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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힘에 입당후 대선출마를 선언한 최재형 전 감사원장이 지난 5일 오전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내 학도의용군 무명용사탑을 참배를 마치고 기자의 질문에 답변을 하고 있다.
 국민의힘에 입당후 대선출마를 선언한 최재형 전 감사원장이 지난 5일 오전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내 학도의용군 무명용사탑을 참배를 마치고 기자의 질문에 답변을 하고 있다.
ⓒ 국회사진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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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형 대선 예비후보의 조부 최병규가 만주에서 했다는 '조선인 거류민단' 활동은 독립운동이 아니라 일제의 만주 개척 정책에 호응하는 활동이었을 가능성에 무게가 실리는 역사적 정황이 나왔다. 

<오마이뉴스>는 일제강점기 친일단체와 독립운동사를 연구한 김주용 원광대 교수의 조언으로 새롭게 조사한 내용을 하나 더 공개한다. 김주용 교수는 최근 기자에게 "당시 평강군 고삽면 세포리에 만주이민훈련소가 있었다"고 알렸다.

공교롭게도 강원도 평강군은 최재형 후보 증조부 최승현의 고향이고, 이민훈련소 수료생이 배출돼 만주로 이동한 1938년은 최재형 후보의 할아버지 최병규가 만주로 간 해와 동일하다. 

평강에 세워진 선만이민훈련소
 
일제는 조선인의 만주 개척 참여를 위한 이민훈련소 설립을 추진하였다. 마땅한 장소를 물색하던 조선총독부 외사과는 기후와 풍토가 만주와 똑같은 곳으로 평강을 지목했고, 훈련소 건립을 위해 약 4만 원의 보조금도 지원하면서 건립됐다.
▲ 평강군 고삽면 세포리에 세워진 선만이민훈련소(매일신보, 1938. 7. 30)  일제는 조선인의 만주 개척 참여를 위한 이민훈련소 설립을 추진하였다. 마땅한 장소를 물색하던 조선총독부 외사과는 기후와 풍토가 만주와 똑같은 곳으로 평강을 지목했고, 훈련소 건립을 위해 약 4만 원의 보조금도 지원하면서 건립됐다.
ⓒ 매일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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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1936년에 이르러 만주 개척의 기치를 내걸면서 일본인의 만주 이민을 넘어 조선인의 만주 이민정책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38년부터 일제가 주도하는 조선인 만주 이민이 본격적으로 실현됐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당시 만주 신징(新京)에서 <만선일보> 정치경제부장을 맡고 있던 친일인사 홍양명의 글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조선인의 모험 도강으로부터 개시된 과거 수십 년 전의 자유이민 시대를 지나 통제적으로 이민을 지도하는 계획이민 단계에 처하야 만주국 정부가 소화 11년에 칙령에 의한 만선척식주식회사를 설립하야 총독부 당국과 협력하야 만주이민의 보호통제를 하고 있는 것은 주지하는 바이다.(<삼천리 제11권>, '대륙진출의 조선민중, 만주국에서 활약하는 그 현상', 1939. 1. 1)

일제의 만주 개척을 앞두고 선만척식주식회사가 세운 선만이민훈련소(鮮滿移民訓練所)가 조부 최병규의 고향이기도 한 평강군 고삽면(세포리)에 들어서게 됐다. 조선총독부 외사과는 마땅한 장소를 물색하던 중 만주와 기후·풍토가 똑같은 곳으로 평강을 지목했고, 훈련소 건립을 위해 약 4만 원의 보조금도 지원했다.

1938년 7월 30일 발행된 <매일신보>에는 세포이민훈련소에 관한 사진과 개소식 소식이 실렸다. <매일신보>의 보도에 따르면 7월 28일 열린 개소식 행사엔 총독대리 송 사무관과 김시권 강원도지사, 만주국 모리적정사 사무관, 최형식 평강군수 등이 참석했다.

초창기 선만이민훈련소를 경영한 선만척식(주)는 조선총독부령 제45호(선만척식주식회사령)에 근거해 1936년 9월 9일에 설립된 특수회사였다. 선만이민훈련소는 '조선인의 만주이민을 지도할 중견 청년을 훈련할' 목적으로 한반도에 세워진 최초의 기관이었다.

이민훈련소 운영은 일제의 계획보다는 많이 늦어졌다. 1937년 5월 1일부터 훈련생 교육을 시작한다는 계획이 해를 넘긴 1938년 1월에야 현실화됐다. 40일간의 훈련을 마치고 배출된 109명(혹은 105명)의 1기 수료자는 길림 지역으로 보내졌다. 2기는 1938년 3월 15일에 입소해 7월 24일에 65명의 수료자를 배출했고, 3기생은 1938년 8월 5일에 150명이 입소하는 등 300명의 중견 청년 지도원을 양성한다는 계획은 그럭저럭 실현됐다.
 
오른쪽 기사는 이민훈련소 설치 계획을 처음 보도한 기사(1937. 2. 19)이고, 왼쪽 기사는 이민훈련소 1기 모집과 운영을 알리는 기사(1938. 1. 13)이다.
▲ 선만이민훈련소 설립과 운영 관련 매일신보 보도기사 두편 오른쪽 기사는 이민훈련소 설치 계획을 처음 보도한 기사(1937. 2. 19)이고, 왼쪽 기사는 이민훈련소 1기 모집과 운영을 알리는 기사(1938. 1. 13)이다.
ⓒ 매일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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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세포이민훈련소로 불리기도 한 선만이민훈련소의 교육 훈련 내용이 무엇이었는지를 들여다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이민훈련소는 단지 만주에서 농사를 어떻게 지을 것인지와 자신은 물론 다른 조선인 농업 이민자들이 만주에서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어떻게 도울 것인지를 배우고자 하는 청년을 지도하는 기관이 아니었다.

선만이민훈련소는 오히려 사상 무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제1기 입소생을 맞으면서 조선총독부가 선만척식(주)에 내린 네 개 항의 '경영요항'은 당시 <매일신보>에 <만주건국정신을 훈련 방침으로>(1938. 1. 13)에 다음과 같이 보도됐다.
 
-. 만주건국선언(滿洲建國宣言)의 취지의 부연강화(敷衍講話)
-. 민족협화(民族協和)의 관념 함양
-. 일만(日滿) 불가분 급 일덕일심(一德一心)의 정신 계배(啓培)
-. 선만일여(鮮滿一如)의 구현화
 
위 '경영요항'을 통해 일제가 이민훈련소에서 일제의 방침을 충실하게 실천할 수 있는 조선인 중견 청년을 양성하려고 했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다. 선만이민훈련소는 1940년에 이르러 조선총독부 직속 기관으로 승격되면서 경영에 있어 일제의 통제가 더 강화됐다.

최재형 조부 최병규의 만주 이주와 선만이민훈련소
   
40일간의 훈련을 마치고 배출된 109명(혹은 105명)의 1기 수료자는 길림 지역으로 보내졌다. 2기는 1938년 3월 15일에 입소하여 7월 24일에 65명의 수료자를 배출했고, 3기생은 1938년 8월 5일에 150명이 입소하는 등 300명의 중견 청년 지도원을 양성한다는 계획은 그럭저럭 실현되었다.
▲ 이민훈련소 제2회 수료생(1938. 7. 31) 40일간의 훈련을 마치고 배출된 109명(혹은 105명)의 1기 수료자는 길림 지역으로 보내졌다. 2기는 1938년 3월 15일에 입소하여 7월 24일에 65명의 수료자를 배출했고, 3기생은 1938년 8월 5일에 150명이 입소하는 등 300명의 중견 청년 지도원을 양성한다는 계획은 그럭저럭 실현되었다.
ⓒ 매일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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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형 후보 부친 최영섭은 <바다를 품은 백두산>에서 조부 최병규가 1938년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 목단강성 해림가로 건너갔다고 기록했다. 공교롭게도 1938년 평강에 있던 선만이민훈련소에서 배출된 중견 청년 지도자들이 만주로 처음 출발한 년도와 동일하다.

기자는 지난 보도에서 1999년 춘천고 명예졸업 당시 언론에 보도됐던 "한국인 지원사업에 가담했다"(<강원일보>), "만주로 가 동포들의 정착 돕기 운동을 벌였다"(<중앙일보>)와 같은 최병규 인터뷰 내용을 주목해야 한다고 언급했었다. 최재형 후보 측에서 최병규가 쓴 <사려와 조화>를 공개하지 않고 있는 마당에 그의 만주 행적을 이해할 수 있는 당사자 발언은 짧더라도 소중하다. 

최병규가 생전에 남긴 '한국인 지원사업' 또는 '동포 정착 돕기 운동'은 독립운동으로 해석될 여지가 없다. 반면, 일제에 호응해 선만이민훈련소에서 육성된 중견 청년 지도자들이 만주로 가서 이주 조선인들을 지도한 일을 포장했을 가능성은 더 힘을 얻게 된다.

물론 다른 가능성은 존재한다. 국방헌금 강요 등 계속되는 일제의 강요와 협박에 더 이상 굴욕적인 삶을 계속할 수 없다고 결심한 최병규가 일제의 만주 이주 정책을 활용해 만주로 이주한 다음 만주에서 비밀스럽게 독립운동을 벌였을 가능성이다. 만약 최재형 후보 측에서 이러한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의혹 제기에 반박하고자 한다면 그 근거를 함께 제시하면 된다. 

근거를 내놓으라는 기사는 최재형 캠프에서 항변하듯 윽박지르는 행위가 될 순 없다. 7년간 만주에서 생활하면서 대한 독립의 희망을 마음속에만 간직하고 있었을 뿐, 구체적인 실천을 단 한 차례도 하지 않았다면 이를 독립운동이라 부르지 않는다. 

더군다나 최재형 후보 아버지 최영섭이 <바다를 품은 백두산>에서 "해림가 부가장과 조선거류민단장을 맡아 독립자금 확보와 전달 역할을 하는 등 독립운동에 참여했다"고 기록해놨다. 이것 역시 '항일독립운동 공로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고 쓴 것이 최영섭의 "착오"였다고 해명한 것과 똑같이 착오였다고 넘길 수는 없는 일이다.

이에 대해서는 기자가 누차 강조했듯 조부 최병규의 회고록 <사려와 조화>의 원문 전문을 공개하는 것보다 더 확실한 방법은 없다.

[관련기사]
[단독 검증] 최재형의 할아버지 '최병규'는 진짜 독립유공자일까? http://omn.kr/1uoci
[반론] 최재형 후보 측 "조부가 독립유공자라 한 적 없다" http://omn.kr/1ur1v
[재반론] '독립유공자' 조부는 착오? 최재형 후보님, 이 기사는 뭡니까 http://omn.kr/1ur4c
[검증] 최재형 조부 생전에는 '만주독립운동' 언급 없었다 http://omn.kr/1ut22
[검증] 최재형 일가 땅 몰수, 부친이 맞나 캠프가 맞나 http://omn.kr/1uuly

태그:#최재형, #최영섭, #최병규, #선만이민훈련소, #만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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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역사문화연구소에서 서울의 지역사를 연구하면서 동작구 지역운동에 참여하고 있으며, (사)인권도시연구소 이사장과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이사를 맡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동작구 근현대 역사산책>(2022) <현충원 역사산책>(2022), <낭만과 전설의 동작구>(2015)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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