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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렬했던 1986년 5월 투쟁 이후에 갑자기 정치 정세가 바뀌었다. 전두환 정권과 야당 정치세력 사이에 타협 정국이 조성된 것이다. 이른바 '헌법특위 국면'이 도래했다.

발단은 미국이었다. 1986년 5월 8일 미 국무장관 슐츠가 방한하여, 국회 내 3당 대표들과 담화하는 자리에서 타협을 통한 시국 수습을 희망한다고 발언했다. 전두환 정권은 이에 호응해서 국회에서 여야가 합의하면 조기 개헌을 고려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야당 정치세력도 이를 받아들였다. 장외에서 추진해 오던 직선제개헌 서명운동을 중단하고 원내 협의에 임했다. 그리하여 7월 30일에 국회 안에 헌법개정특별위원회(헌법특위)가 발족하기에 이르렀다.

군사독재와 타협 없다!

타협 정국의 도래는 민주화운동 탄압을 수반했다. 전두환 정권은 5·3 인천 시위를 빌미로 하여 또 한 번 가혹한 탄압의 칼날을 뽑아들었다.

대검찰청은 '5.3인천사태'에 대한 중간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그에 따르면 시위 주동세력은 학생단체 민민투와 재야단체 민통련, 노동단체 서노련과 인노련 등이었다. 이들이 조직적으로 인원을 동원하여 소요를 선동했다고 규정했다. 그리고 149명을 구속하고 55명에 수배를 내렸다. 민통련 의장 문익환을 비롯한 간부들은 체포, 수배, 연금을 당했다. 특히 시위 주동 단체로 지목된 서노련은 군대 내 수사기관인 보안사령부로 끌려가 살인적인 탄압을 받았다. 서노련 관련자 20여 명이 무차별 구타와 전기고문, 물고문을 겪어야 했다.

1. 인천시민회관 앞은 5·3인천시위의 중심점이었다. 2. 당시 인천시위에 대하여 폭력성을 강조하기 위해 정부와 언론이 혈안이 되었다. 경향신문은 이에 호응하여 폭력성을 강조하기 위해 약도까지 상세히 그려 설명하고 있다. 3. 각종 구호가 적힌 플랜카드를 들고 행진하는 시위대 모습. 4. 5·3시위 주동자로 수배당한 (왼쪽부터) 여익구, 민청련 출신 안희대와 박계동 등 민통련 임원들이 명동성당에서 농성하고 있다
 1. 인천시민회관 앞은 5·3인천시위의 중심점이었다. 2. 당시 인천시위에 대하여 폭력성을 강조하기 위해 정부와 언론이 혈안이 되었다. 경향신문은 이에 호응하여 폭력성을 강조하기 위해 약도까지 상세히 그려 설명하고 있다. 3. 각종 구호가 적힌 플랜카드를 들고 행진하는 시위대 모습. 4. 5·3시위 주동자로 수배당한 (왼쪽부터) 여익구, 민청련 출신 안희대와 박계동 등 민통련 임원들이 명동성당에서 농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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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과 타협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민청련의 입장이었다. 민청련은 당면 투쟁의 방향을 헌법특위 반대운동으로 전환했다. 민청련은 6개 청년단체들을 묶어서 '청년운동 연대 테이블'을 구성했다. 그리하여 6월 13일에는 헌법특위 음모를 폭로하는 가두시위를 조직했다. 봉천동에서 이뤄진 이 시위는 소규모였지만 의미 있는 행동이었다.

이튿날에는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 있는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군사독재와 타협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제시했다.

헌법특위는 "미국의 배후 조종에 의한 보수 대타협 음모"의 소산이며, 군사독재 정권은 그를 통하여 '이원집정부제라는 기만적인 헌법개정'을 꾀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는 '군사독재의 변형된 형태'일 뿐이었다. 민청련은 신민당 이민우 총재를 비롯한 일부 야당 정치세력이 그에 장단을 맞추고 있음을 비판했다.

결국, 헌법특위 구성은 '예방 혁명적 기만책의 일환'일 뿐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헌법 문제는 민중이 결정해야 한다. "헌법은 군사독재와 매판세력을 철저히 배제하고 이 땅의 진정한 주인인 민중에 의해 새로이 제정되어야 한다"고 천명했다.

6개 청년단체는 민주화운동 탄압을 규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민통련 파괴공작을 즉각 중단하고 서노련을 비롯한 노동, 학생, 청년운동에 대한 탄압을 멈추라고 요구했다. 나아가 살인적인 고문수사를 자행하는 보안사령부 등을 해체하라고 주장했다.

또다시 남영동 대공분실로

탄압의 불똥은 민청련에도 튀었다. 거의 1년 동안 장기간 지명 수배 중이던 김희택 의장이 6월 17일 경찰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아침 시흥 인근 길거리에서 안양경찰서 소속 형사들에게 강제 연행됐다. 그는 악명 높은 남영동 치안본부로 이첩됐다. 고문수사가 또다시 자행되지 않을까 우려와 긴장감이 돌았다. 민청련에서는 긴급 모임을 갖고 대책을 협의했다.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조사하고 있다는 것은 현 정권이 아직도 민청련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탄압하겠다는 저의를 끝내 버리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6월 19일부터 민청련 사무실에서 항의 농성에 들어갔다. 농성에는 민청련 회원들 외에도 계훈제, 김승균, 성유보, 김종철 등과 같은 영향력 있는 재야인사들도 민청련 지도위원 자격으로 합류했다. 이날 배포된 성명서는 김희택 의장을 비롯한 민청련 구속자 8명의 즉각 석방과 민주화운동에 대한 탄압 중단을 요구했다.

민청련 사무실에서 항의농성 중인 재야 원로들. (왼쪽부터) 어른들에게 상황을 설명 중인 박우섭 민청련 중앙위원, 백기완, 문익환, 계훈제, 임채정
 민청련 사무실에서 항의농성 중인 재야 원로들. (왼쪽부터) 어른들에게 상황을 설명 중인 박우섭 민청련 중앙위원, 백기완, 문익환, 계훈제, 임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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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은 활기를 띠었다. 경찰의 출입구 봉쇄, 음식물 공급 차단 등의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농성투쟁의 현장으로서 제 기능을 다 했다. 항의 농성과 함께 가족들의 면회요구 투쟁도 세차게 진행됐다. 김희택 의장의 부인으로 노동운동가 출신인 조명자씨가 김병곤의 부인 박문숙씨와 함께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을 항의 방문했다. 그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남편이 남영동으로 연행됐다는 소식을 듣고 문숙이와 함께 갔어요. 그 살벌한 대공분실 문을 두드리고 흔들며 바닥에 누워 몸부림을 치다 잠깐 기절을 했던 것 같아요. 요원들이 나와선 병원으로 끌고 갔어요. 이동 중에 의식은 돌아왔지만, 문숙이가 계속 기절한 척하라고 하더군요. 전 결국 병원에서 처방한 독한 신경안정제를 맞고 정말 기절을 했어요. 좀 있다 깨자마자 다시 남영동으로 갔죠. 가서 난리를 치니까 그 사람들도 기가 막혔던지 문을 열고 면회를 시켜 주데요. 대공분실 안에 들어가서 누구를 면회한 건 그게 아마 전무후무한 일일 거예요."

조명자(왼쪽)와 박문숙(오른쪽)
 조명자(왼쪽)와 박문숙(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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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자씨는 이 일로 민가협 어머니들에게서 농성장에서 인사를 많이 받았다. 한 구속자 어머니가 걱정을 가득 담아서 묻더란다. 조명자가 진짜 뇌전증 환자인 줄로 알고 '치료는 받았느냐, 괜찮으냐'고. 주위 사람들이 박장대소를 했다.

가족들의 면회요구 투쟁은 이처럼 치열했다. 효과가 있기를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구속자에게 가해질 우려가 있는 고문 수사와 가혹 행위를 조금이라도 경감시킬 수 있기를 진정으로 바랐던 것이다.

탄압 정국 하에서 계속된 시위, 또 시위

탄압 정국 하에서도 민청련의 투쟁은 계속됐다. 그해 7월에는 성고문 규탄 운동이 이슈의 초점이 됐다. 여성 노동운동가 권인숙을 연행한 부천경찰서 문귀동 형사가 밀실에서 이틀에 걸쳐 추악한 성고문을 자행한 사실이 폭로됐고, 그를 규탄하는 항의 행동이 고조됐다. 민청련은 청년, 학생, 종교, 여성 등 10개 단체와 연대하여 부천서 성고문 규탄 운동에 참여했다.

이 투쟁 중에서도 군사독재와 타협하는 야당 정치세력을 비판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살인과 고문을 저질러놓고도 조금의 반성의 빛도 없이 딱 잡아떼는 놈들과 무슨 협상을 벌인단 말인가?"라고 되물었다. 군사독재와 타협하는 것은 민중을 배신하는 일임을 분명히 했다.

1. 1986년 당시 재판정에 출석하는 조영래 변호사와 권인숙 2. 7월 27일 권인숙 성고문 사건 규탄대회에서 항의하는 인재근 3. 88년 5월 17일에 구속된 문귀동이 법정에 출두하는 모습 4. 1986년 부천서 성고문사건의 피의자 문귀동의 재판에 가위를 들고 온 시민
 1. 1986년 당시 재판정에 출석하는 조영래 변호사와 권인숙 2. 7월 27일 권인숙 성고문 사건 규탄대회에서 항의하는 인재근 3. 88년 5월 17일에 구속된 문귀동이 법정에 출두하는 모습 4. 1986년 부천서 성고문사건의 피의자 문귀동의 재판에 가위를 들고 온 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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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은 제헌절이 든 달이었다. 민청련은 7개 청년단체와 연대하여 '민주헌법 쟁취는 민중의 손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어서 8월 15일에는 광복절에 즈음하여 청년·학생 연대에 기반한 시위운동을 조직했다. '헌법특위 분쇄 및 조국통일 촉진을 위한 범국민 실천대회'라는 긴 명칭의 가두시위였다.

삼엄한 경찰의 경계망 속에서도 시청 앞, 신당동 전철 입구 등지에서 시위 대열을 형성하는 데에 성공했다. 10분 혹은 5분밖에 지속되지 않은 시위였지만 수천 명의 정·사복 경찰이 배치된 상황이었음을 감안한다면, 시위 대열이 일시적이나마 형성된다는 것은 진정 놀라운 일이었다. 시위 참가자들의 헌신성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더구나 '헌법특위 국면' 하에서 시위운동을 조직하는 데에는 내부적인 어려움이 컸다. 민주화운동 전체의 힘이 약화되어 있었다. 군사독재의 탄압이 격렬했고, 운동 진영 내부는 이중 삼중의 분열이 진행 중에 있었다. 이 때문에 전반적으로 동원력이 현저히 떨어져 있었다. 어떤 시위운동도 큰 규모로 전개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민청련은 어려운 국면을 힘겹게 버텨나가고 있었다.


태그:#민청련, #헌법특위, #김희택, #조명자, #박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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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정권의 폭압에 저항하기 위해 1983년에 창립하여(초대 의장 김근태) 6월항쟁에 기여하고 1992년까지 활동한 민주화운동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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