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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군인들이 제암리 예배당에 마을 주민들을 몰아넣고 불을 질러 학살한 터에는 현재 3.1운동 순국 기념탑이 들어서 있다.
▲ 제암리 학살터에 세워진 3.1운동 순국 기념탑 일본 군인들이 제암리 예배당에 마을 주민들을 몰아넣고 불을 질러 학살한 터에는 현재 3.1운동 순국 기념탑이 들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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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남부의 너른 땅 화성, 아름다운 풍경이 수채화처럼 펼쳐지고 마을 구석구석 저마다 고유한 이야기를 품고 있다. 특히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걸쳐 중국으로 통하는 국제 무역항으로써 화려했던 역사를 지니고 있지만 시대의 아픔을 켜켜이 품고 있는 고장이기도 하다.

그동안 궁궐, 사원 등 조상들의 화려했던 생활을 살펴보는 여행이 주를 이뤘지만 비극이 일어났던 장소를 찾아가 반성과 교훈을 얻는 다크 투어리즘이라는 형태도 점점 성장하고 있다. 대규모 학살이 일어났던 캄보디아의 킬링 필드,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 심지어 우크라이나의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까지 그 범위는 넓고 다양하다. 이번에 먼저 찾아갈 화성의 제암리 3.1 운동 순국기념관이 바로 그런 곳 중 하나라 할 수 있겠다.     

3.1 운동은 익히 알려진 대로 일제의 통치에 반발해 수개월에 걸쳐 시민 다수가 봉기하여 대한민국의 독립을 선언한 한민족 최대의 독립운동이다. 1910년 일본은 한국을 강제로 병합한 이후 일명 무단통치라 불리는 강압적인 억압정책을 펼쳐나가고 있었다. 게다가 일제는 목포와 군산항을 통해 쌀 수탈을 하며 우리의 농민들은 큰 시름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텨야만 했으며 쌀값은 폭등하여 민생고는 점점 험해져만 갔다.

하지만 멀리 서방에서 들려온 한 소식은 조선 민중들에게 한 줄기 빛이 되었다. 1919년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열린 파리 강화 회의에서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제안한 14개 조 원칙 중에 '각 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이 스스로 결정하게 하자'라는 내용이 있었다. 이른바 민족자결주의라 불리게 되는 이러한 내용이 태평양을 건너 한반도 전체로 소식이 퍼지게 되면서 독립에 대한 열망을 갈수록 고조되고 있었다.     

물론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는 패전국인 오스트리아, 터키의 국토를 찢어놓으려고 한 의도였기에 다른 국가의 식민지의 요구는 금세 묵살되었다. 연이어 대한제국의 황제인 고종이 승하하는 일이 발생했다. 세간에는 일제에 의한 독살설이 팽배했기에 소문이 점점 퍼지며 반일감정은 커져만 갔고, 각종 단체들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본격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했다. 결국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을 시발점으로 전국적으로 거대한 시위운동이 펼쳐진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3.1 운동의 전말이다.

특히 화성 지역은 일제가 기존에 있던 갯벌을 논과 염전으로 간척하여 많은 조선인 노동자, 농민을 유입시켰고, 그들을 관리하던 일본인 관리들은 수확물의 독점과 폭리로 그들을 불만에 휩싸이게 했다.      
 
제암리 사건은 해방되고도 한동안 그 사건의 면모가 드러나지 않다가 수십년 전에 비로소 발굴 등 사건의 면모를 본격적으로 파헤치기 시작했다. 희생자들이 발견된 구덩이에는 각종 유류품들이 나와 전시되고 있다.
▲ 1982년 희생자들이 매장된 구덩이에서 발굴된 유류품들 제암리 사건은 해방되고도 한동안 그 사건의 면모가 드러나지 않다가 수십년 전에 비로소 발굴 등 사건의 면모를 본격적으로 파헤치기 시작했다. 희생자들이 발견된 구덩이에는 각종 유류품들이 나와 전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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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에 가지고 있던 반일감정과 화성 지역에 유입된 기독교적인 자유사상은 지역주민들을 더욱 독립에 대한 열망으로 들끓게 만들었다. 화성의 3.1 만세운동은 3월 26일 송산 사강 장터 만세 시위, 3월 30일 향남 발안장터 만세 시위, 4월 3일 장안 우정 만세시위로 등 전 지역으로 전개되었다.

화성의 행정이 마비될 정도로 극심한 시위였다. 경찰관 주제 소가 파괴되었고 순사부장 노구찌가 살해되고 면사무소가 방화되었다고 한다. 일본은 이 일의 원인이 제암리의 천도교인 및 기독교인들에게 있다고 판단한다. 이에 중위 아리타 도시오는 헌병 11명 외 순사와 순사보를 이끌고 마을로 향했다.      

이들은 훈시할 말이 있다고 속여 15세 이상 남자를 모두 교회로 모이라고 명했다. 그러고 나서 교회당 내부를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고, 곧이어 교회에 못질을 한 후 불에 지른다. 천인공노할 대학살이 시작된 것이다.

일본은 이웃마을 고주리에 가서 천도교 일가들도 학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신을 노적가리와 함께 불살라 버린다. 이런 엄청난 만행은 한동안 어둠 속에 감춰져 있었다. 하지만 스코필드 선교사가 사건 보고서를 캐나다와 미국의 친지들에게 전달하고, <끌 수 없는 불꽃>을 저술해 일제의 학살을 전 세계에 알리게 된다.  
  
불탄 제암리 예배당의 근처에는 재건된 제암교회와 순국 기념관이 있어 당시 일제의 만행을 살펴 볼 수 있다.
▲ 현재 재건된 제암교회와 제암리 순국 기념관 불탄 제암리 예배당의 근처에는 재건된 제암교회와 순국 기념관이 있어 당시 일제의 만행을 살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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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의 의의는 우리가 생각한 이상으로 크다고 볼 수 있다. 그 이전까지 왕조의 낡은 기운이 조선에 드리우고 있었지만 이때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독립을 하더라도 더 이상 봉건왕조 조선이 아닌 공화정의 대한민국으로 확실히 굳어졌다는 것이다.

게다가 제국주의에 신음하던 다른 국가에도 영향을 끼쳤다. 중국에서는 5.4 운동이 일어났고, 훗날 인도의 초대 총리를 지낸 네루도 딸인 인디라 간디에게 3.1 운동을 격찬하며 "이들을 본받기를 바란다"라고 당부하며 "일본 역시 영국과 다를 바 없는 제국주의 국가이니 조심해야 한다"라고 했다고 한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만들어지는 큰 변곡점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각설하고 3.1 운동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많은 아픔을 만들어냈던 제암리 학살의 주범 아리타 도시오 중위는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스코필드 등의 재한 공관, 기자, 선교사 등에 의해 전 세계에 소식이 퍼지게 되고 해외 여론이 악화되자 일제는 아리타 중위를 군법회의 회부하여 여론을 무마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일제는 학살행위를 인정하면서도 형법에 규정된 범죄가 아니라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하는 어처구니없는 판결을 내렸다.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이 사건을 차마 입 밖으로 내지도 못했고, 해방이 되어서도 한참 후인 1959년에 가서야 추모비를 세울 수 있었다.

나는 지금 그 아픔의 현장을 찾아 떠나려고 한다. 제암리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는 태극기의 행렬들이 우리를 숙연하게 맞아준다. 현재 학살이 일어났던 제암리 예배당은 넓은 잔디밭으로 바뀌었고, 그 중앙부엔 거대한 3.1 운동 순국 기념탑만이 그때의 기억을 상기시키고 있다. 아쉬운 것은 학살이 일어났던 자리에 기념이란 말은 조금 어울리진 않은 것 같다는 점이다. 차라리 위령이나 추모라는 말을 쓰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한다.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른 아리타 중위는 후에 각종 외신들에 의해 사건이 재조명받게 되면서 군법재판에 회부되었다. 하지만 형법에 규정된 범죄가 아니라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받았다.
▲ 아리타 중위에 관한 재판 선고의 건 보고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른 아리타 중위는 후에 각종 외신들에 의해 사건이 재조명받게 되면서 군법재판에 회부되었다. 하지만 형법에 규정된 범죄가 아니라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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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언덕의 왼편에는 새로 세워진 제암교회와 함께 자리 잡은 제암리 3.1 운동 순국기념관이 있어 자연스레 발길을 옮겼다. 1969년 일본의 기독교인들이 사죄의 의미로 제암교회를 지어주었고, 2002년 기념관을 지으며 새롭게 중축한 건물이다. 하지만 학살사건에 대한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는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전시관을 둘러보면 이 사건이 결코 가볍게 넘어가지 않을 일임을 마음속으로 뼈저리게 느껴지게 된다. 학살된 유해들은 공동묘지에 봉분도 없이 구덩이에 던져졌는데 세월이 훨씬 지난 1982년에 와서야 유해가 발굴되었고, 그 유품들을 여기 전시실에 전시하고 있다. 교회를 봉했던 못, 희생자가 입었던 옷가지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미어져왔다. 독립된 지 수십 년이 흘렀지만 말없이 희생된 그들의 한을 어루만져주지 못한 것 같아 후손으로써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기념관의 뒷편으로 제암리 희생자 23인을 합장한 순국 합동묘지가 있다.
▲ 23인 순국 합동묘지 기념관의 뒷편으로 제암리 희생자 23인을 합장한 순국 합동묘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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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 뒤 언덕으로 올라가면 제암리 희생자 23인을 모신 합장묘가 있다. 한차례 묵념을 드린 후 이런 사건이 우리나라는 물론 전 세계에도 널리 알려지고 기억되길 바라면서 화성의 또 다른 비극이 서려있는 장소로 가보기로 한다.     

덧붙이는 글 | 9월초 <우리가 모르는 경기도 : 경기별곡 1권>이 출판됩니다. 많은 사랑 관심 부탁드립니다. 이번주부터 팟케스트 탁피디의 여행수다에서 경기별곡 라디오가 방영될 예정이니 많은 청취 부탁합니다.


태그:#경기도, #경기도여행, #화성, #화성여행, #운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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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문학 전문 여행작가 운민입니다. 현재 각종 여행 유명팟케스트와 한국관광공사 등 언론매체에 글을 기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경기도 : 경기별곡 1편> <멀고도 가까운 경기도 : 경기별곡2편>, 경기별곡 3편 저자. kbs, mbc, ebs 등 출연 강연, 기고 연락 ugzm@naver.com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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