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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구매하기] '백발의 거리 투사' 백기완 선생님과 '길 위의 신부' 문정현 신부님이 공동 저자로 나서서 <두 어른>이란 책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 책 수익금은 비정규노동자들이 '꿀잠'을 잘 수 있는 쉼터를 만드는 데 보탭니다. 사전 구매하실 분은 기사 하단의 링크를 클릭하시면 됩니다. [편집자말]
지난 2011년 1차 희망버스를 타고 부산 한진중공업을 찾은 백기완, 문정현 두어른.
 지난 2011년 1차 희망버스를 타고 부산 한진중공업을 찾은 백기완, 문정현 두어른.
ⓒ 노순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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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매 순간이 기적이고 우주가 충돌하는 사건이다. 나에게도 이런 기억이 있다. 폭력적이고 억압된 시대를 살아온 어두운 그림자를 없애준 밝은 빛에 관한 추억이다.

어떤 사람은 아주 특별한 빛을 낸다. 노인이 되어 가는데도 더 밝아지고 환해져 멀리서도 보인다. 생명체의 에너지 수명에 따라서 점점 그 밝기가 덜함이 마땅한데, 오히려 점점 밝아져 어디서든지 그 빛을 확인할 수 있다. 상식과는 다른 특이한 현상이다.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공개한다.

[장면1] 제주 강정마을의 빛나는 실루엣

제주 강정마을을 지키는 문정현 신부
 제주 강정마을을 지키는 문정현 신부
ⓒ 노순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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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0년 겨울, 나는 지인들과 함께 제주도 여행을 가게 됐다. 도착한 이틀째에 한 사람이 마침 강정마을 평화대행진을 하는 날이니 한번 들러보자고 제안했다.

그때만 해도 세월호 참사를 겪기 전이라 사회 문제에 별 관심이 없었다. 여행을 왔는데 거기까지 가야 하나 생각했지만, 제안한 사람에게 뭔가 뜻이 있겠지 하고 따라나섰다.

당시 강정마을 어귀, 작은 길에는 함박눈이 탐스럽게 내리고 있었다. 제주에 자주 와봤지만 함박눈이 내리는 제주는 처음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저마다 알록달록한 깃발을 만들어서 흔들며 걷고 있었고, 메가폰을 든 몇몇 젊은이들이 대열의 앞뒤에서 해군기지 건설반대를 외치고 있었다.

한 젊은 여성이 누구보다 열띠게 외치는 모습에 '참 열정적이다. 어떻게 저 사람은 들어주는 사람도 많지 않은 이 시골길에서 이렇게도 간절히 외치는 것일까'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무리에 섞여 함께 길을 걸었다.

그때였다. 저 뒤쪽에서 하얀 눈송이를 배경으로 까맣게 그은 얼굴과 하얀 수염이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실루엣이 걸어왔다.

"아, 저런 걸 아우라(Aura)라고 하는 것일까?"

남다른 아우라를 가진 실루엣이었다. 맨발의 예수를 봤을 때 제자들이 이렇게 느꼈을까. 내겐 아주 특별한 경험이었다.

나는 당시 강정마을에서 왜 투쟁하는지 몰랐다. 제주해군기지 앞에서 깃발을 흔드는 이유도 몰랐다. 거리에서 평화행진을 하는 이유도 몰랐다. 다시 말해서 내 머릿속에는 강정마을과 관련된 그 어떤 정보도 입력돼 있지 않았다.

그런데 그 실루엣을 보고 머릿속에 딱 세 글자가 떠올랐다. 문정현? 신부님. 입력 정보가 없으면 응당 출력 정보도 없어야 할 텐데, 내 머리는 어떻게 그 이름을 찾아냈을까? 지금 생각해도 신기한 일이다.

실루엣에 이끌려 곁에 있던 남편에게 이렇게 소곤거렸다.

 "여보, 뒤에 오시는 저분이 문정현 신부님인가 봐. 우리 가서 인사할까?"

하지만 남편은 너무 티를 내는 것 같으니 그냥 말없이 걷자고 답했다. 어쩔 수 없이 남편과 함께 문정현 신부님 뒤를 따라 걸었다. 

검은 사제복의 문 신부님은 마을 아이들과 저만치 멀어져갔다. 강정마을 회관에서 제공하는 국밥 한 그릇을 먹고, 마을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문정현 신부님을 다시 만날 수가 없었다. 아쉬움 마음이 들었다.

"아, 달려가 이야기 나눌걸. 언제 또 뵐 수 있을까?"

인연은 우연히 찾아왔다. 4년 뒤, 문정현 신부님을 다시 만나게 됐다. 2014년 서울 광화문 세종대왕 상 앞, 세월호 유가족 유민 아빠가 하루하루 애타게 말라가고 있는 어느 날이었다.

당시 나는 자고 일어나면 계속되는 단식 소식에 '어떻게 아이 잃은 아비가 저렇게까지 해도 꿈쩍도 하지 않는 정부가 있을까'하고 발을 동동 구르는 심정으로 단식농성 중인 텐트로 찾아갔다.

유민 아빠께 해드릴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그저 눈인사만 하고 텐트 옆에서 먹먹한 마음을 추스르며 기도를 했다. 그때 텐트 왼쪽에서 문정현 신부님이 홀로 유민 아빠를 지켜보며 서 계셨다.

"신부님!"

마치, 문정현 신부님이 날 알고 있기라도 하듯, 너무 자연스럽게 불렀다. 문 신부님은 이 땅의 모든 이들을 친구로 알아보듯이 자연스럽게 미소지으셨다. 그리고 얼결에 이런 말이 툭 튀어나왔다.

"신부님, 너무 힘들고 슬퍼요. 제주에서 여기까지 유민 아빠 보러 오신 거예요?"

한번 입이 열리니 멈추지 않았다. 아쉬움이 남았던 지난 기억을 문 신부님께 전했다.

"신부님, 저 몇 년 전에 제주 강정대행진 때 뵙고 그때 인사 못 드려서 너무 아쉬웠어요. 신부님, 너무 감사해서 그러는데, 한번 안아드려도 될까요?"

용감하게 두 팔을 벌려 문 신부님을 안았다. 신부님이 품 안에 들어왔다.

[장면2] 백발 투사의 눈물

'백발 투사'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백발 투사'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 채원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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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늦가을 무렵, 서울 종로구 조계사에서 열린 백기완 선생님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었다. '나는 왜 따끔한 한 모금에 이리도 목이 메는가'라는 제목의 민중 미학강연이였다.

백 선생님은 마치 연극배우처럼 전전 동화 같은 이야기들을 들려주다가 목이 메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또 강건한 한국인의 기백을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 자리에 모인 청중들은 백 선생님께 야단도 많이 맞았다.

"왜 애들은 하나도 안 데리고 왔어? 자네들만 매번 들으면 뭐하나, 젊은 애들이 바뀌어야지"

그 말씀이 내 마음속에 들어왔다.

이후 틈만 나면 '백 선생님 강의를 어떻게 하면 청소년들에게 듣게 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만나는 활동가들과 강연 이야기를 할 때마다 백 선생님의 강연을 제안해보았지만, 실현되지 않았다.

그러던 2016년, 기회가 왔다. 경기도 성남시에서 세월호 2주기 추모행사를 위해서 시민들에게 행사비를 지원한다고 했고, 주변 사람들에게 회의 때마다 백기완 선생님 강연을 하자고 얘기하던 내게 연락이 왔다. '내가 사는 용인에서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인데 성남시는 이런 것도 가능하구나' 싶어 너무 반가웠다.

이렇게 해서 성남시와 용인시의 세월호 활동가들이 모여 합의 끝에 세월호 2주기 추모행사에 백기완 선생님을 모시게 됐다. 2년 만에 꿈이 이루어진 거다.

'돌아올 땐 쪽빛으로'

백 선생님의 강연 제목이다. 기획팀에서 머리를 짜도 적절한 제목이 떠오르지 않아서 몇 개의 후보 문구를 백 선생님께 보냈다. 좋은 제목이 있다면 추천해달라고 부탁도 드렸다. 며칠 후, 백 선생님께서 보내온 강의 제목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감탄하고 환호했다.

어떻게 이런 제목을 생각해내셨을지. 역시 백 선생님의 감각은 살아있었고, 젊은이들보다도 더 창의적이었다. 그 말 속에 말로 표현하지 못할 세월호 아이들을 향한 우리의 모든 감정이 녹아있을 뿐 아니라, 세월호 사고에 가슴 아파하는 이들을 치유하는 힘까지 느껴졌다.

성남시청의 700석 강연장이 가득 찼다. 백 선생님이 바라시던 대로 많은 청소년이 좌석을 채웠다. 그날 이 자리에 있던 모두는 세월호를 추모하고, 사람 사는 세상을 얘기하고, 가장 맑은 빛 '쪽빛'으로 돌아올 아이들을 꿈꾸었다. 그리고 416 합창단과 시민합창단이 함께 <임을 위한 행진곡>를 목 놓아 불렀을 때는 가슴이 뜨거워졌다.

강연이 끝난 뒤, 고등학생 딸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엄마, 정말 좋은 시간이었어. 백기완 선생님, 귀여우시기도 하고 정말 좋은 분 같아."

아들은 긴 강연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갔는지 강의가 너무 짧았다며 아쉬워했다. 남편은 '푸른 하늘'이었던 아이디를 '쪽빛 하늘'로 바꿨고, 우리 식구들은 가족끼리 힘내라고 할 때 "파이팅" 대신 "아리아리!"를 외치게 됐다.

나중에 듣게 된 얘기로는 선생님께서 부상을 딛고 다시 걷게 되신 후 첫 강의였기에 감회가 남달랐고 정말 좋아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가 함께했던 순간이 <시사IN> 송년 특집호에 실렸다. 열혈 투사의 볼을 타고 내리는 한줄기 눈물이 보석보다 더 빛나는 사진과 함께 실렸다. 함께 있던 순간에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눈물이었다.

[장면3] 고공농성자들을 향한 손 인사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 정택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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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완 선생님과의 만남은 이게 끝이 아니다.

2016년 3월, 서울 시청광장에 추운 기운이 아직 가시지 않은 때였다. 밤늦은 시간, 겹겹 한복 위에 파란색 패딩점퍼를 껴입은 백기완 선생님이 힘겹게 발걸음을 옮기며 나타났다. 그리고 하늘 높이 솟은 건물 앞에 멈췄다.

아찔한 광고탑 위에 아주 작은 개미처럼 보이는 두 사람의 실루엣이 보였다. 눈을 가늘게 뜨고서야 겨우 윤곽을 확인할 수 있는 두 사람에게 백 선생님은 팔을 들어 느릿느릿한 속도로 정성을 가득 담아 오래오래 손을 흔들었다. 하늘로 보내는 인사였다.

당시 하늘 위에 있던 두 사람은 기아자동차의 비정규직 노동자인 한규협씨와 최정명씨다. 두 사람은 아찔한 고공에서 1년 가까이 지내고 있었다.     

백 선생님의 손 인사는 "어이, 젊은 친구들! 내가 여기 있어"라고 하는 말 같았다. 고공에서 내려다보는 두 사람의 눈에도 백기완 선생님이 들어왔는지, 아니면 그냥 한 파란색 옷의 작은 점 같은 사나이를 향한 것인지, 두 사람 역시 손을 머리 위로 들어서 응답했다.

얼마나 답답했으면 저기까지 올라갔을까, 얼마나 맘이 쓰이면 불편한 몸으로도 그렇게 오래오래 올려다보시며 손 흔들어서 마음을 전하셨을까, 말하지 못한 수많은 언어가 땅에서 하늘로, 하늘에서 땅으로 줄지어서 움직이는 것을 분명히 목격했다.

그때야 알았다. 어른이면 젊은이들에게 그렇게 하는 거란 걸. 어른으로서 세월호에 갇힌 아이들에게 해주지 못한 말들, 떠나고 나서야 전하는 수많은 언어들이 떠올라 눈물이 났다. 

나중에 알았다. 당시 백 선생님은 광장에 다시 나오시기 직전인 2015년에 고관절을 다쳐 한참 동안 병원 신세를 졌다는 걸. 아파서 누워 있으면서도 투쟁현장에 나가지 못해 한스러워했다는 걸. 그때는 미처 몰랐다.

고공농성자들에게 손을 흔들던 그 날, 절룩이며 걷던 백 선생님의 모습이 아련하다.

두 어른과의 추억은 내 삶의 힘

진도 팽목항
 진도 팽목항
ⓒ 노순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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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어른은 모를 거다. 두 어른과의 추억이 내 기억 속에 분명히 남아서 나의 삶에 힘을 더하고 나의 길을 흔들리지 않도록 해준다는 것을. 특별히 애쓰지 않아도, 특별한 메시지를 전하지 않아도, 존재만으로 사람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게 두 어른이다. 그냥 긴 세월, 변함없이 그 자리에 계신 것만으로도 숙연하게 만드는 게 두 어른이다.

그래서다. 두 어른의 대담집이 나온다고 한다. 두 어른께 따뜻한 밥 한 끼 대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존경과 따뜻한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그 많은 이들의 아픔을 다 마음속에 켜켜이 안고 오래오래 싸워온 눈물 많고, 정도 많은 백기완 선생님.

백 선생님이 고공의 두 젊은이에게 손을 흔들어 존재를 알린 것처럼 이번엔 우리가 백 선생님께 "저 여기 있어요"라고 손을 흔들 차례다.

세상의 가시밭길을 다 마다치 않고, 아프고 저린 곳만 찾아다녔던 예수보다도 더 긴 세월을 통해 우리에게 빛을 가르치시는 문정현 신부님께, 그가 아끼는 세상의 모든 아름답고 연약한 것들을 대신해서 아주 작은 선물을 우리가 내밀 차례다.
   
두 어른의 대담집을 통해 전해질 깊은 이야기를 이제는 우리가 들어줄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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