내가 뜯어 먹어도 시원치 않아. 징그러운 놈들."

양쪽 가슴과 엉덩이에는 그때의 상처가 또렷이 남아있었다. 해방 후 고향에 돌아와서까지도 한동안 치료를 해야 했다.

중국과 미얀마 국경지대 구덩이에 버려진 사체들. 이들 대부분이 한국에서 동원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로 기록되어 있다.
 중국과 미얀마 국경지대 구덩이에 버려진 사체들. 이들 대부분이 한국에서 동원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로 기록되어 있다.
ⓒ 독립기념관 '잃어버린 청춘 떠도는 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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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어느 날이었다. 오두막 뒷길에 조선인들이 몰려왔다. 그리고 드디어 해방이라며 환성을 올리고는 어서 가자고 일러줬다. 그러고 보니 일본 병사들은 어느새 사라진 뒤였다.

"다 돌아온 것도 아니야. 해방이 됐어도 아파서 꼼짝도 못하고 누워 있는 사람도 있었어. 내가 같이 가자고 해도 자기는 도저히 못 일어나겠다는 거야. 나보고 먼저 가라고 하더라고. 참 불쌍한 사람이었는데."

조선인들을 따라 지붕도 없는 화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며칠 만에 고향에 돌아왔다.

"집 문 앞에 들어서면서 '어머니' 하고 불렀더니, 어머니는 안 보이고 이모가 뛰어 나오더라고. 내가 없어진 후 찾아 헤매다 화병에 부모님 모두 다 돌아가셨다는 거야. '너 때문에 죽었다'고 그러더라고."

산소에 올라가 몇날 며칠 '어머니'를 불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몇 년 만에 다시 만난 남동생마저 이내 얼마 지나지 않아 죽고 말았다.

1년여 후 주위의 소개로 17살이나 많은 김제의 한 남자의 후처가 되었다. 애가 없었지만 남편은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런 생활도 그리 오래 가지는 못했다. 8년여 후 남편이 병사한 뒤 결국 아무것도 손에 쥐지 못한 채 그 집을 나와야 했다.

두 번째 만난 사람은 광주 사람이었다. 이번에도 사별한 남자의 후처였다. 광주시 서구 쌍촌동에서 그런대로 알뜰살뜰 살아가고 있었지만 종내 애는 생기지 않았다. 고심 끝에 산부인과를 찾아갔지만 애를 갖기는 어렵다는 대답이었다. 의사는 과거에 무슨 무리한 일이 없었느냐고 물었다.

첫 번째 남편이나 재혼한 두 번째의 남편에게는 자신의 과거를 끝내 말하지 못했다. 두 번째의 남편과도 사별한 할머니는 이내 가족도 자식도 없이 혼자가 되고 말았다.

1994년 3월 14일 관부재판 첫번째 당사자 본인 신문을 위해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법원으로 향하는 원고들. 왼쪽 두번째가 고 이순덕할머니.
 1994년 3월 14일 관부재판 첫번째 당사자 본인 신문을 위해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법원으로 향하는 원고들. 왼쪽 두번째가 고 이순덕할머니.
ⓒ 태평양전쟁희생자광주유족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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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말수도 없이 한없이 조용한 모습이었지만, 꼭 그런 면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할머니는 1992년 12월 당시 태평양전쟁희생자광주유족회의 도움을 받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3명, 나고야 미쓰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7명 등 도합 10명의 원고들과 함께 시모노세키 지방재판소에 일본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바 있다. 어느 해 증인심문 참석차 일본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당시 일본정부는 정부의 사과대신, 일종의 국민기금 형태로 위안부 문제를 마무리 지으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일본의 취재기자들이 할머니에게 어떻게 생각하느냐며 의향을 물어왔다. 

"내가 거지인 줄 아느냐. 여기저기서 돈을 모아서 주게. 일본정부가 정식으로 사죄하면서 주면 모를까, 나는 그런 식의 돈은 받을 수 없다."

취재기자들의 간담까지 서슬 퍼렇게 만든 할머니의 단호한 대답이었다. 관부재판은 일본정부를 상대로 한 소송에서 1심에서 처음으로 30만엔의 배상 판결을 거뒀으나, 이어 2001년 히로시마 고등재판소에 뒤집어진 뒤, 2003년 최고재판소에서도 기각판결을 내림으로서 12년에 걸친 노력에도 불구하고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광주에서 혼자 의지할 데 없이 살아오던 할머니는 그 뒤 서울에 올라가 최근까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쉼터 '평화의 우리집'에서 병마와 다투며 그의 마지막 여생을 보내왔다. 

"말 못하고 지금까지 숨기고 살았지. 부끄러워서 지금도 말 못해."

100세를 일기로 끝내 고단한 삶을 내려 놓은 이순덕 할머니. 이 할머니의 별세로, 정부에 등록된 일본군 '위안부' 생존 피해자는 38명으로 줄었다.


태그:#일본군 위안부, #이순덕할머니, #관부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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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이사장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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