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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은 무엇인가

애석하게도 한국의 성폭력 관련 법들은 성폭력이 도대체 무엇을 침해한 것인지에 대하여 제대로 규명하고 있지 못하다. 성폭력이라는 단어가 처음 생긴 것이 93년도 '반성폭력 운동'을 시작으로 했고 그로 성폭력 특별법이 만들어졌지만 법의 처음부터 끝까지 성폭력은 무엇인지 명확히 이야기하지 않는다. 다만, 강간이나 추행 등의 행위들을 성폭력으로 규정하고 있다.

아쉬운 건 성폭력 범죄들을 처벌하는 '형법'을 봐도 마찬가지다. 성폭력과 관련된 법은 이전에 '정조에 관한 죄'로 분류되던 기존의 성범죄들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고, 그 이름을 '강간과 추행의 죄'로 변경했으나 성폭력이 무엇에 대한 어떠한 폭력인지에 대해서는 뚜렷하게 규정하고 있지 않다. 법만 살펴본다면 성폭력은 강간, 추행, 성희롱 등 몇 가지 '행위'들을 말하고 있고 이를 묶어 성폭력이라 통칭하고 있을 뿐이다.

판례를 들어 살펴보았을 때는 현재의 사회가 성폭력에 대해 '성적 수치심'을 느꼈는지를 중심적으로 판단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폭력 피해자가 성적 수치심을 얼마나 느꼈는지, 또 그 수치심으로 얼마나 '일상성'을 잃었는지에 주목해서 나온 판결들이 수없이 많이 쏟아진다. 그러나 그 판례들은 결국 피해자들이 수치심을 느껴야한다는 것, 피해자들의 삶은 성폭력으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고 다시는 극복할 수 없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사회적 통념을 담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법적인 성폭력 정의에 따르면, 피해자들은 자신이 성적 수치심을 느껴서 얼마나 삶이 피폐해졌는지를 증명해야만 성폭력의 경중을 드러낼 수 있다. 또 한 가지는 '정조' 관념에 입각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페니스'가 '질'에  삽입되는 강간이 가장 심각한 성폭력으로 규정되고 반대의 경우나 피해자의 '질'이 성전환 수술의 결과인 경우 정조가 없다고 판단되어 강간이 성립되지 않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성폭력에 대한 관념과 이해는 아직 이런 혼란기에 있다.

성폭력은 '폭력'

'성폭력은 폭력이다'라는 말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언어폭력, 물리적폭력과 더불어 성폭력은 폭력이다. 폭력이라 함은 상대에게 위협을 가하고, 자존감을 훼손하고 개인의 결정권을 침해하는 행위이다. 학교 폭력의 경우에는 학교 내외에서 '학생'에게 발생하는 모든 종류의 폭력을 이르고 따돌림이나 소위 셔틀이라고 불리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위협 등을 통해 발생하는 폭력도 폭력이라 규정하고 있다.

성폭력도 마찬가지다. '폭력'이라는 것이 무엇을 훼손하는가 혹은 무엇을 침해하는가 묻는다면 '성적 자기결정권'의 침해라고 보는 것이 현 반성폭력 운동계의 일반적인 이해다. 성적 자기결정권을 보이지 않는 위계나 분위기, 권력 등을 통해 침해했다면 성폭력이라고 볼 수 있다. 꼭 '성기삽입'이 일어났는지 피해자가 그 이전에 어떤 행위들을 했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중요한 점은 상대를 '성적'으로 바라보고 소비하면서도 그것을 인지조차 못했을 정도로 편했던 상대들이다.

관계 안에서 더 많이 눈치보고, 상대의 비위를 맞추게 되는 것은 약한 사람들의 몫이 되기 쉽다. 당신이 타인을 대하는 게 너무 편하다면, 상대방이 자신을 위하여 무언가를 희생하고 있지 않은지 되돌아봐야 하지만 권력을 가진 이들은 쉽게 행동한다. 상대방이 무엇을 감내하는지 잊은 채. 그 안에서 피해자들은 자신의 피해가 '예민한 것'이 되고, '의도치 않은 일'이 되는 것을 무수히 많이 경험했을 것이다. '미투(Me Too)운동'에서도 마찬가지다. 그 날 있었던 일들에 대해 다 듣지 않아도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그 분위기 안에서는 그런 폭력이 생기기 쉽고, 그런 폭력이 수많은 피해자들을 만들어냈으리라. 우리는 알고있지 않은가.

'권리'의 침해를 '행위'로 규정할 수 있는가

단언컨대, 어디까지 성행위고 장난이고 친근한 사람끼리 할 수 있는 농담인지 그런 행위를 규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떤 행동이 어떤 침해를 낳고, 어떻게 권리를 무시하는지 규정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타인에 대한 이해와 배려, 그 사람의 권리를 망각한 채 어떤 행동을 할 때 문제가 생긴다. 그리고 그 사람이 그 행동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 것이 '권위'와 '권력'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성폭력이 '권력에 의한 폭력'이라고 말한다.

성폭력 피해자들은 성폭력이 발생한 이후 끊임없이 자신을 의심한다. 자신이 거길 따라갔기 때문에, 여지를 주었기 때문에, 거절을 제대로 못했기 때문에 폭력이 발생했으리라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렇지 않다. 당신이 그곳에 갔어도 당신이 내키기 않았다면 싫었다면 가해자는 그런 행동을 해서는 안되었고, 칼같이 끊어내지 않더라도 당신이 싫어한다는 것을 느끼고 배려해야 할 의무가 상대에게는 있었으며, 권력이 있는 자의 거절은 단칼이 아니더라도 단번에 먹히지만 그들은 당신의 '거부'를 무시했던 것이다.

만약 평등한 관계에서 생긴 오해로 불거진 해프닝이었다면 피해자들이 이렇게 오랫동안 이 사실을 사과받지 못했어야 했던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가해자가 그렇게 행동했을 때 피해자가 자신의 미래나 꿈, 평판 등을 걱정하면서 자신을 미워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피해자들이 겪어온 '성적 수치심'들은 왜 이것이 권력의 문제였는지에 대해 증명한다. 성폭력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것과 그로인해 자신과 자신의 주변인들을 미워하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던 이들이 겪는 '수치심'. 아마 성폭력이 바로 처벌되거나, 그것으로 자신이 받을 불이익이 없었다면 발생하지 않았을 정신적 고통들이다. 그래서 '성적 수치심'이 성폭력의 직접적인 훼손이라고 볼 수 없다.

폭력은 '행위'가 아닌 '훼손' 그 자체

미투 운동을 보면서 가해자가 누구인지, 피해자는 누구인지. 어떤 행위들이 있었는지에 대해 나열하고 단죄하는 것으로는 성폭력 문제의 해결이 불가능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피해자들이 그 일 이후에 겪었던 '훼손'일 것이다. 성폭력 자체가 얼마나 더럽고 추악했는지 뿐만 아니라, 피해자가 성폭력에 노출될 수 밖에 없었던 권력적인 구조와 그런 피해자들이 '양산'될 동안 방조했던 분위기가 더 큰 문제일 수 있다. 그 안에서 존엄성을 훼손당한 것. 그 자체가 성폭력의 결과다.

성폭력 가해자들의 사과로 폭력이 모두 무마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미투운동'으로 인해더 많은 피해자들이 양산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이고, 그 사과를 바라보는 이들에게 성폭력이 무엇인지 다시 고민하게 하고 피해자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현재 미투운동은 성폭력 피해자에게 피해가 자신의 탓이 아니라는 메시지를 던지는 과정이다. 그 과정을 또다른 폭력이 잠식하지 않는 것 또한 중요하다.

모든 행위는 폭력일 수 있음을 인지할 것

성폭력의 1차 피해는 성폭력 사건 당시에 발생하고 2차 피해는 성폭력으로 인한 훼손을 회복해가는 과정에서 성폭력에 대해 잘 모르는 주변인으로부터 발생한다고들 한다. 그리고 3차 피해는 사법적으로나 다른 방법으로 성폭력 피해에 대해 회복할 수 없는 상태일 때, 피해자가 다시 가해자가 되거나, 자살을 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것을 말한다. 2차 피해와 3차 피해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1차 피해를 없던 것으로 할 수는 없다. 그러나 피해자의 편에서 피해자들의 고통에 공감하며 피해회복에 도움이 되는 행동을 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들은 피해당사자로서 자신의 피해를 직면하고, 사회에 고발하는 가장 어려운 역할을 맡았다. 우리가 맡을 역할은 심판관으로서 피해자가 진짜인지, 가해자가 얼마나 나쁜지 가려내고 처벌하는 역할이 아니라 피해자가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역할일 것이다. 그로 인해 2차피해와 3차피해를 없애고 줄여나가야만 한다. 그것이 대중이 미투운동에 함께하는 방법이다.

행위를 중심으로 검증하는 태도를 내려놓으시라. 그것은 이미 수없이 많은 피해자들이 대중에 서기 전에 스스로를 '꽃뱀'이 아니었나 혹은 '부주의'아니었나 의심하면서 겪었던 어려움들을 다시 되풀이하는 것 뿐이다. 그것은 지옥을 연장하는 것일 뿐, 권리를 보장하는 사회로 가는 길이 아님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태그:#미투운동, #METOO, #권리론, #페미니즘, #성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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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활동가. 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 운영위원. 싸우는 노동자를 기록하는 사람들, 싸람의 기록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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