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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음악사랑은 일터인 농원으로 이어졌다. 십여 년 전. 오랫동안 방치해 둔 밭과 산을 개간했다. 어릴 적 기억들이 남아 있는 고향 땅에 남편은 남다른 애정을 쏟았다.

어느 정도 윤곽이 드러날 즈음 팔뚝길이의 까만 상자가 나무에 매달려 있었다. '뭐지?' 남편은 "농작물도 음악을 들으면 잘 자란다"는 말을 해가며 밭에는 물론 비닐하우스, 산 속까지 음향을 연결했다. 무려 10개의 스피커를. 소리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음악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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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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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원으로 출근하는 날이면 남편은 가장 먼저 음악방송을 켰다. 음악으로 가득한 대지 위에 파릇파릇한 엽채류들, 간간히 피어있는 꽃들을 바라보며 행복에 겨워했다. 한번 틀어놓은 채널은 퇴근까지 계속되었다. 원 없이 크게 틀어 놓고 농원을 활보했다. 30여 년 전 '야마하'로 못 이룬 한(?)을 푸는 것 같았다.

알다가도 모를 일은 동네 분들이었다. 분명히 시끄럽다고 할 만한 볼륨인데도 지금까지 단 한 번의 민원이 없다. '어르신들의 귀가 어두워져서 그럴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글쎄. 그보다는 적막한 집에 TV 켜놓는 심정으로 이해해주는 것이니 우리가 알아서 소리를 줄여야 한다고 남편에게 주장했다. 하지만 집에서도 포기한 일을 이 넓은 농원에서 남편이 들어줄 리 없다. 가당치도 않은 욕심이었다. 

나는 되도록 농장 가는 일을 만들지 않았다. 가끔이지만 내가 농장에 가면, 라디오를 틀지 않던가 아니면 아주 작게 백색소음 정도를 요구했다. 조건부를 내걸고 등장하는 경우여서 남편의 대답은 흔쾌해도 아쉬운 눈빛을 감추지 않았다. '눈 딱 감고 오늘만 봐준다'였다.

"식물들도 새소리 바람소리를 듣고 싶을 거야. 하루 종일 라디오 소리, 스트레스지."

농사 '농'자도 모르는 남편은 텃밭이 놀이터였다. 봄철이 되면 고추, 상추, 양파, 마늘, 감자, 피망, 토마토 육묘를 사러 종묘사에 들러 출근하는 일이 잦았다. 팔랑귀인 남편은 가게주인이 종자별로 특성과 장점들을 소개하면 혹하는 마음에 머릿속이 복잡했다. 선택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길은 골고루 다 사는 것. 대책 없이 받아 안고 왔다. 종류별로 색깔별로 심어 놓고는 보물을 땅 속에 묻어놓은 사람처럼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먹는 것을 누구보다 좋아하는 남편에게 텃밭은 입맛을 돋우는 식단이었다. 뿐만 아니라 퇴근길 마대자루에 한 보따리씩 들고 오는 야채류들은 이웃의 먹거리로 연결되었다. 여기저기 들러 야채를 나눠주고 집에 도착하는 시간은 야심한 밤일 때가 많았다.

남은 야채는 아파트 이웃을 위해 소분했다. 대부분의 집은 저녁식사를 마친 후여서 주는 것도 망설여지곤 했다. 남편의 수고가 고스란히 녹아있는 야채를 제대로 나눠먹는 일이 신경 쓰였다. '혹시 필요치 않은 건 아닐까' 해가 거듭하면서 고민은 사라졌다. 야채 마니아들이 의외로 많아져서 돌아가며 나눠주는 때도 있다.

"음악을 듣고 자란 채소예요."

남편의 자랑이며 자부심이다. 텃밭을 가꾸어 소출한 것들을 나눠먹는 재미로 사는 남편. 일은 많고 경제와는 무관한 게 텃밭 가꾸기임을 모르는 게 아니다. 좀 더 실속있는 일로 전환할 것을 여러 번 권했지만 텃밭에서 느끼는 행복을 포기할 수 없는 모양이다. 라디오를 통해 사연과 음악을 들으며 땀방울로 식물을 키우는 하루하루가 즐겁다는 데 누가 말릴 수 있으랴.

기분 좋은 아침, 달달한 군고구마를 후식으로 먹으며 남편에게 선곡을 부탁한다. 남편은 흔쾌히 말한다. 

"이 노래 어때? 당신을 위해 준비했어."

서유석의 전조 멘트가 흘러나온다.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하루 종일 밭에서 힘들게 일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 용서하십시오."

'뭐지?' 노래가 이어진다.

"타박 타박 타박네야 너어드메 울고가니 우리엄마 무덤가에 젖먹으러 찾아간다..."

경쾌한 음악을 기대했던 내가 감성에 젖을 리 만무하다.

"아니, 이 노래가 지금 어울린다고 생각해? 아침부터 눈물 뺄 일 있어?"

잘 해도 본전인 우리집 DJ. 오늘도 음악을 듣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덧붙이는 글 | 블로그와 브런치에 게제할 예정입니다.


태그:#음악사랑, #농원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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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육십부터.. 올해 한살이 된 주부입니다. 글쓰기를 통해 일상이 특별해지는 경험을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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