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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군 추도를 통해 항일전쟁을 다짐하다

전사·병사·피체 후 사망 등 독립군의 순국은 단지 죽음으로 그치지 않았다. 뜻은 살아 독립군 전사의 전투적 삶 속에 체화됐다. 전사한 독립군과 살아남은 독립군은 독립전쟁이란 대의 앞에 하나가 됐다. 추도는 하나 됨을 확인하는 의식(儀式)이었고 이를 통해 항일전쟁의 결의는 더욱 공고하게 되었다.

<독립군 추도가>는 이렇게 외친다.
 
2.산에 나는 까마귀야 / 시체 보고 우지마라
몸은 비록 죽었으나 / 독립정신 살아있다
4.나의 사랑 대한독립 / 피를 많이 먹으려나
피를 많이 먹겠거든 / 나의 피도 먹어다오

독립군의 몸은 죽었지만 그 정신이 살아 있다고 하며 독립을 위한 희생의 결의를 다지고 있다. 서로군정서 의용군 추도식에서 부른 <추도가>도 순국 용사의 뜻을 이어 조국을 광복시킨다고 다짐한다(<독립신문> 1922.8.29.).
 
1.슬푸다 순국한 우리 용사야 / 동지를 버리고 몬져 갓고나
국토를 미복(未復)코 신선사(身先死)하니 / 애달고 원통한 이 몸이로다
2.왜적의 미진멸(未盡滅)을 한(恨)치 마러라 / 최후의 성공을 우리 담당해
용진무퇴한 의용 군인아 / 광복할 날이 머지 안켄네

 

광복을 보지 못하고 순국한 동지에게 의용군으로서 최후의 성공, 곧 광복을 맹세하고 있다.

독립전쟁 도중에 크고 작은 수많은 전투가 있었지만 독립군은 전투를 기리는 의식을 치르진 않았다. 단위 전투의 군사적 교훈을 얻고 다음 전투에 적용하는 과정은 있지만 전투를 기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희생된 독립군은 추모식으로 기렸다. 그들의 뜻은 살아 있는 전사와 함께 하고 있었다.

임시정부와 독립군단에서 독립군 추도식을 열다

독립군 추도식은 1920년 12월 18일에 임시정부 주관으로 처음 열렸다. 이전에 안중근 등 순국한 독립지사 개인에 대한 추도는 있었다. 12월 18일의 추도식은, 강우규와 순국 동포에 대한 추도와 아울러 '전망장사'(戰亡將士: 전사한 독립군)의 추도를 공개적으로 내세웠다. 이 날의 <진망장사추도문>(<독립신문> 1920.12.18.)은 '연길·훈춘 일대(延琿一帶)에서 진망(陣亡)하신 장사', 곧 청산리전투에서 희생된 독립군을 추모했다. '백배의 강적을 대항하여 고전 혈투(苦戰血鬪)에 승첩(勝捷)'을 이어가다가 전사한 장사들의 피로 '반도강산에 자유의 꽃'이 필 것이라고 선언했다. 일본군 대부대와 싸우다가 희생되었다는 내용은 청산리전투의 전사를 뜻한다. 특정 부대가 아니라 곳곳에서 일본군과 싸우다가 희생된 독립군 모두를 가리킨다.

만주에서는 각 독립군단이 희생된 자대(自隊) 군인을 기리는 추모식을 거행했다. 광복군총영은 1921년 1월 8일 참리부(參理部), 사령부, 평북독판부(平北督辦部) 등이 참석해서 홍식 등 7인을 추도했다. 그들은 평북 의주에서 작전하던 중 밀정의 밀고를 받은 일경대의 공격으로 모두 전사 순국했다(<독립신문> 1921.1.15.). 추도문은 '악적을 섬멸하여 제현의 원한을 풀지 못한' 것을 지극한 죄라고 밝히며 반드시 순국 지사의 충혼의 도움을 받아 왜적을 물리칠 것을 다짐한다. 광복군총영은 1922년 4월에도 각지 기관 인원 13명, 신계관 등 광복군총영 5명, 박준모 등 별영(別營) 도영(道營) 9명 등 모두 27명의 추도식을 거행했다.(<독립신문> 1922.4.15.).

서로군정서는 의용대 주관으로 1922년 8월 7일 의용대장 신광재 등 전사·병사·피체 후 순국한 독립군 19명의 추도식을 진행했다. 식은 추도의 취지 설명, 추도문 낭독, 추도가 합창, 순국 용사의 실기(實記) 설명으로 이루어졌다. <추도문>은 '용사'의 순국에 애석하고 통절한 마음이 크지만 그보다 '사업을 계속'할 마음이 더 크다고 밝혔다. 용사의 몸은 죽었으나 그 정신은 살아 언젠가 따라 죽을 의용대의 '뇌수'에 존재하고 있다고 하며, '(광복)사업'을 계속해 성공할 것을 다짐하고 있다(<독립신문 1922.8.29.).
 
육신상 관계로 제군의 몸을 잃은 우리는 옛날 전투선상에서 풀과 흙을 자리하고 총과 검을 베개하고 한 자리 한 베개에서 함께 자고 같이 섰던 그 몸이나 이 몸이나 한 몸이 되었던 몸덩어리가 이제 얼마큼 감손(減損)된 일을 생각하매 곡지통곡지통(哭之慟哭之慟)할 터이나 돌이켜 생각건대 정신상 관계로는 제군이 죽지 않았도다.…제군의 정신이 우리, 장차 따라 죽을 남아 있는 우리 뇌수(腦髓)에 존재하였도다.…우리가 있음이여 제군이 죽지 않았도다.
 

"몸은 비록 죽었으나 독립정신 살아있다"는 <독립군 추도가>의 표현을 추도의 글로 풀어 쓴 것이라 할 수 있다. 순국한 용사의 정신은 그를 이어 항일전을 전개할 용사의 정신에 살아 숨 쉬며 이후의 항일전을 함께한다. 죽음과 삶은 하나가 되고 전사한 독립군의 몸은 없지만 그 정신은 항전의 대열에 참가한다. 독립군 추도의 본질은 순국한 군인과 산 군인이 하나 됨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통의부는 1922년 10월 14~15일 관전현에서 순국의사(義士) 추도회를 가졌다. 요직에 있던 최형준 등 11명, '농업에 종사하던' 김성렴 등 33명, 병사한 권영규 등 46명의 추도식이었다(<독립신문> 1922.11.8.). 최형준은 독립단 간부로 1920년 일경과 교전하다가 전사했다. '농업에 종사'라 한 것은 일반 사병을 뜻한다. 한편으로 농사짓고 필요시 의용군으로 항일전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당시 국내 신문(<동아일보> 1923.1.21.)도 이들 46명을 '전사한 독립군'으로 기록했다.

통의부의 <추도문>은 '압록강변', 곧 국경 지대에서 풍찬노숙하며 왜적과 전투하던 동지를 추억하며 그들의 순국이 민족의 구원이 되었고 남은 자는 최후까지 분투하여 조국을 광복시킬 것이라고 다짐한다.

1921~1922년 만주의 추도식을 통해 독립군 전사자에 대한 추도가 독립진영의 중요 의식으로 자리 잡았다. 이후 왜적과의 전투에서 전사하거나 피체되어 순국할 때마다 추도회를 가졌다.

국민대표회의에서 추도식

1923년 1월에는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며 순국제현추도제(殉國諸賢追悼祭)를 거행했다. 만주에서 각 독립군단이 거행하던 추도식을 각지 독립군단 대표가 모인 통일회의에서 개최한 데 뜻이 깊었다. <독립신문>(1923.1.31.)은 이를 두고 전민족을 대표하는 국민대표회에서 추도회를 거행함은 초유의 큰 일로 광채를 내는 '장엄 신성한 의식(儀式)'이라고 했다. 순국지사 추도가 전민족의 의식이 된 것이다.

이 추도회는 3.1혁명 때 맨손으로 적탄에 맞서 싸우다 순국한 지사, 왜적에게 피체되어 고문사한 지사, 사형으로 순국한 지사, 왜적과의 결사전에서 적탄에 전사한 독립군 등 모든 순국 지사를 포함한 의식이었다. 특히, 초야에서 몸과 마음을 독립을 위해 애쓰다가 희생한 무명 순국자가 수없이 많다고 하며, 유명 순국자뿐 아니라 '무명의 순국자'를 더욱 경앙·추모하는 자리라고 밝혔다. 무명의 순국이 중요함을 언급한 첫 추도식이었다.

추도제는 국민대표회의 대표 약 90명과 일반 동포들이 참석했다. 김동삼의 식사(式辭)로 시작된 추도식은 일동 국궁경례(鞠躬敬禮), 신숙의 추도문 낭독, 추도가 병창, 남형우 등의 추도사로 이어졌다. 애끓는 추도의 마음을 가지고 1시간 반 동안 진행되었다.
 
이승만이 탄핵되고 박은식이 대통령에 취임하여 독립전쟁 노선을 내세우고 정부 차원에서 독립군 추도식을 거행했다.
▲ 임시정부의 독립군 추도식 기사(독립신문 1925.5.5) 이승만이 탄핵되고 박은식이 대통령에 취임하여 독립전쟁 노선을 내세우고 정부 차원에서 독립군 추도식을 거행했다.
ⓒ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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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임시정부는 정부 차원에서 순국 지사, 독립군에 대한 추도식을 했다. 이를테면 1925년 4월 7일 동포 수백여 명이 삼일당(三一堂)에 모여 추도식을 거행했다. 식은 애국가 제창으로 시작하여, 이유필의 식사, 박은식 대통령의 추도문 낭독, 묵념, 추도사 낭독으로 이어졌다(<독립신문> 1925.5.5.).

정부 차원에서 대통령이 추도문을 낭독한 것은 뜻 깊었다. 순국 지사에 대한 추도식이 정부 차원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추도는 '진망장사', 곧 순국 독립군을 중심으로 했다. 당시 국내 신문(<동아일보> 1925.4.17)도 이 추도식을 '독립운동이 일어난 뒤에 싸워 죽은 독립군의 추도회'라고 기록했다.

1920년에 강우규 지사를 포함해 진망장사추도회가 개최되었지만 이후 지속되지는 않았다. 대통령 이승만의 인식이 반영된 결과였다. 곧 순국 독립군에 대한 추모가 독립전쟁의 강화로 이어지는 것을 이승만의 외교 노선은 외면하고 있었던 것이다. 1925년 이승만이 탄핵되어 물러나고 박은식이 대통령이 취임하자 바로 순국 독립군 추도식을 개최하여 독립전쟁 노선을 뚜렷하게 밝혔다.

봉분 없는 평토장(平土葬)의 의미

독립군은 전사한 동지를 군례(軍禮)로 장례 치렀다. 가능하면 묘를 써서 장례를 치르는 것이 독립군의 바람이었다. 1924년 중국 보갑대(保甲隊)가 통의부 의용군을 공격해 의용군 4명과 민간인 2명이 전사했다. 독립군 측은 중국 관리에게 교섭하여 전사자를 인도받아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독립신문> 1924.2.2.).

장례를 공개적으로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광복군사령부 영장(營長) 최찬은 일경과 교전하고 중상을 입었다. 동지들이 보호해서 근거지로 돌아왔으나 곧 순국했다. 광복군사령부는 왜적에게 영장의 전사를 알리지 않기 위해, 또 중국인 지주가 매장을 허락하지 않을 것 같아서 평토장(平土葬)으로 장례를 치렀다.

평토장은 임시로 묻는 것이다. 광복 후 조국으로 옮겨 봉분을 세우고 정식으로 장례를 치르겠다는 다짐이었다(한철수, <나의 길>). 독립지사들은 사망할 경우 왜적이 있는 곳에 묻히는 것을 수치로 알았다. 의병장이었던 차도선은 일제가 만주에 만든 집단부락에 수용되었는데 임종할 때가 되자 "죽어서도 일본 놈이 보기 싫으니 내가 살던 두지동에 묻어 달라"라고 유언했다(강용원, <죽은자의 숨결 산자의 발길>).

서로군정서 독판 이상룡은 유해를 만주에 묻고 광복 후에 조국으로 옮기라고 유언을 남겼다. 우선 장례를 치른 후 만주의 시국이 불리해 가족들이 환국해서 유해를 고향 안동으로 옮기려고 했다. 하지만 중국 퇴병들의 방해로 성공하지 못하고 결국 가매장했던 곳에 다시 모셔 장례를 치렀다. 자부 허은(<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은 이상룡의 유언대로 된 일을 겪고 '이 어른 무슨 영(靈)이 있기는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독립군은 죽더라도 조국이 광복될 때까지는 고향에 묻히려 하지 않았다. 평토장은 죽은 뒤에라도 광복된 조국의 고향에 돌아가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독립군의 정신이 묘소 모시는 데까지 드러났다. 각지에 흩어져 있던 순국 독립군을 모아 묘역을 만들기도 했다. 국민부는 인멸해가는 독립군 묘소를 안타깝게 여겨 1929년 '명망 있는' 독립군 묘소를 한데 모으기로 결정했다. 만주 각지에서 유해를 모셔 한 줄에 10여 자리에 넉 줄을 조성해서 40여 독립군 유해를 모셨다(강용권, <죽은자의 숨결 산자의 발길>).

국내 진입 작전 도중 전사할 경우에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공동묘지에 묻혔다. 1924년 2월 의용군 부사(副士) 김종호의 지휘로 6명의 독립군이 강계로 진입해 일경과 교전했다. 일경의 막사를 불태우는 등 전과가 컸는데 밀정의 밀고로 피습을 받아 3명의 독립군이 전사했다. 그 중 1명은 주민들이 그곳 출신 이종방임을 알아 그 가족이 유해를 찾아가 장례를 치렀다. 2명은 누군지 알 수 없어 주민들이 공동묘지에 모셨다(1924.3.3.).

전사, 병사해서 군인의 예로 장례를 치렀지만 광복 후 반장(返葬), 환국하지 못한 독립군 전사가 많거니와, 이름도 남기지 못한 희생은 더욱 많다. 광복군총영의 한철수(<나의 길>)는 이렇게 말했다.
 
생사를 같이하던 동지들 중 전사, 피살 등으로 순사(殉死)한 분이 수다하나 이제 와서 성명들이 미상하여 죽백(竹帛)에라도 기록하여 주지 못하는 형편이니 진실로 개탄을 금할 수 없다.

그가 지휘관 최찬에 대해서는 기억이 뚜렷해 순국 상황을 기록했지만 광복군총영의 사병, 특히 다른 영(營)의 순국 군인은 이름을 기억하기 어려웠다.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전사·병사한 희생이 수없이 많았다. 이름은 물론이고 순국 상황을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국내 진입 작전에서의 전사 통계

항전의 대열에서 전사·병사한 독립군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다만 기록을 통해 그 일부분을 확인하면 이렇다. 오기영 기자가 남긴 기록(주1)에 따르면, 1920년-1927년 사이에 평북 지역에서 작전 중 전사 순국한 독립군이 414명이고, 압록강 대안 만주 지역에서 일경과 교전하다 순국한 인원이 424명이다. 평북 국경 일대에서 8년 동안 838명이 전사 순국했다. 여기에 피체 후 순국한 인원을 합하면 희생은 더욱 많다. 평북 지역 작전 중 피체는 4228명, 압록강 대안 만주에서의 피체가 4411명으로 모두 8639명이다.

피체 인원에는 독립군뿐 아니라 여러 독립군단의 행정 요원도 포함되었다. 여하튼 수 천 명에 이르는 피체 인원 가운데 재판 후에 사형당하거나 고문으로 옥중 순국한 인원을 고려하면 희생된 독립군 수는 훨씬 증가하게 된다. 게다가 일경은 만주에서 체포한 독립군을 국내로 송환하다가 강가에서 몰래 학살하기도 했으므로 그 인원까지 합하면 1920년부터 1927년까지 평북 국경 지역에서 희생된 독립군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하겠다.
 
압록강 국경 지대에서 독립군의 전사 통계, 일제 경비시설 정보, 순국 독립군에 대한 추모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 1929년 오기영 기자의 압록강 취재 연재 기사 압록강 국경 지대에서 독립군의 전사 통계, 일제 경비시설 정보, 순국 독립군에 대한 추모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 국사편찬위원회(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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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일제 경무국이 작성한 '1920년-1933년 사이 국경 비적 연도별 상황표'에 따르면 국내와 국경 대안에서 일경에게 피살된 '비적'(독립군)은 다음과 같다.(주2)

1920년 115명, 1921년 259명, 1922년 219명, 1923년 94명, 1924년 85명, 1925년 163명, 1926년 14명, 1927년 4명, 1928년-1929년 없음, 1930년 1명, 1931년 4명, 1932년 8명, 1933년 4명. (계 970명. 1927년까지 953명.)

상황표의 '비적'은 일제 측 용어이고 실제는 무장 독립군을 뜻한다. 만주사변 후에는 중국 마적, 병비(兵匪) 들이 침입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1920년대에는 중국 비적이 국내에 침입해서 일경과 전투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국내 신문도 1920년대 중국 비적의 국경 침입 전투를 전하는 기사는 거의 없다.

1927년까지 953명이다. 오기영의 기록 838명과 비교하면 115명 더 많다. 국내 작전은 평북을 중심으로 하고 일부 함경도와 평남도 있었다. 그렇게 볼 때 115명은 평남과 함경도 작전에서 순국한 것으로 파악된다. 두 기록이 사실상 근접하고 있다.

'상황표'를 지역별, 시기별로 다른 통계와 비교해도 비슷하다. 평북도지사의 발표에 따르면, 1924년 1-10월 평북 일대에서 희생된 '독립단'은 40명이었다(1924.11.20.). 평북에서 독립군 작전이 활발했음을 고려하고, 평북의 11-12월, 평남과 함경도를 포함하면 '상황표'의 1924년 전체 85명과 큰 차이는 없겠다. 또 일제 경무국 발표에 따르면, 1925년 1월부터 3월까지 국경 방면에서 작전을 하다 희생된 '무장단', 곧 독립군은 101명이었다(1925.3.26.). 삼시협정으로 1925년 후반기부터 국내 작전이 급격히 감소한 것을 감안하면, '상황표'의 1925년 163명 통계와 일맥상통한다.

1926년부터 급감하면서 1928-29년에 없는 것도 삼시협정의 영향이었다. 그 무렵 국내 진입작전은 거의 소강상태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당시 신문에도 1925년까지 독립군의 국내 작전 기사가 많다가 1926년부터 줄어들어 1927년에는 급감한다. 국내 작전이 전혀 없진 않았지만, 유일당운동과 삼부통합운동이 전개되던 시기, 곧 독립군이 재편되던 시기에 국내 작전이 유보하고 있었다.

절대적이진 않지만, 오기영의 기록과 일제 경무국 통계는 근접한다. 국내 진입 작전, 강안(江岸)에서의 작전 중에 일경과 전투하다 순국한 독립군 수를 가늠하는 부분적 잣대로 파악할 수 있다. 오기영의 기록에 따르면, 1920-27년에 연인원 14,249명이 평북 지역을 경계로 작전해서 경찰주재소 등 관공서를 103회 공격하고 149명을 사상시켰다.(주3) 470회 일경과 교전하여 414명이 희생되었으므로 단위 전투마다 1명 정도 희생된 셈이다. 또 연인원 대비 2.9% 곧 100명 중 3명 정도가 작전 중에 전사 순국했다. 정규 의용군뿐 아니라 모연대나 행정요원도 포함되어 있지만, 모두 일경과 교전하여 희생되었으므로 독립군 전사로 이해할 수 있다.

연도별 희생자 수를 보면 1920~1925년이 절대 다수이고 그 이후는 소수이다. 독립군의 국내 진입 작전은 1925년 삼시협정 전에 활발했다. 1921~1922년에 200명 이상으로 가장 많이 희생된 것은, 경신참변의 영향으로 소부대 전술을 활용하여 국내 일경 주재소 공격 등의 작전을 강력하게 전개했기 때문이다.

국내 진입 작전에서의 희생이 단위 작전별로 소수였던 반면에 국경 대안에서의 희생은 단위 작전별로 대개 다수였다. 일경과의 조우전(遭遇戰)이 아니라 밀정 등을 통해 정보를 확보한 일경 공격대의 급습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1925년 2월 25일의 고마령(압록강 대안 60리 거리)참변이 있다. 초산경찰서 일경 60여 명은 밀정에게 노출된 참의부 군사회의 장소를 급습했다. 치열하게 항전하다가 참의부 중대장 최석순 등 40여 명이 순국했다(1925.2.28.). 또 1920년 12월에는 광복군 제2영 대원 등 7명이 만주에서 일경 추격대의 공격을 받고 전사 순국했다(<독립신문> 1921.2.25.).

일본군을 상대로 한 전투에서 전사

1920년대 국내 진입 작전과 국경 대안 작전 때 전사는 주로 일경과의 전투에서 있었다. 독립군의 작전이 주로 국경 일대의 일경 주재소 공격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경신참변 전에는 일본군과, 만주사변 후에는 일본군, 또는 일본군·만주국군의 혼성 부대를 상대로 전투했다. 경찰 상대의 소부대 전투가 아니라 일본군을 상대로 한 큰 규모의 전투가 전개되었다. 희생도 컸다. 단위 전투에서의 확증적 통계는 없지만 회고 등을 볼 때 일본군(일만군) 상대의 전투 때 희생은 다음과 같다.

▲청산리전투 : 청산리전투에 대한 첫 기록인 <대한군정서보고>(<독립신문> 1921.2.25.)는 일본군 1254인을 사상(死傷)시키고 아군 1명 사망, 부상 5인, 포로 2인의 피해가 있었다고 했다. 북로군정서 중대장 김훈의 <북로아군실전기>(<독립신문> 1921.3.12.)도 아군 전사 1명, 부상 4명으로 기록했다. 실제 독립군 전사는 훨씬 많다. 적게 적은 것은 전투 보도에서 아군의 피해를 줄이는 관례에 따른 것이라 하겠다. 일본군의 작전 보고서도 일본군 사망이 실제와 달리 극소수라고 했다.

연성대를 이끌고 전투를 지휘했던 이범석은 회고(<우둥불>)에서 청산리전투 때 북로군정서 전사를 이렇게 밝혔다.

백운평전투: 전사 20명, 중상 3명, 경상 수십 명
천수평전투: 전사 2명, 부상 17명
마록구전투: 전사 40명(100여 명의 사상자)
합: 전사 60여 명, 부상 90여 명.

 
어랑촌(마록구) 고지에 매복한 북로군정서는 낮은 곳에서 전진해오는 일본군을 공격해 큰 타격을 주었다.
▲ 옛 만주상세지도 어랑촌 부분 어랑촌(마록구) 고지에 매복한 북로군정서는 낮은 곳에서 전진해오는 일본군을 공격해 큰 타격을 주었다.
ⓒ 텍사스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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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평전투와 마록구전투에서 전사자가 많다. 마록구에서는 주력부대가 퇴각할 동안 1개 소대가 좁을 길을 지키고 일본군의 추격을 막다가 모두 영웅적으로 전사했다(이범석, <우둥불>). 여러 전투의 전사자와 이를 종합한 전사자의 수가 대체로 일치하므로 이 회고 내용은 정확하다고 판단된다. 전사자는 거의 이름이 밝혀지지 않았다. 북로군정서 종군장교 강화린은 해방 후 "무명용사와 경신참변으로 희생된 사람들을 위해 비석이나마 세워달라"는 말을 자주 했다(김재승, <만주벌의 이름 없는 전사들>). 그는 "청산리전투는 우리들만이 한 전투가 아니다"고 했다. 북로군정서뿐 아니라 좁게는 전투에 참가한 홍범도연합부대, 넓게는 아낌없이 독립군을 지원했던 전투 지역의 동포들, 나아가 경신참변으로 희생된 동포들 모두가 전투의 주역이라는 인식이라 하겠다. 그럼에도 주력부대의 퇴각을 위해 남아 적을 막고 전멸을 택했던 북로군정서 소대원들의 충혼을 기리고자 한 것은 분명하다.

청산리전투에서 홍범도연합부대의 전사 통계는 없다. 홍범도의 회고(<홍범도의 일지>)에 따르면 청산리 길목 어구의 전투에서 3명이 "굶고 얼어 죽었다." 또 안도현으로 가는 길에 숙영했는데, 적의 기습을 받아 불을 쬐던 군인이 모두 전사했다고 한다. 이종학(홍범도부대원)은 이 때 6명이 전사했다고 회고(<홍범도 군대 독립군>)했다. 그밖에 전사 상황에 대한 설명은 없는데, 실제 전사자가 극소수였기 때문이 아니라 교전하며 전술적으로 흩어졌다 다시 모였다 하는 과정에서 독립군 전사에 대한 온전한 파악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겠다. 홍범도연합부대는 500명 정도가 참전했다.(주4) 전투 후 안도현에 도착했을 때는 그보다 많이 적었다. 그 차이를 모두 전사로 할 수는 없다. 연합했던 다른 부대들과 전술적으로 분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드러나지 않은 전사자도 있다 하겠다.

봉오동전투도 전투 직후 <독립신문> 발표로는 4명의 전사자가 있다 했는데, 다른 기록으로 보아 최소 11명의 전사가 확인된다. 일본군은 30명 안팎으로 발표하기도 했지만, 기록을 검토하면 과장으로 판단된다. 당시 국민회 발표와 회고(<홍범도 군대 독립군>) 등으로 보아 최소 11명의 전사가 있었음은 사실이다.

▲한국독립군의 전투 : 만주사변 후 한국독립군의 전사 통계도 밝혀지지 않았다. 조경한의 회고(<백강회고록>)에 따르면 쌍성전투 때도 전사는 많지 않았다. 항일중국군과 연합해 두 차례에 걸쳐 쌍성을 공격해서 점령했는데 비행기 공습을 앞세운 일만군이 반공했다. 군수품 손실이 컸지만 인명 피해는 적었다. 기록상 중국인의 회고에 쌍성전투 때 3명의 희생이 확인된다. 중상을 입고 대열에 합류하지 못한 독립군 3명을 중국인이 숨기고 보호해주었는데 일본군의 수색으로 발각되어 모두 학살되었다.(주5) 그 외에도 쌍성전투에서 어느 정도 희생이 있었다 하겠다.

한국독립군은 구국군과 연합해 치른 동녕현전투 때 전사가 가장 많았다. 현성을 공격, 점령하는 과정에서 강진해 등 수십 명이 전사했다(조경한, <백강회고록>). 동녕현성은 만주국군도 있었지만 주력부대는 일본군으로 대포와 장갑차까지 갖추고 있었다. 한국독립군과 구국군은 일본군 주력부대가 수비하는 서문을 공격했고 이 과정에서 희생이 컸다.

임시정부 요청으로 한국독립군 지휘부는 관내로 이동하고 잔류부대는 결사항전을 결의하고 만주 산악지대로 들어갔다. 최악·안태진부대인데 안태진은 행군중 적과 교전하다 전사했다. 안태진과 함께 사병들의 희생도 있었다 하겠다.

그밖에 큰 전투에서 한국독립군의 전사 순국은 상대적으로 많지 않았다. 일본군 간도임시파견대를 공격한 대전자령전투에서도 경상자가 4-5인 정도였다(조경한, <백강회고록>). 유리한 곳에 매복해서 공격했기 때문이다. 한국독립군은 신속한 전술적 행군을 바탕으로 방어전을 피하고 공격전을 중심으로 했다. 넓은 지역을 이동하며 공격 후 적의 포위에 들지 않고 빨리 퇴각하는 전술을 구사하여 상대적으로 희생이 적었다.

▲조선혁명군의 전투 : 만주사변 후 조선혁명군의 전사는 계기화의 회고(주6)에 자세히 밝혀져 있다. 그의 회고는 조선혁명군 전투 기록이면서 아울러 전사 기록이기도 하다. 조선혁명군 정규의용군은 초기 전투에서 큰 피해가 없었다. 다만 재향에서 신규 모집한 부대는 전사가 많았다.

계기화에 따르면 2개 중대의 병력을 새로 모집해 중국군과 함께 무순(撫順) 공격에 나섰는데 1개 중대는 42명이 전사하고 81명이 생존했으며, 1개 중대는 74명이 전사하고 69명이 생존했다. 무장을 갖추었던 조선혁명군 주력과 달리 새로 모집한 부대는 비무장 상태로 전선에 투입되어 많이 희생되었다. 생존자는 결국 무장 의용군으로 편제되지 못하고 귀향했다. 이들은 조선혁명군 정규부대는 아니었지만 편제된 것은 사실이며 따라서 계기화는 이들은 '전사'로 기록했다. 초기 전투에서 116명의 전사자였다.

길림자위군과 연합해 일만군과 싸운 조선혁명군 주력부대는 초기 작전에 성공하고 통화현에서 퇴각 작전을 펼쳤다. 도강 과정의 교전에서 2명의 첫 전사가 나왔다. 중상자 2명은 안락사(지금 시대의 안락사와는 다른 개념 - 편집자 주)했다. 이어 사첨자에서 적과 교전하여 7명이 전사 순국하고 3명이 안락사로 순국했다. 행군 시작 3일 만에 30여 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이후 조선혁명군은 산악 지대에 근거지로 구축하고 고산준령 사이를 오가며 치열하게 항일전을 전개했다. 타곡산에서 중국군 왕봉각부대와 연합해 활동했는데 일만군과의 교전에서 17명이 전사하고 중상자 4명이 이동 중 사망해서 모두 21명이 전사 순국했다. 1933년 음력 7월 현재 상황을 보면, 100여 명의 '인원 손실'이 있었는데 전사 외에 병사나 동사도 포함된다. 이후 1934년 정월(음력)까지 40여 명이 또 희생되었다. 초기 전투부터 1934년 초까지 모두 140여 명이 순국했다.

이어 관전현 하루하에서 일만군 3000-4000명의 포위를 뚫으려고 조선혁명군 300여 명이 결사적으로 전투해서 120-130명이 전사했다. 조화선 중대는 탈출로를 뚫으려고 적과 육박전을 하면서 모두 전사했다 한다. 계기화는 하루하전투가 독립군이 치룬 남만주 최후의 큰 전투였다고 말했다.

계기화는 1935년 8월(음력)까지 조선혁명군과 연계를 지녔는데 하루하전투 이후의 전사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의 회고로 보면 하루하전투까지 모두 260-70명이 희생되었는데 그 가운데 150-180명을 확실한 전사로 기록했다. 그 외에 부상당한 뒤의 사망과 병사 등도 포함되었다. 이들도 연이은 전투 속에서 순국했다. 여기에 주력 부대로 편제되지 못한 비무장 중대 116명의 전사까지 포함하면 370-380명 정도가 전투에서 희생되었다. 하루하전투 이후의 전사 등을 고려하면 전사 순국은 더 많다.

계기화의 회고는 '구체적으로' 독립군 희생의 숫자를 밝힌 유일한 기록이다. 이 회고는 비록 전사자 이름은 전혀 없지만, 전사 상황 일지(日誌)라 할 정도로 보기 드문 기록이다. 하지만 회고가 정확한지 의문이 전혀 없지는 않다.

그의 회고는 연도가 잘못 기록된 경우가 있다. 또 조화선 중대가 전멸했다고 했는데, 실제 조화선 중대장은 생존해서 항일연군에 참가했고 1938년에 전사했다는 기록도 있다. 따라서 전멸했다는 조화선 중대도 전사한 것이 아니라 주력 부대에서 분리되어 이후 따로 활동했을 수 있다.

이렇게 보면 계기화의 회고에 나타난 전사 통계가 전적으로 정확하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직접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것이니, 숫자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만주사변 이후 조선혁명군 수백 명이 전사 순국한 것은 사실이다. 전사자 대부분은 이름을 남기지 못했다.

이름을 남기지 못한 독립군 전사들

이상으로 볼 때 봉오동전투, 청산리전투, 대전자령전투 등 일본군 단독부대와 싸울 때는 오히려 전사가 많지 않았다. 상대적으로 소부대의 국내 진입 작전과 만주에서의 일만군, 일경과의 교전에서는 전사가 많았다. 국내 진입 작전은 오래 동안 지속적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희생이 많았다.

또 만주사변 후 주로 일만군 혼성부대와 싸웠던 조선혁명군의 전사도 수백 명에 이를 정도로 많았다. 한국독립군도 수십 명의 전사가 있었다. 공성·수성 전투, 기습공격 전투를 치른 한국독립군은 전투 규모가 비교적 컸는데 전사자가 상대적으로 적은 것은 넓은 지역을 이동하는 공세적 전술 때문이었다. 곧 일만군의 포위망이 구축되기 전에 이동하여 전략적 요지를 선점하고 이동하는 일본군, 또는 일만군을 공격하거나 한중연합군의 군사력으로 제압할 수 있는 현성을 공격함으로 희생을 줄일 수 있었다.

조선혁명군은 상대적으로 빨리 일만군이 장악한 남만주에 근거했고 먼 거리로 군사적 이동을 하지 않았다. 산악지대를 근거지 삼아서 일만군의 포위에 대항해서 치열하게 싸웠다. 포위망을 구축한 일만군의 대공격에 때로 공격 전술을 택했지만 결국 방어 전술에 중심을 둘 수밖에 없었으므로 상대적으로 조선혁명군은 전사가 많았다. 3000-4000명의 포위 속에서 격전을 치르다 120~130명이 전사한 하루하 전투가 대표적이다.

앞서 대략적으로 전사 통계를 보았지만 여러 전사의 정황이 실제 전사자를 포괄한다 할 수 없다. 해방 직후 '독립군 전사 조사위원회'를 조직해서 조사했다면 개략적으로라도 알 수 있었겠지만, 반민특위도 강제로 해산되는 때라서, 전사 통계의 실제를 알 수 있는 기회는 없었다. 독립운동사 연구도 어려운 시절이었다.

위 통계들은 후일의 기록으로 확인되는 부분에 한정되었고, 기록에 남지 않은 독립군의 전투와 전사(戰死), 그리고 전사의 주변과 관련된 희생은 지금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많았다. 위에서 본 통계들은 그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숫자가 독립전쟁의 실제를 알려준다고 할 수 없지만, 그 숫자마저 온전히 파악되지 않고 부분에 그칠 수밖에 없다. 나아가 이름을 남기지 못한 무수한 독립군 전사(戰士)의 전사(戰死)는, 독립군 탄생 100년이 지난 지금 충분히 밝혀지지 않았다.

일본군과의 전투, 국내 진입 작전과 만주 작전에서 일경과의 전투, 만주사변 후 일만군과의 전투 등 어떤 전투건 독립군은 자신의 위치에서 적과 싸우며 결사항전을 했다. 전사는 총으로 독립을 외치다 순국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두려워하지 않고 빛나는 죽음을 택했으며 살아남은 독립군은 그들을 조국의 제단에 바치고 그들과 하나가 됨을 다짐했다. 항일전쟁의 뒤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영웅적 전사와 희생(병사, 옥사)이 있었다.

(주)
1)오기영, <압록강상이천리>, <동아일보> 1929년 8월 23일. 기사는 일제 경무국 통계를 바탕으로 했다 하겠다.
2)<自大正九年至昭和八年間國境匪賊累年狀況表>, 朝鮮總督府警務局 編, <<最近に於ける朝鮮治安狀況 昭和8年>>, 巖南堂書店, 1966, 233쪽.
3)오기영, 위의 글.
4)1500명 정도로 파악한 일제 문서도 있지만, 전후 내용을 검토해보면 사실과 다르다. 홍범도는 520명으로 회고했고, 500명 정도로 파악한 일제 문서도 있다.
5)徐明勛, <獨立軍名將李靑天>, <<哈爾濱市朝鮮族百年史話>>, 黑龍江人民出版社, 2008, 66-67쪽.
6)계기화, <삼부·국민부·조선혁명군의 독립운동 회고>, <<한국독립운동사연구 2>>, 1987, 17-35쪽.

덧붙이는 글 | '새로 쓰는 독립군사'는 8월 18일에 이어집니다. 다음 이야기는 '압록강을 울린 총성, 총독을 저격하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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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대한국 독립군의 백만용사야 조국의 부르심을 네가 아느냐'-'독립군가' 1절. 지은책 - 신대한국 독립군의 백만용사야(일제강점기 겨레의 노래사), '황국신민'의 시대, '책'의 운명(조선-일제강점기 금서의 사회사상사), '책'-사슬에서 풀리다(해방기 책의 문화사), 고서점의 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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