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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타나베 재판장 박상진, 강우규에게 사형을 언도하다

경성고등법원 재판장인 와타나베는 독립 만세 운동과 달리 사람을 살해한 행위에 대해서는 행위의 결과보다는 행위의 목적에 중점을 두고 판결하였다. 박상진, 강우규의 상고심 재판에서 행위의 목적이 '내란' 혹은 '살인'에 해당하는가 하는 것이 상소 재판의 핵심이었다.

울산사람인 박상진(朴尙鎭, 1884~1921)은 의병장이 된 허위(許蔿, 1855~1908)에게 한학을 배웠다. 허위와 함께 의병 활동을 양산의 서병희((徐炳熙, 1867~1909)가 하였다. 박상진은 1910년까지 양정의숙(養正義塾)에서 백산 안희제와 같이 공부했다. 그때 1910년 판사(判事) 시험에 합격한 그는 평양법원에 발령을 받았으나 사퇴하고 1911년 만주로 건너가 여러 지사와 교류하며 독립투쟁의 방략을 모색하였다. 1912년 대구에 상덕태상회(尙德泰商會)를 설립하였는데 이는 독립운동의 정보 연락 및 재정적 지원을 목적한 것이었다. 만주 안동(安東)의 삼달양행(三達洋行), 장춘(長春)의 상원양행(尙元洋行) 등 곡물상과 연락망을 구축하며 독립운동의 거점이 되었다. 1915년 조선 국권회복단을 결성하고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과 제휴하여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를 결성하였고 그는 총사령(總司令)을 맡았다.
 
판사 출신인 박상진은 광복회 총사령으로 의열 활동을 전개하였다. 2021년은 순국 100주년이다. 출처 독립기념관
▲ 고헌 박상진 수형자 카드 판사 출신인 박상진은 광복회 총사령으로 의열 활동을 전개하였다. 2021년은 순국 100주년이다. 출처 독립기념관
ⓒ 이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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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재판기록에 따르면, 대한광복회 사령관 박상진은 한일병합에 열복(悅服, 기쁜 마음으로 복종)하지 않고 구한국의 국권을 회복하고 그 독립을 도모하려고 기회를 엿보고 광복회를 조직하고 병기를 준비하고, 군자금을 모집하고, 자산가들에게 금전 제공을 요구하고, 경북 칠곡 부호 장승원(張承遠, 1853~1917)을 암살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박상진은 공주지방법원, 경성복심법원을 거쳐 상소하여 고등법원의 판결을 받았다. 장승원의 아들이 해방 후 수도경찰청장이 장택상이다. 그는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면서 가문의 원한을 풀었다. 정부 수립 후 초대 외무부 장관이 되었다. 1952년에는 이승만의 재선을 위해 '발췌 개헌안'을 추진한 국무총리가 되었다. 장택상의 비서 출신으로 김대중과 김영삼 전직 대통령이 있다. 역사는 질곡이다.
1919년 9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박상진은 공주지방법원에서 판단한 일부 공소 사실에 대해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를 선고받았으나 살인교사죄, 살인죄 연속범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고등법원에 상소하였다. 상소 이유는 박상진의 행위는 " 완전히 형법의 '내란죄'에 해당하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치안 방해, 공갈, 살인 등의 행위를 한 자이다. 이는 완전히 내란죄 예비 음모에 해당하고, 고등법원의 특별 관할에 속하는 사건"이라는 것이었다. 와타나베 재판장에 의해 1920년 3월 1일 판결을 받았다. 박상진의 행위가 내란죄인가 아닌가를 판결하는 것이었다.

독립의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으로써 폭동을 하려는 행위는 내란음모(예비)에 해당한다. 박상진이 국권회복을 도모하고, 장승원을 암살하고, 자금 조달을 위한 공갈, 강도, 가택침입, 살인, 방화 등의 범죄행위는 구한국의 독립 목적을 수행하는 준비로서 나온 제반의 행위임에 명백하다. 또 독립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병기를 가지고 교전(交戰), 교란(攪亂)의 거사를 호소할 것을 응의(應議), 획책하고 그 준비를 한 사실로 해석된다. 하지만 박상진의 변호사는 병기, 군자금의 용어 사용이 곧 폭동의 획책 및 준비한 사실을 인정한 것이라고 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따라서 복심판결에서 박상진의 일련의 활동이 독립목적달성을 위한 준비 사실인정이라 단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와타나베가 볼 때 이것은 또 이 사실을 인정한 것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폭동을 획책했는지 안 했는지 "어느 쪽에 속하는지 이를 견별(甄別)할 수 없다." 이 중요한 사실에 대한 사실관계를 명확히 하지 않고 그 관할을 인정하고 유죄 처분함은 결국 심리부진(審理不盡), 이유불비(理由不備)의 불법이 있으므로 파기 환송하였다. 관할은 대구복심으로 하였다.

와타나베가 박상진의 상소심에서 주안점을 둔 것은 "내란죄"에 해당한다면 고등법원 관할 사항인데 이를 명확히 하지 않고 판결하였으므로 다시 복심법원으로 파기 환송한 것이다. 1920년 9월 11일 대구복심법원은 사형 취소 항고에 대해 다시 박상진은 사형 판결을 내렸다. 판사는 박상진에게 살인교사, 치안방해, 공갈, 치안방해 등 병합의 죄로 사형에 처한다. 하지만 박상진이 장승원을 살해하려고 살해를 교사하고, 권총을 교부했다는 사실을 인정할 만한 범죄의 증빙이 충분하지 않으나 살인교사죄의 연속범으로 기소된 것이라고 인정되므로 특별히 무죄의 언도를 하지 않았다. 박상진은 다시 상고하였지만, 와타나베 재판장은 1920년 11월 4일 공소를 기각하고 사형을 확정하였다.

친부 박시규는 사형은 너무 원통하다면서 선고된 아들을 구하고자 동경에 가서 일본 왕에게 선처를 호소하는 애원문을 작성하여 내부대신에게 전달하기도 하였다. 박상진은 사형을 언도받아 4년 동안 옥고를 치르다가 1921년 8월 11일 대구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올해(2021년)가 순국 100주년이다. 아버지 박시규는 1923년 아들의 2주기를 맞아 쓴 제문 '제망자상진문'에 다음과 같이 말을 하였다.

"나는 네가 살았을 때에는 너의 인망이 이와 같았다는 것을 미처 몰랐었다.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나 살았어도 그 시대에 아무 이익이 없고, 죽은 뒤에도 후세에 남길 만한 소문이 없이 그냥 왔다가 그냥 가게 됨은 온 천하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하는 일이지만, 만약 너 같이 죽는다면 슬퍼할 것이 없다 하겠다."

1919년 9월 2일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거사가 일어난 지 10년째, 3·1 운동 독립투쟁의 열기가 채 가라앉기 전의 서울 남대문역에서 또 한 번 천지를 뒤흔드는 폭발음이 있었다. 삼엄한 경비를 뚫고 조선 총독인 사이토 마코토[齋藤實]에게 던진 폭탄은 그 자체로 엄청난 충격이었다. 해군 제독 출신의 3대 조선 총독 사이토는 3·1 운동 이후 바뀐 식민정책에 따라 신임 조선 총독에 임명됐다. 1919년 9월 2일 남대문역 앞, 사이토 총독을 환영 나온 인파들은 넘쳐나고 이날의 경계는 실로 삼엄했다. 총독의 마차를 항해 던진 폭탄이 터졌다. 폭발로 인한 사상자는 37명. 한일 양국의 언론들은 이 사건을 대서특필했다. 총독은 허리띠에 찬 대검에 파편이 박혔을 뿐 별다른 상처는 입지 않았다. 의거 보름 뒤 일제에 검거됐다. 범인은 65세 노인인 강우규(姜宇奎, 1859~1920)였다. 강우규의 폭탄 투척은 3·1 운동 이후 최초의 의열 투쟁이다.
 
사이코총독을 암살하려 한 강우규(상)와 동지들의 재판 모습(하)과 강우규의 아들(중). 출처 매일신보(1920.02.15.)
▲ 강우규의 재판정 모습  사이코총독을 암살하려 한 강우규(상)와 동지들의 재판 모습(하)과 강우규의 아들(중). 출처 매일신보(1920.02.15.)
ⓒ 이병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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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규는 1심 재판에서 뉘우침의 기색이 없다는 이유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항소심에서도 사형을 선고받고 마지막 1920년 5월 27일 고등법원 상고가 기각되면서 사형이 확정되었다. 강우규는 기독교인이었다. 상고 기각을 한 재판장은 와타나베였다.

강우규의 상고 이유는 "총독을 살해하고자 폭탄을 던졌을 뿐이다. 다른 사람을 죽이고자 하지 않았기에 그것은 나의 책임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조선 민족의 국권회복과 독립을 위하여 총독에게 폭탄을 투탄한 자기주장은 정당하므로 자기 행위도 정당하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와타나베의 상고 기각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총독을 살해하고자 폭탄을 던진 것은 주변의 사람에 대해서도 살해의 결과를 예견할 수 있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을 사상(死傷)케 한 이상 그 결과에 대하여 죄의 책임을 묻는 것은 당연한 것이므로 사형에 처함은 부당하지 않다. 총독은 죽지 않고 살았는데 사형에 처함은 부당하다고 하지만, 총독 생존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사람의 신체를 살해하려는 목적으로 폭발물을 사용하여 살인(殺人) 기수(旣遂, 실현) 미수(未遂-미실현)의 이유가 있는 이상 사형에 처함은 부당하지 않다. 따라서 원판결에 의해 사형에 처하고 상고의 이유는 없다."

와타나베는 평화를 사랑하는 기독교인이었다. "최고법원의 수장으로서 식민지 경영의 최전선에 자리하면서도 제국주의적 편견에 함몰되지 아니하고 양심적인 판단과 삶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사고와 행위가 성서의 가르침이 바탕을 주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평가한 학자도 있다. 하지만 과연 그는 일본에 적대적인 독립투사들에게 사형을 선고한 판사였다. "일본이 정권을 넘어서 모든 민족을 포용하는 평화를 사랑하는 나라가 되기를 원했"던 와타나베는 일제의 식민지 경영에 복무한 판사였다.

박재혁, 고등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다

1921년 3월 14일에 와타나베 도오루(渡邊暢, 1858년생) 재판장, 이시카와 다다시(石川正), 오가와 테이(小川悌), 미즈노 마사노죠(水野正之丞), 마스나가 쇼이치(增永正一) 5명의 배석 판사와 조선총독부 구사바 린고로(草場林五郞) 검사가 나란히 앉았다.

오전 9시 30분부터 10시 30분까지 대략 1시간 동안을 심리하였다. 모토키 변호사가 약 30분 동안 복심법원의 공소한 판결을 파기하여 달라는 변론이 있고 이에 대하여 초장 검사의 변박이 있었다. 박재혁 재판의 증거물은 오택의 집에서 보관한 후 손수건으로 감싼 폭탄의 잔해, 경찰서 파손 현장, 그리고 서장의 부상 치료 사실 있다. 그리고 박재혁의 경찰, 검찰, 재판과정의 진술뿐이었다.

1921년 3월 31일 오전 9시 반에 박재혁의 마지막 재판이 열렸다. 경성고등법원은 변호사 모토키 후사키치(本木)의 변론과 검사의 의견을 들었다. 치열한 법리 논쟁이 벌어졌다. 아직 상처가 아물지 않은 박재혁을 이를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모토키 변호사가 상고한 이유는 네 가지였다. 첫 번째는 법률 적용의 문제가 있다. 둘째는 폭탄 투척 행위가 투척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셋째 청사 파괴와 서장 살해 의도와 지방민심 동요라는 두 가지 목적의 증거가 명확하지 않다. 넷째 폭탄은 투척했지만, 위험성이 많은 것은 아니었고 살해 목적도 이루지 못했다.

와타나베 재판장은 상고 이유를 조목조목 반박하며 1심과 2심 판결을 파기하고 직접 판결하였다. 첫 번째 법률 적용 부분 문제이다. "제1은 건조물 침입은 형법, 제2는 폭발물 수입 및 소지는 폭발물단속법, 제3은 치안 방해 및 타인의 신체・재산 손상 폭발물 사용은 폭발물 단속규칙, 살인미수와 관청 청사 손괴는 형법에 적용된다. 살인미수와 청사손괴는 하나의 행위이지만 무겁게 살인미수죄로 정하는 형벌에 따라 처단하여야 한다. 제1과 제3, 제2와 제3의 각 행위는 모두 수단과 결과의 관계이므로 가장 무거운 제3의 죄를 정하는 형 가운데 사형을 선택하여 피고를 위와 같은 형에 처해야 한다."라고 판결하였다. 변호사는 원판결은 건조물침입과 폭발물 사용과의 관계에 대하여 어떠한 설명도 하지 않았으며, 또 제2 행위와 제3 행위에 수단 결과 관계가 있다고 형법을 적용하여 처단한 원판결은 의율(擬律, 법규에 따라 징벌을 결정하는 일)을 잘못한 위법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와타나베는 일부 기록의 오기(誤記)가 있음을 확인하고, "대개 치안을 방해하고 타인의 신체 재산을 손상할 목적으로 폭발물을 수입 소지하고 그다음 이것을 사용한 경우에는 그 수입 소지 행위는 그것을 사용 행위 관념 속에 포함되므로 단순하게 한 개의 폭발물 사용죄로 구성해야 한다. 그런데 제1심이 폭발물 수입 및 소지 사실을 인정하고 이것에 대하여 법률을 적용하지 않은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제1심 판결 취소 이유 중에 이것을 헤아려 보면 의율착오(擬律錯誤)의 불법(不法)이라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원판결은 이 점에 있어서 파기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상고의 2번째 이유는, 폭탄 투척과 청사 손괴 및 서장살해 의도의 인과관계이다. 변호사는 박재혁에게 폭탄 투척으로 서장살해와 청사 손괴의 결의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폭탄을 던지면 해당 청사를 파괴하고 또한 서장을 살해할 수 있음을 예상하여 폭탄 투척했다는 판시 사실을 인정하는 증거가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원판결은 이 점에 있어서 채증(採証) 방법에 위법이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와타나베 재판장은 심문조서 및 부산경찰서 손괴 흔적, 하시모토의 상흔 기록, 박재혁 공판 과정의 진술을 종합하면 청사손괴 및 서장살해 의사 등의 증거가 있다고 보았다. 와타나베는 "부산경찰서 사무실 부근에 폭탄을 던지면 해당 청사를 파손하는 것은 물론이고 서장을 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예상했었다."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원심이 위의 각 증거에 의거하여 다시 사실을 인정한다면 하등 채증(採証)법칙에 위반한 불법은 없다. 논지 이유 없음"이라고 하였다.

상고의 3번째 이유는, 박재혁의 투탄 목적이 지방 민심 동요와 서장살해 두 목적이 양립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모토키 변호사가 볼 때, 박재혁의 의거는 지방민심의 동요를 일으키겠다는 진술이 사법경찰 진술조서에 없고 재판정에서 인정한 것이나 진술의 취지가 다르다. 박재혁의 진술의 "하나는 그 목적이 폭탄을 경찰서 내에 투척하고 지방 민심을 동요시키는 데 있지 살인 및 청사 파손 목적을 가지지 않았다고 하고, 하나는 그 목적이 살인 및 청사 파손에 있었다고 한다. 이 양자는 서로 납득을 할 수 없는 성질을 가진다. 저것을 채용하면 이것을 이용할 수 없고, 이것을 이용하면 저것을 취할 수 없게 된다. 그러니 그 양립을 허용하지 않고 개개의 공술을 합쳐 채용하여 피고에게 지방민심의 동요를 일으키게 할 목적이 있었다고 인정한 원판결은 이 점에 있어서 채증(採証) 법칙에 반하는 위법이다"라는 것이다.

와타나베는 "폭탄을 투척하고 지방 민심을 동요시킬 목적이라는 공술 부분은 죄증(罪證)으로 제공되었다. 살인 및 청사 손괴 목적을 가지지 않았다는 공술 부분은 죄증으로 제공되지 않았다"라고 인정하였다. 하지만 박재혁의 투탄에 따른 청사 파손과 서장살해 가능성, 지방 민심 동요 목적을 가졌음을 인정하기에 충분하므로 "원심이 위 증거 등을 살피지 않고 위 사실을 인정한 것은 상당(相當, 적당)하므로 원판결에는 소론과 같은 위법이 없다. 본론 취지도 이유 없다"라고 판결하였다.

상고의 4번째 이유는, 폭탄의 위력은 원래 상대적인 것으로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서장 살해 의도가 있었다고 해도 완전히 이룰 수 없었다. 그래서 원심판결은 하시모토 슈헤이에게 하등 생명 위험을 초래하는 이유가 있음을 나타내지 않았다. 단순히 3척 떨어진 곳에서 폭탄을 던졌다는 사유만으로 피고인에게 살인미수 사실을 인정하고 형법 제199조 제230조를 적용한 것은 이유불비(理由不備) 또는 의률착오(擬律錯誤) 위법(違法)이라고 변호사는 주장하였다.

와타나베는 폭탄을 던지면 3척 정도 떨어진 사람의 신체나 생명을 해할 위험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고 보았다. 박재혁의 행위가 "원심에서 '살해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라고 판시하여 피고인에게 살인미수 사실을 인정하여 이것을 형법 제199조 제203조에 문의(問擬)한 것은 당연하고 추호도 이유불비 또는 의율착오의 위법은 있지 않다. 본론 취지 또한 이유 없다"라고 하였다.

상소에 대한 종합적인 판단을 하고 난 뒤에 와타나베 재판장을 최종 판결을 다음과 같은 요지로 하였다.

"위 이유로 형사소송법에 의거하여 원판결을 파기하고 본원에서 직접 판결하기로 한다. 따라서 원판결이 인정한 사실을 법률에 조회하여 건조물 침입, 폭발물 사용은 폭발물 단속벌칙, 살인미수 행위는 형법, 청사손괴행위는 형법에 적용한다. 폭발물 사용, 살인미수, 청사손괴 이 세 가지 죄명을 비교 조회하여 폭발물 사용에 관한 죄를 무겁게 하여 이에 따라 건조물 침입과 폭발물 사용과의 사이에는 수단 결과 관계이므로 형법 제 54조 제1항 후단(後段)의 제10조에 따라 엄하게 폭발물 사용에 관한 형을 적용한다. 제1심 판결은 형법 시행법 제22조를 적용한 부당함이 있을 뿐 아니라 과형(科刑, 형벌부과)에 경솔함이 지나치므로 이것을 취소한다. 원판결을 파기하고 제1심 판결을 취소한다. 피고인을 사형에 처한다. 압수물건 중 증거 제1호인 폭탄 파편은 몰수하고 그 나머지는 각각 제출인에게 되돌려준다."

1921년 3월 31일 서울(경성)의 고등법원 형사부 와타나베(渡邊) 재판장은 건조물 침입, 폭발물 사용. 살인미수 행위, 청사 손괴행위 중에서 '폭발물 사용에 관한 형에 따라 사형을 선택하여 처단' 판결을 하여 박재혁의 사형이 확정되었다.
   
부산경찰서 투탄 100주년을 기념하여 2020년 부산개성고등학교 교정에 세웠다.
▲ 박재혁 흉상 부산경찰서 투탄 100주년을 기념하여 2020년 부산개성고등학교 교정에 세웠다.
ⓒ 이병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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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택, 제2 독립만세운동으로 구속되다

봉천에서 발간하는 만주일보 경남지사를 운영하던 오택(25세)은 1921년 5월 구속되었다. 그가 구속된 이유는 제2차 만세운동때문이었다. 1921년 5월 진주에서 "제2차 독립운동 사건"이 적발된다. 3·1독립운동 이후 제2차 독립운동을 계획하던 김두현 외 13명이 경상남도 경찰부와 진주경찰서의 합동수사대에게 체포된 것이다.

이 사건의 핵심인물들은 3.1운동과 관련된 통도사 스님으로 김상옥과 함께 혁신단 활동을 하며 혁신공보와 암살단 활동을 하였던 신화수, 박민오 스님이 주동이 된 사건이었다. 당시 신화수 스님은 미국의원단 방문과 관련한 육혈포암살단 사건으로 경성감옥에 복역 중이었다. 김두현은 주로 군자금 모금 활동을, 박치오(민오)는 대동단 중심으로 경의선, 경원선, 경부선 세 구역으로 나누어 제2 독립운동을 준비하였다. 이 사건에는 양 신 출신의 김봉길(25세, 자동차 운전수), 김덕봉 (24세, 잡화상), 서상건(23세, 포목상)이 연루된다. 또 부산경찰서 투탄의 박재혁의 친구 오재영(오택, 인삼상)도 같이 검거된다.

당시 통도사 스님 박치오(朴致悟, 민오 玟悟, 26세)는 소재 불명으로 체포를 피한다. 박민오는 중국 상해를 거쳐 미국으로 가고 있었다. 박민오는 통도사 출신 스님 신화수와 김상옥 등과 함께 <혁신공보>를 발간하며 상해 임정을 오가며 활동하다가 유럽을 거쳐 미국으로 갔기에 체포되지 않았다. 그는 통도사 승려 출신으로 3·1운동 당시 학생 대표로서 만세시위 운동을 주도하는 등 뛰어난 독립운동가였다. 그뿐만 아니라 당대에는 드물게 승려 출신으로 미국에 건너가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최초로 하버드대학에서 국제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문학에도 자질이 뛰어나 '동양의 마크트웨인(Oriental Mark Twain)'이나 '친선문화대사'로 일컬어졌다.

오택과 연관된 양산사람들은 1913년 2학년 여름방학을 맞이하여 무전여행을 도보로 하였다. 양산, 언양, 경주, 영천, 대구 등지로 한 달 동안 두루 다니며 소득이 많은 만남이 있었는데, 아마 양산에서 김덕봉, 김봉길, 서상건 등과 통도사의 스님을 만났을 가능성이 크다. 아마 서상건이 1912년 4월부터 1914년 3월까지 부산진공립보통학교에 재학하다가 다시 양산공립보통학교로 전학을 갔다. 좌천동 11통 1호에 거주하였던 서상건도 정공단의 아이였다. 이런 인연이 오택과 맺어져 양산의 인물과 연결된 것이 아닌가 추측이 된다.
 
대구 감옥에 갇힌 오택과 검거 등을 피하려고 수염을 기른 털보 오택. 오택의 자전적 기록은 의열단원 박재혁의 삶을 조명하는 가장 중요한 자료였다. -출처:부산출신독립투사집(1982, 김삼근)
▲ 오택(오재영, 1897~1948)  대구 감옥에 갇힌 오택과 검거 등을 피하려고 수염을 기른 털보 오택. 오택의 자전적 기록은 의열단원 박재혁의 삶을 조명하는 가장 중요한 자료였다. -출처:부산출신독립투사집(1982, 김삼근)
ⓒ 부산출신독립투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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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만세운동 당시 오재영(오택)은 서울에서 김인태, 김상옥, 강낙원 등과 활동하고, 그 후 상해 임정의 연통제 활동을 하고 있었다. 오재영은 독립군자금을 모집하여 상해 임정에 보내는 김두현(金斗鉉, 경남 하동, 27세)을 만나 협의한 한 일이 있었다. 김두현은 50전짜리 은메달에 앞에는 태극기와 독립기념을, 뒷면에는 민국원년(民國元年)을 새겨 부호들에게 주고 독립군자금을 모집하였다. 오재영은 좌천동 자기 집에서 김두현과 김두옥을 만났다. 일찍이 윤태선(尹台善)이 보내준 '조선임시정부13도 총감부' 명의의 사령서 2장과 유고문(諭告文) 몇 장을 두 사람에게 주었다. 이것으로 두 사람은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였다.

양산 하북면 지산리 543번지 출신의 김봉길(金鳳吉, 1897~1974)은 1919년 9월경 중앙학림을 졸업하고 『혁신공보』를 발행하다가, 의용승군·대동단 등에서 활동하고 있는 박민오를 만났다. 박민오는 김봉길에게 부탁하였다. "지금 독립운동하는 대동단에서는 10월 1일에 경의선(京義線), 경원선(京元線), 경부선(京釜線)의 세 구역으로 구분하여 제2회 독립운동을 시작할 터이니 경부선의 선동을 맡아달라."

이에 김봉길은 승낙하고 박민오에게 독립신문 7장과 경고문 5장, 경부선 연변의 인민선동을 맡은 위임장, 여비 40원을 받았다. 통영, 진주, 남해 지방으로 김봉길은 다니며 독립운동을 선동하였다. 김덕봉은 1919년 9월 박민오의 전보를 받고 부산 영남여관에서 "전조선 제2회 독립운동을 선동하라."라는 위임장을 받는 동시에 독립신문 25매와 경고문 10장을 받은 후 서상건과 공모하고 오재영에게 독립신문과 경고문을 배포하고 선동하였다. 이후 서상건, 김덕봉 등 10여 명과 함께 하동에서 임무를 수행하던 중 1921년 5월 12일 체포되어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원에서 징역 1년 형을 선고받고 진주분감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일본으로 건너가 살다가 사망하였다.

양산 남부리 299에 살았던 김덕봉(金德峰, 1898~1962)은 1919년 9월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각지의 부자들에게서 군자금을 모금하여 상해 임시정부에 송금하였다. 동시에 한쪽 면에는 태극기와 '독립 기념'이라 새기고 다른 한쪽 면에는 '민국 원년'이라 새긴 50전짜리 은메달을 건네는 대가로 군자금을 모집하던 김두현(金斗鉉)·김두옥(金斗玉)의 지령을 받아 활동하였다. 또한 중앙학림 승려 박민오로부터 『독립신문』과 경고문을 함께 받아 강우석(姜佑錫)·박만선(朴萬善)에게 건네주는 등의 임무를 수행하다가 동지 13명과 함께 1921년 5월 12일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김덕봉은 1921년 5월 30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징역 1년 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서상건(徐尙鍵)은 1915년 양산공보를 졸업한 후 1919년 3·1운동 직후 경성에서 『혁신공보』를 발행하던 박민오(朴玟悟)의 권유로 대동단에 가입하였다. 서상건은 대동단으로부터 제2차 독립 만세 운동을 전개하라는 밀지를 받고 진주·하동 지역에서 활동하던 중에 김덕봉(金德峰)·김봉길(金鳳吉) 등과 함께 1921년 5월 12일 진주경찰서에 체포되었다.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원에서 기소유예 처분으로 풀려났다.

이후 김덕봉과 서상건은 양산청년회에서 활동하였다. 1922년 10월 21일 양산청년회 정기총회에서 간사장 권득구(權得龜), 체육부 엄주화, 서무부 정진수(鄭鎭壽)·김덕봉(金德峯), 문예부 전병건(全秉健), 사교부 이기주(李基周), 재무부 서상건(徐尙健), 의사장(議事長) 금석호, 의사 최학선 외 3명이 선출되었다. 1928년 1월 18일 양산청년회는 해체되고 양산청년동맹으로 확대·발전하게 된다. 서상건은 동아일보 양산지국 기자를 하였고, 1929년 2월 신간회 양산지회의 간사를 하였다.

오재영(오택)은 1심 2년 구형에 1년 선고를 부산지방법원에서 받았지만, 불복 소송하여 대구복심법원에서 1921년 8월 2일 징역 1년을 최종 선고받았다. 복심 재판 중에 오택은 대구 감옥에 옮겼다. 이때가 1921년 7월 초인데 오택은 입감 즉시 박재혁의 안부를 탐문하였다. 지난 3월 말에 사형을 언도받고 절식 10여 일에 아사(餓死)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대구 감옥 수감(1921.8.3.~1922.8.2) 중 대구형무소 감방에 서서 조그만 철창문을 통해 캄캄한 밤중에 북쪽 하늘에 있는 별만 보였다 해서 북성(北星)이란 호를 지었다. 1922년 6월 23일 가출옥하였다.
 
 제2독립만세사건과 연루되어 대구 감옥에서 1년을 복역하였다. 출처:부산출신독립투사집(1982, 김삼근)
▲ 오택(오재영) 가출옥 증서  제2독립만세사건과 연루되어 대구 감옥에서 1년을 복역하였다. 출처:부산출신독립투사집(1982, 김삼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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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병길 : 경남 안의 출생으로, 현재 울산민예총(감사), 울산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부산・울산・양산 지역의 역사 문화에 관한 질문의 산물로 『영남알프스, 역사 문화의 길을 걷다』, 『통도사, 무풍한송 길을 걷다』를 저술하였다.

태그:#부산경찰서 투탄, #의열단, #박재혁, #박상진, #강우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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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울산, 양산 지역의 역사문화에 질문을 던지고 답변을 찾는 탐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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