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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택시운전사> 스틸컷
 영화 <택시운전사> 스틸컷
ⓒ 쇼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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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운전사가 제목이 좋은가? 1995년쯤으로 기억하는데 프랑스 파리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홍세화씨가 펴낸 책이 <파리의 택시운전사>였다. 독특한 경험담이기도 했고, 낯선 프랑스 문화가 호소력이 있었던지 이 책은 당시 히트를 쳤다.

그러더니 올해는 영화 <택시운전사>가 흥행이다. 1천만 관객을 훌쩍 넘었다. 우리나라 세대수가 2100만 정도 되니 두 집 꼴로 한 집은 이 영화를 본 셈이다.

무엇이 사람들을 당겼던 것일까?

어떤 사람들은 송강호라는 인기 있는 배우의 뛰어난 연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 어떤 사람은 80년 5월 시민과 계엄군의 전투라는 드라마틱한 배경이라고도 했다. 그보다는 적었지만 위르겐 힌츠페터라는 독일 기자의 목숨을 건 보도라는 독특한 이야기 때문으로 평하기도 했다. 박근혜 정권이 물러난 후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시대적 배경도 한몫했지 않을까라는 의견도 있다.

다 일리가 있는 이야기다. 그리고 <택시운전사>의 폭발적 흥행은 이들 요소의 폭발적 결합에 있지 않았을까.

이 영화의 스토리를 미리 알고 있는 나는 별로 큰 기대하지 않고 개봉하는 첫날 윤상원기념사업회 회원들과 함께 영화를 감상했다. 그런데 영화를 보다 여러 차례 눈물이 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내가 고등학교 3학년의 눈으로 현장에서 보았던 거리와 자동차와 사람들의 모습들이 오버랩되었다. 영화의 앵글은 푸른 눈의 목격자와 택시운전사에서 점차 광주에서 계엄군에 맞서는 시민들로 옮겨졌고 그들의 말과 그들의 외침 그들의 투쟁은 바로 나의 말과 외침과 투쟁으로 감정이입되어 내 가슴을 미어지고 울컥거리게 만들었다.

일부 설정이 드라마틱하게 변했다고 느꼈지만 참 잘 만든 영화에 잠시 넋이 나갔다가 밖에 나가니 같이 왔던 동료들의 눈시울들도 붉어졌던 것 같다. 기대 이상의 영화에서 대박의 예감을 느꼈다.

그러나 나는 이 영화에 대해 평소와 달리 페이스북이나 SNS에 올리지 않았다. 어느 칼럼란에 한번 써서 영화 홍보라도 해줄까 하다가 그만두고 말았다.

아무리 5․18 광주항쟁이라는 역사성을 다룬 영화라지만 상업성을 띤 영화였고, 그간 어려운 조건에서 광주 영화를 만들다 성공하지 못한 사례도 많았기 때문에 두고 보는 것이 그냥 마음에 편했다.

이 영화의 모티브가 된 푸른 눈의 목격자로 불리는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의 글이 사실 나와 우리 모임과 관계되어 있어 그냥 말하기 어려운 점도 있었다.

다행히 <택시운전사>는 관객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그리고 단박에 5․18 이슈는 다시 전면에 부각되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5월 18일 광주 망월동 국립묘지에서 개최된 추도식에서 5․18 진실규명과 5.18 정신 헌법전문 반영 의지를 밝히며 참으로 감동적인 연설을 했다. 5․18 역사에서 새로운 이정표가 되었던 이 행사는 바로 <택시운전사>로 옮겨 붙더니 영화 흥행에 힘입어 최근 계엄군의 헬기 기총사격 사실이 드러나게 되고, 국민들을 깜짝 놀라게 한 전투기 조종사의 전투기 폭격대기 출격명령이라는 폭로가 나타나기에 이르렀다.

광주시민들조차도 놀랐다. 아니 총만 나온 것이 아니고 전투기 폭격까지 하려했단 말인가. 전율할 노릇이었다. 광주 밖 국민들의 반응도 뜨거웠다. 그간 소문대로 사실이었구나. 광주의 진실이 바로 이런 것이었구나.

지난 1996년 전두환 노태우가 5․18 특별법에 의해 처벌을 받았지만 사면되고 나서 광주의 진실은 국민들의 머리에서 사라져갔다. 그리고 항쟁 이후 37년이 지났다. 세월도 많이 지났고, 세대도 크게 바뀌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그 까마득한 과거 역사에 대해 관심이 있을리 만무했다.

그런데 <택시운전사>가 갑자기 다가왔다. 전국에 걸쳐 남녀노소의 많은 사람들이 관람하면서 잊혔던 광주의 역사와 광주의 진실을 국민들을 깨닫고 있는 중이다.

전두환은 세상이 변하는 것을 몰랐다. 지난 9년여의 이명박 박근혜 보수정권이 이 나라의 역사를 왜곡하자 이 통에 진실을 덮어버리자고 회고록을 냈을 것이다. 자신은 광주학살에 대해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것이다.

참으로 후안무치하고 악독스러운 자가 아닐 수 없다. 자국민 수백명을 학살하고 수천명을 부상케한 자가 평생을 뼈를 깎고 반성해도 부족할 판에 회고록을 내서 다시 거짓말을 하다니!

그러나 그가 걸어 나오려 했던 광명한 세상의 입구는 다시 지옥의 입구가 되고 마는 것 같다. 역사에 무지하고 국민을 만만하게 본 악귀가 스스로 무덤을 판 일이다.

<택시운전사>는 그래서 더욱 의미 깊다. 잊히고 있는 것을 다시 기억의 공간으로 불러 들여 과거를 돌이켜 보게 해서 우리의 미래에 다시는 이런 일이 재발되거나 반복되지 않게 하는 경고를 주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택시운전사>를 보며 금세 또 다시 나타날 여러 가지의 진실의 스토리들을 생각해 본다. 왜냐하면 5․18의 목격자는 힌츠페터 기자 말고도 우리가 벌인 작업에도 여러 사람이 있었으니까 말이다.

시계를 20년 전으로 돌려 본다.

서울 한복판에서 열린 출판기념회

<5.18 특파원 리포트> 표지
 <5.18 특파원 리포트> 표지
ⓒ 풀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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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5월 16일 오후 6시 30분, 서울 프레스센터 19층 기자회견장에서 한국기자협회 무등일보사 시민연대모임이 주최하고 5․18민중항쟁 17주년 행사위원회가 후원한 5․18기자클럽결성 및 5․18 특파원 리포트 출판기념회가 열린다.

그 때 초청장은 아래와 같았다.

5.18 기자클럽 결성 및 5.18 특파원 리포트 출판기념회 초청장(招請狀)

주최 : 한국기자협회 무등일보사 시민연대모임
후원 : 5. 18 민중항쟁 17주년 행사위원회
일시 : 1997년 5월 16일(금) 오후 6시 30분
장소 : 한국프레스센타 19층 기자회견장

5.18 특파원 리포트 필자

외신특파원
BRADLEY MARTIN(당시 Boltimore Sun, 미국)
GEBHARD HIELSCHER(당시 SudDeutsche Zeitung, 독일)
HENRY SCOTT STOKES(당시 The New York Times, 미국)
JURGEN HINZPETER(당시 NDR. ADR TV, 독일)
NORMAN THORPE(당시 The Asian Wall Street Journal, 미국)
SAM JAMESON(당시 The Los Angeles Times, 미국)
TERRY ANDERSON(당시 AP통신. 미국)
松永成太郞(마쓰나가 세이타로. 당시 요미우리신문, 일본)
심재훈(당시 The New York Times, 한국)

국내특파원
김대중(당시 조선일보 사회부장) 김양우(당시 국제신문 기자)
김충근(당시 동아일보 기자) 류종환(당시 부산일보 기자)
서청원(당시 조선일보 기자) 오효진(당시 MBC 기자)
장재열(당시 중앙일보 기자) 조성호(당시 한국일보 기자)
황종건(당시 동아일보 사진부 기자)

모 시 는 글

대법원의 판결과 국가기념일 제정으로 5.18에 대한 정당한 역사적 평가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아직 완전한 진실이 밝혀지지 않았고, 그 인식은 전국화 국제화되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를 아쉬워
하면서, 5.18정신이 한국민주화운동의 큰 줄기이자 영원한 밑거름으로 남겨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 간절한 바램을 모아 또 하나의 진실을 증언합니다. 5.18 당시 광주 현지를 취재했던 17명의 외신기자들과 국내 기자들의 취재기를 17년만에 공개합니다. 감히 진실의 증언이며, 양심의 고백이자 역사
의 평가가 되리라 믿습니다. 또 5.18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 당시를 취재했던 기자들로 5.18 기자클럽을 결성하기로 했습니다.

이에 국내 국외의 각계 제현들을 모셔서 5.18 기자클럽 결성 및 출판기념회를 개최코자 하오니 부디 참석하시어 자리를 빛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1997년 5월

◆초청인 한 국 기 자 협 회 회 장 남영진
무 등 일 보 사 회 장 이상하
시 민 연 대 모 임 공동대표 윤장현 박만규 정웅태

⊙연락처: 한국기자협회 ☎(02)734-9321 광주사무국 ☎(062)521-8811

식 순

- 1 부(5.18 기자클럽 결성식) -
* 발기인 대표 인사말
* 경과보고
* 창립선언문 낭독
* 사업계획 발표
* 광고
* 폐회

- 2 부 (출판 기념식) -
* 초청자 인사 및 내빈소개
* 개회
* 국민의례
* 축사
* 경과보고
* 서평
* 필자 소개
* 꽃다발 증정
* 필자 인사
* 광고
* 폐회

광주에서 활동하는 단체가 서울 한복판에서 출판기념회를 하니 행사가 쉽지 않은 일이었으나 5․18 이후 17년이나 되어 중견 언론인들이나 정치인들이 된 내외신 특파원 필자들의 무게가 컸다.  5․18의 새로운 증언이라는 점에서도 이 날 행사는 주목을 받아 많은 주요 내빈들이 참석했다.

이 날 당연하게도 주목을 끌었던 것은 외신 특파원들이었는데 그 중에서 내 기억으로는 쥬트 도이췌 짜이퉁지의 게브하르트 힐셔 기자가 회장 자격으로 인사말을 했던 것 같다. 물론 그 자리에 <택시운전사>의 주인공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가 선한 얼굴을 지은 채 함께했었다.

서울에서 성공적인 행사를 치르고 난 내외신 기자들은 다음 날 다시 광주로 내려와 망월동 5.18 묘지 참배를 마친 뒤 광주 무등일보사 강당에서 광주출판기념회를 치르며 광주사람들의 큰 환영을 받았다.

그럼 이 행사는 누가 왜 어떻게 준비를 했던 것일까?

당시 광주에는 5․18 유족회, 부상자회, 구속자회와 5․18기념재단 등 이른바 5․18 당사자단체가 여러 개 있었고, 해마다 5월이 오면 광주의 민중단체 시민단체 학생 등 모든 단체들이 모여 5․18 기념행사 추진위원회를 만들어 기념행사를 치르고 있었다.

그 중 5․18 정신을 국제화시켜 거꾸로 지역감정 지역분열에 의해 폐쇄된 국내에 영향을 미쳐 전국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일군의 운동 그룹이 있었으니 그것이 '시민연대모임'이었다.

이 모임은 원래 1994년부터 '5월성역화를 위한 시민연대모임'으로부터 시작해 매년 해외인사를 초청해 5․18 국제심포지움을 연데 이어 1996년에는 변경된 명칭의 '시민연대모임(Kwangju Citizen's Solidarity)'으로 16개국의 인권 민주화운동가들을 광주로 초청해 1주일간 '인권과 평화를 위한 국제청년캠프'를 개최했다. 이 행사는 광주 5․18의 세계화에 큰 이정표가 되어 이후 광주세계인권선언을 이끌어냈다.

시민연대모임은 이 행사에 이어 5․18 정신의 국제화 세계화를 위하여 미완의 진실규명작업을 내외신 기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모아 책으로 내기로 하고 1996년 연말부터 이 일을 기획 추진했다.

당시 시민연대모임은 현재 광주광역시장인 윤장현 공동대표를 중심으로 박만규 전남대 교수와 작고한 정웅태 변호사 세 명이 공동대표로 이 일을 이끌었고, 광주 오피니언 리더들인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운영위원으로 참여하고 있었으며 나는 이 모임의 사무국장을 맡고 있었다.

쉽지 않았던 <5.18 특파원 리포트> 구상

5·18 취재 당시의 위르겐 힌츠페터와, 배우 토마스 크레취만이 연기한 영화 <택시 운전사> 속 힌츠페터.
 5·18 취재 당시의 위르겐 힌츠페터와, 배우 토마스 크레취만이 연기한 영화 <택시 운전사> 속 힌츠페터.
ⓒ 위르겐 힌츠페터/쇼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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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특파원 리포트> 구상은 특별한 것이었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우선 출판비와 행사비부터 마련해야 했다. 회원들의 십시일반도 있었지만 주로는 사비인지 후원금인지 알수는 없지만 윤장현 대표가 총 소요경비 4천만 원 중 상당액을 마련했고, 나머지 부족분은 5․18 민중항쟁 17주년 기념행사위원회가 후원했다.

필진을 구성하고 섭외해 원고를 번역하고 편집해 출판하는 일은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당시 5․18 특파원으로 참여한 기자를 수소문해보니 20명 정도 되었고 그 중 외신 9명과 국내기자 9명을 선정하게 됐다. 국내 기자들 선정과 섭외는 당시 무등일보 편집국장이면서 시민연대모임 운영위원이었던 김성씨가 맡았다.

외신이 문제였는데 미국에서 오랫동안 한국 민주화운동을 돕다다 한국에 와 광주에 거주하면서 전년도에 시민연대모임의 국제청년캠프를 도왔던 서유진씨가 잘 알고 지내던 볼티모어 썬지의 브래들리 마틴 기자, 뉴욕타임즈 한국특파원이었던 심재훈씨와 연결해 외신특파원들과 연락을 취했다.

외신기자들과 교류해왔던 심재훈씨가 없었다면 외신특파원들과의 연결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시민연대모임의 국제연대사업을 담당했던 운영위원은 이재의씨였는데 그는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의 공동저자이기도 해 외신원고들을 정리하는 일을 했을 뿐만 아니라 책의 말미에 5․18 항쟁 일지를 정리하기도 했다.

당시 외신 기자들에게 원고청탁서를 보냈는데 그때가 2월 20일 경이었다. 다음은 그중 테리 앤더슨 기자에게 보낸 원고청탁 편지인데 이런 식으로 각 특파원들에게 보냈다.

Mr. Terry Anderson
Fax 914-793-7550

Feb. 20, 1996
Dear Mr. Anderson,

Kwangju Citizens' Solidarity, a human rights activist organization established in 1994, is putting together a publication on the Kwangju Citizens Uprising of 1980. The goal of this publication is to provide a new perspective on the events of May 18th in the hope that the pulicization of the events of the Kwangju Uprising will prevent history from repeating itself.

KCS is aware that you were covering Kwangju during the turbulent times of the uprising and is eager to hear your personal account of the events you witnessed.

The book is to be a collection of personal narratives based on the theme : " An eyewitness account of the Kwangju Citizen's Uprising : May 18, 1980. The perspectives is to be from that of an eywitness - preferably not a journalistic account. KCS would also be interested in publishing your personal history ( both prior and post the 1980 incident ) and any personal statement you would care to make to either the Korean Government or the Kwangju citizen's who are still so deeply moved by this event. In addition, if you happen to have any copies of your correspondences with your newspaper from May 18th, we would very much like to publish them in conjunction with your narratives.

KCS hopes to make a large impact with this publication and is interested in as detailed an account as you could provide. We are hoping that the narratives will be in excess of 10 pages. There is no set page limit. The deadline for submission has been set for March 31 1997, as this is the latest possible date which would ensure sufficient time to compile the book for publication by May 18th.

We are in the process of determining an appropriate fee for your work and will inform you of our proposal as soon as possible. It would be a great honor to be able to incorporate your writings into our publication. If you would like to contribute, please let us know as soon as possible.

Your favorable consideration would be greatly appreciated.

Sincerely yours,

Co-chairpersons Yun, Jang-hyun
Bak, Man-kyu
Jung,Ung-tai

국내 기자들 원고가 들어오면 김성 국장이 무등일보 이광이 기자 등과 함께 원고교정을 했고, 외신 기자들 원고가 들어오면 최소의 경비로 봉사를 했던 정영목씨(당시 삼양사근무)와 전남대 호남대 등 몇명의 교수들이 번역을 맡았고 이재의 위원이 교정을 했다. 원고청탁에서 편집까지 약 2개월 10일 정도에 걸친 매우 빠듯한 시간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출판은 작고한 나병식씨가 운영하는 풀빛출판사에 의뢰하기로 했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발행해 고역을 겪었던 나병식 사장은 출판의 부담과 판매수익이 없을 것이라며 고심하다 우리의 요청을 받아들여 국판과 영문판 발행을 각각 해 주기로 했다.

나중에 나온 국문판은 <5․18특파원리포트>로 발행되어 국내 서점을 통해 널리 퍼졌고, 영문판은 'Kwangju in the eyes of the world'란 이름으로 한정 부수로 발행했고 후에 아마존닷컴 등을 통해 해외에 소개되었다.

이런 모든 과정의 출판을 위한 섭외와 원고관리, 사무적 과정, 출판기념행사 준비는 당연히 사무국장이었던 내 일이었다.

유일한 방송 카메라 기자였던 힌츠페터

책에 대해 말하자면 내가 기억하기에 당시 조선일보 기자였던 김대중씨의 필진 참여는 내부의 논란이 컸다. 오로지 진실규명을 위해 언론계에 비중이 있는 그의 원고를 받았는데 원고의 내용은 상당한 사실을 서술하는 등 그의 다른 글과 달라 받아들였다. 만일 그가 여전히 사실을 왜곡한다면 빼 버릴 계획이었다.

외신 특파원들의 글은 미국 볼티모어 썬지의 브래들리 마틴 기자의 원고가 제일 먼저 들어왔다. 그는 그 전에 이미 광주를 방문해 광주 5․18 항쟁지도부 대변인 윤상원을 취재한 바 있었고 광주 MBC에 방송을 할 만큼 광주에 대해서 적극적이었다. 그가 쓴 리포트 제목은 '윤상원 그의 눈길에 담긴 체념과 죽음의 결단'이었다.

가장 까다로웠던 사람은 미국 뉴욕 타임즈 특파원으로 영국 출신이었던 헨리 스코트 스톡씨였다. 그는 신사였으나 예민했고, 높은 원고료를 요청했으며 나중에 출장비에 대해서도 많은 시비를 했던 기억이 난다.

그 외에는 당시 원고료는 매우 적은 수준이었지만 원고료에 대해 따지는 내외신기자는 거의 없었다. 어쩌면 당시 출판에 참여한 내외신 기자 대부분은 광주의 진실에 대한 어떤 역사적 사명으로 글을 쓰면서 참여했던 것이다.

우리가 지금 가장 많은 신세를 지고 있는 푸른 눈의 목격자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는 당시 출판에 참여한 특파원 중 유일하게 방송 카메라 기자였다. 그는 1980년 당시 독일 NDR-ARD TV 카메라 기자로 5․18 현장을 2번이나 들어와 취재해 독일 언론에 보도해 세계를 놀라게 한 용감한 언론인이었다.

기사를 쓰는 기자가 아닌 카메라 기자인 그에게 원고는 적절치 않을지 몰랐으나 그는 기꺼이 원고를 써 보냈다. 보낸 원고의 원래 제목은 '광주 5.18 민중항쟁 목격자의 증언'이었으나 책으로 내면서 '카메라에 담은 5․18 광주 현장'으로 변경했다.

윤장현 광주시장은 힌츠페터가 <5.18 특파원 리포트>에서 '김사복'이라는 이름을 처음 언급했다며 자신의 홈페이지에 책 사진을 찍어 올렸다.
 윤장현 광주시장은 힌츠페터가 <5.18 특파원 리포트>에서 '김사복'이라는 이름을 처음 언급했다며 자신의 홈페이지에 책 사진을 찍어 올렸다.
ⓒ 윤장현 광주시장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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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보기에 실제의 그는 영화의 주인공역보다 더 온화하게 보였고, 잘 생겼다. 그리고 매우 겸손하게 사람들을 대했다. 어쩌면 그는 영화에서처럼 광주시민들을 현장에서 직접적으로 체험하면서 이해했고, 진실로 광주시민을 존경했기에 그런 태도를 갖는지도 모르겠다.

안타깝게도 출판 이후 그는 광주에 몇 번 다녀갔는데 나는 그 뒤로 그를 보지 못했다. 그리고 영화를 통해 작고한 그를 만나게 될 줄이야!

진실의 확산, 기억의 확대

2005년 5월 광주 국제평화캠프와 5.18 민중항쟁 25주년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광주를 방문한 위르겐 힌츠페터(Juergen Hinzpeter)
 2005년 5월 광주 국제평화캠프와 5.18 민중항쟁 25주년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광주를 방문한 위르겐 힌츠페터(Juergen Hinzpeter)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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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기념회와 같이 진행된 5․18 기자클럽에서 회장으로 선출된 사람은 독일 슈트 도이체 차이퉁지의 게브하르트 힐셔 기자였다. 그는 프러시아계의 전형적인 독일인의 모습이었는데 기자가 되기 전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이라는 독일 사회민주당계 재단의 도쿄지부장을 맡을 정도로 이념적인 개념이 분명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가 80년 5월 30일자 사설로 실은 '광주의 불길한 징조'라는 글이 아주 의미 있는 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출판기념회 공동주최단체였던 한국기자협회는 특별한 역할은 하지 않았으나 언론인 단체로 위상이 있었기에 책의 공신력을 높이기 위해 요청했고 남영진 기자협회장이 흔쾌히 응해 주었다. 무등일보는 이 책을 함께 기획한 김성씨가 무등일보 편집국장이었고 보도와 행사 등 전폭적으로 이 행사를 후원했다.

영화 <택시운전사>의 모티브에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가 있었고, 그 중 하나의 모티브에 <5․18 특파원리포트>가 있었기에 영화속의 뒷 이야기를 소개하다보니 길어졌다.

그런데 나는 이 영화의 엄청난 성공을 보면서 어쩌면 5․18 광주의 진실에는 훨씬 더 다양한 많은 이야기들이 있고, 더 많은 다양한 콘텐츠들이 우리의 기록 속에 담겨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힌츠페터 기자 외에 다른 외신기자의 증언에도 국내 기자들의 증언에도 아니 아직 등장하지 않았으나 지금 누군가 다른 증언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기록들에 <택시운전사>와 같은 아니 더 능가하는 많은 내용들이 들어있다. 각색하기에 따라 그 모든 것은 하나의 소설과 연극과 뮤지컬과 영화가 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기억들을 오늘의 역사공간으로 가져와 그 비극적이고 참혹한 사건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교훈을 되새기는 것이다. 또 그 악몽 속에서도 인간의 존엄성을 실현한 민중의 이야기들 속에서 우리가 살아야 할 참된 미래사회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를 내다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택시운전사>가 더욱 많은 국민의 관람속에 성공을 거두기를 바란다. 그것이 곧 진실의 확산이자 기억의 확대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한편 이것이 단순한 영화의 성공을 넘어서 5․18 광주의 완전한 진실 규명의 계기가 되길 기대하고 싶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김영집 시민기자는 지역미래연구원장입니다.



태그:#택시운전사, #위르겐 힌츠페터, #5.18특파원리포트 , #시민연대모임, #5.18 진실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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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스트(광주과학기술원,GIST) 대외부총장, 전 UCLA 한국학센터 연구원 참여자치21 대표 대통령직속 국가균형발전위원회 국장 광주혁신클러스터추진단장 기업주치의센터장 광주광역시장 특보 지역미래연구원장등을 맡았다. <창조도시><김영집의 고전담론>등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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