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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운산 장군은 북만주 제1의 거부이자 무장투쟁을 전개한 항일독립투사였다.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패시키고 빛나는 승리를 전취한 제1의 요인은 수년 간 독립군을 훈련시키고 양성한 최운산 장군 형제들의 헌신과 희생의 결실이었다.
▲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항일독립투사 최운산 장군 최운산 장군은 북만주 제1의 거부이자 무장투쟁을 전개한 항일독립투사였다.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패시키고 빛나는 승리를 전취한 제1의 요인은 수년 간 독립군을 훈련시키고 양성한 최운산 장군 형제들의 헌신과 희생의 결실이었다.
ⓒ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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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운산은 대단한 전략가다. 그리고 담대한 경륜의 소유자다. 봉오동전투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찌르고 일제의 반격을 예상하면서 지체없이 그곳을 떠나기로 했다. 봉오동이 다른 부대 지휘관들이야 잠시 머물던 지역이지만, 최운산 형제들에게는 거액을 들여 황무지를 개간한 소유지였다. 그런 땅을 두고 미련없이 떠나기란 여간해서 쉽지 않았을 것이다. 

연합부대 대부분이 백두산 방향으로 이동한 데 비해 최운산은 연해주 쪽을 택하였다. 복수심에 불탄 일본군이 막강한 군사력을 동원하여 뒤쫓을 것을 내다보고, 우선 러시아령으로 옮겨 병사들을 보호하면서 다시 기회를 찾자는 전략이었다. 

당시 최운산 장군이 이끄는 주력부대는 봉오동 동북쪽에 있는 라자구 방향으로 행군하고 있었다. 일본군을 봉오동에서 라자구까지 산길이든 평지이든 훤히 알고 움직이는 독립군을 도저히 추격할 수 없었다. 이 지역에는 최운산 장군이 독립군을 훈련시키면서, 그리고 무역을 위해 오가면서 만들어 놓은 비밀장소도 있었다. 아무리 일본군이 열심히 추격해도 독립군을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주석 1)


대한북로독군부의 대원이었던 김재규는 1958년에 당시의 이동과정에 대해 증언하였다.

나재거우 전투, 우리는 봉오골 전투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그곳을 떠나서 나재거우에 당도하였다. 홍범도와 안무 군대는 떨어지고 우리 의군부와 최진동 군인 기타가 합하여서 1,008명이 독군부라고 명칭하고 지도부에는 최진동ㆍ허영장ㆍ김소흥, 중대장 전승한(서울 병정 (兵丁) 체조시면 핫 - 뚤 하던 사람)ㆍ강창대(포수대장 포수 72인이 따로 있었음)ㆍ황중대장(中隊長) (보?人) 기타가 있었다. 바로 1920年ㆍ 10월 15일이였다…….

일군과 마주 만나서 몇 시 동안 전투를 하다가 별로 승패가 없이 왜놈 몇 놈을 잡고 떠나서 림(林)을 향(向) 떠났다. 팔면통에서 中軍(중국군)과 가두담판, 당시 빠만퉁 지대에는 동삼성 장작림 휘하 장왕청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우리가 기지대에 당도하니 중국군대 3천 명이 우리를 반항하여 길을 막고 있었다. 사세는 위(急)하였다. 

우리는 일제히 진지를 차지하고 만일 그들이 우리를 무장해제를 시키거나 또는 가는 길을 빌리지 아니한다면 최후 행동이라도 하겠다는 것을 약속하였다. 우리 지도관 최진동과 허영장은 중국 당국과 담판을 청하였다…….

우리 대표들은 모두 무기를 손에 쥐고 만일 그들이 우리 지도관을 억압한다면 그들은 불응하고 대항하게 될 터이니, 그 시각에는 우리 군인들도 일제히 관군들을 대항하겠다고 선언하고 준비하였다. 매 순간이 위급하고, 위험한 처지였다. 그러나 담판은 양호한 결과를 가져왔다…….

어마어마하게 담판을 마치고 우리는 퇴진하여서 떠났다 … 우리는 이수진ㆍ평양진ㆍ담벽진을 걸쳐서 밀산량경을 지나서 나중에는 요하강 양경에 담도하여서 원동공화국 지대인 이만 등지 우수리강변에 당도하였다. 우리가 팔면통에서 요하현까지 행진하는 도정에서 각 중국행정기관에서, 각분사기관에서, 지방 평민들께서 나와서 우리를 환영하면서 우리는 상부 명령에 의하였고 또는 우리들의 성의로써 당신들의 성공을 축하한다고 하고 많은 식료, 금전으로 우리를 봉조하여 주었다. (주석 2)

 
최운산 장군(가운데)으로 추정되는 사진 속 인물이 여운형(왼쪽)과 함께 한 사진이다. 이 사진을 입수 발굴한 반병률 교수는 최운산 장군(가운데)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했다.
▲ 1922년 모스크바 극동인민대표대회에 참석할 당시 사진(출처 : 반병률 교수) 최운산 장군(가운데)으로 추정되는 사진 속 인물이 여운형(왼쪽)과 함께 한 사진이다. 이 사진을 입수 발굴한 반병률 교수는 최운산 장군(가운데)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했다.
ⓒ 반병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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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운산 부대는 이동 중에 청산리 근처에서 일본군을 만나 선제공격으로 큰 타격을 입혔다.

청산리 근처에서 독립군 전투상황을 보고받은 최운산 장군은 일본군의 작전을 교란시키기 위해 라자구 근처에서 일본군을 선제공격했다. 독립군의 그림자도 보지 못했던 일본군은 라자구에서 벌어진 독립군의 갑작스런 공격에 치명타를 입었다. 대승을 거둔 독립군은 다시 연해주로 길을 떠났다. (주석 3)


주석
1> 최성주, 앞의 책, 70쪽.
2> 신주백, 앞의 글, 재인용.
3> 최성주, 앞의 책, 70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무장독립투사 최운산 장군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그동안 연구가들의 노력으로 연해주와 서간도의 독립운동은 많이 발굴되고 알려졌지만, 2020년 봉오동ㆍ청산리대첩 100주년을 보내고도 두 대첩에 크게 기여한 최운산 장군 형제들의 역할은 여전히 묻혀진 상태이다.
태그:#최운산, #최운산장군평전, #무장독립투사_최운산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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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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