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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이 선물한 군복과 모자를 착용하고 권총을 앞에 걸고 기념 촬영한 홍범도 장군과 최진동 장군(오른쪽)
▲ 극동인민대표대회에 참석할 당시 홍범도 장군과 최진동 장군(오른쪽) (출처 : 반병률 교수) 레닌이 선물한 군복과 모자를 착용하고 권총을 앞에 걸고 기념 촬영한 홍범도 장군과 최진동 장군(오른쪽)
ⓒ 반병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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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7월 중일전쟁부터 1945년 8월 일제패망 때까지 만 8년간 조선과 만주는 일제의 가혹한 수탈구조가 비슷했다. 전쟁물자 조달처가 되어 인적ㆍ물적 자원을 빼앗긴 채 기아와 질병에 시달렸다. 

민족주의자들은 여기에 감시와 탄압이 가중되었다. 괴뢰만주국을 세워서 70만 관동군이 겹겹이 포진하고 각종 친일단체와 밀정이 우글거리는 만주에서 더 이상 무장독립운동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물(교민)이 없는 연못에서 물고기(독립군)가 활동하기란 불가능한 시대였다.

일제는 이른바 총력체제 구축이라는 명분 아래 왕년의 독립운동가들의 동태를 주시하면서 한편으로는 전향공작을 전개하였다. 최운산 형제들을 그냥 놔둘 리 없었다. 

만주 무장독립군을 대표하는 최진동 장군에 대한 일제의 감시와 회유는 상상을 초월했다. 일제는 최진동 장군의 집 옆에 3층 건물을 지어 요정으로 운영했다. 3층에서 보면 마당과 집안이 훤히 내려다보였고 최 장군의 일거수일투족을 손쉽게 감시할 수 있었다. 예전처럼 동생 운산과 한 집에 살면서 수시로 의논하는 것이 힘들어졌다. 자연히 동지들과 연락도 어려워졌고 운신의 폭도 좁아졌다. (주석 1)

독립운동가들에게는 어느 때보다 혹독한 시련의 계절이었다. 차라리 총을 들고 일제와 싸울 때가 가장 행복한 시기였다. 

1932년 괴뢰만주국이 설립된 이후 동북지구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자들은 변화된 형세하에서 여러가지 길을 선택하였다. 

첫째로는 시운이 불리하여 조국광복이 묘연하니 차라리 적과 싸워 장렬히 순국하는 것이였고, 

둘째로는 동북을 탈출하여 중국관내로 들어가 반일운동을 전개하는 것이였고, 

셋째로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계속 항일투쟁을 전개하는 것이였으며, 

넷째로는 의지가 박약하고 부귀를 탐하는자들이 적에게 귀순, 변절하는 것이였으며,

다섯째로는 독립운동의 앞날에 대해 비관실망하여 벽지나 농촌에 은거하여 생활하는 것이였다. 일제의 통치가 심해짐에 따라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다섯 번째 길을 택하였지만 반일의지와 조국 광복의 신념만은 결코 버리지 않았다. (주석 2)

 
최운산·최진동 형제
 최운산·최진동 형제
ⓒ 최성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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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령에 접어든 형제끼리도 한 곳에서 살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협박과 갖가지 수법이 동원되었다. 무엇보다 견디기 어려운 것은 국방헌금의 강요였다. 일제는 최진동의 국방헌금이 재만 동포들에게 크게 영향을 미칠 것으로 판단하면서 집요하게 강요하였다. 가족까지 끌어낸 것이다.

1930년대 후반이 되면서 일제는 최진동 장군에게 재산 헌납을 집요하게 요구했다. 회유와 협박이 심해졌다. 부인과 그녀의 가족을 앞세워 회유작전을 치밀하게 전개하기도 했다. 최진동 장군이 잡혀가고 갖은 협박에 시달리자 남편이 죽게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게 된 젊은 부인은 남편 몰래 일제에 헌금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부인 최순희가 아니라 최진동이 100원을 헌금했다고 신문에 실었다.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된 최진동 장군이 크게 화를 냈으나 엎질러진 물이었다. 금액이 크지 않았고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일제에 보험처럼 헌금을 했던 시절이었지만 목숨을 걸고 무장독립운동에 헌신하던 독립투사의 일생이 아내의 손에 의해 흠집이 생긴 것이었다. (주석 3)


최진동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월정사라는 사찰에 은신하며 요양을 했으나 병세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일본헌병대는 군용비행장 확장을 위해서라며 도문에 있는 그의 땅을 빼앗고자 다시 구속하였으나 끝내 거부하자 고문을 하고 강제로 땅문서에 지문을 찍게 만들었다. 최진동은 땅을 빼앗긴 채 풀려났으나 1941년 11월 25일 사망하였다. 향년 58세의 아직 청청한 연세였다. 

최진동 장군은 사망하기 직전에 부인 최순희 녀사와 둘째아들 최국량을 불러놓고 "소독전쟁이 이미 폭발하였고 일본도 이 전쟁에 말려들 것이며 일본의 힘으로는 강대한 소련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에는 실패하고 말 것이다. 그러면 우리 조선민족은 독립할 것이다. 독립의 그날을 보지 못하고 죽는 것이 한스럽다. 내가 죽은 후 봉오동 어구에 있는 선산(先山)에 묻어 죽어서라도 부모님과 함께 있게 해다오."라는 유언을 남기었다. (주석 4)


주석
1> 최성주, 앞의 책, 162쪽.  
2> 김춘선 외, 앞의 책, 240쪽. 
3> 최성주, 앞의 책, 162~163쪽. 
4> 안화춘, 「최진동장군 후손들과의 인터뷰」, 2005년 10월 7일, 도문에서, 김춘선 외, 앞의 책, 254쪽, 재인용.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무장독립투사 최운산 장군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그동안 연구가들의 노력으로 연해주와 서간도의 독립운동은 많이 발굴되고 알려졌지만, 2020년 봉오동ㆍ청산리대첩 100주년을 보내고도 두 대첩에 크게 기여한 최운산 장군 형제들의 역할은 여전히 묻혀진 상태이다.
태그:#최운산, #최운산장군평전, #무장독립투사_최운산장군, #최진동장군, #최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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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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