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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집집이 밥을 먹고 설거지를 했을 것이다. 아니면 쌓아둔 채 우연히 이 글을 읽고 있을지도 모르고, 서로 하라고 가위바위보를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식기세척기로 간단하게 하든 배달한 음식을 먹고 남은 일회용기를 다시 싸서 내놓든 먹고 난 뒤의 그릇을 정리해야 하는 의미로서의 설거지는 매한가지일 것이다.

'설거지론'이 최근 화두다. 어떤 이론이기에 '설거지'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것일까. 인터넷 저 한구석에서 시작한 이 유행어는 진중권 교수가 '설거지론이 뭐예요?'라며 가세하고 여러 황색지의 단신으로 소개되다가 어느새 <조선일보>를 비롯한 주류 언론의 기사에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공대卒 삼성 근무는 '퐁퐁남 풀코스'? 인터넷 달군 퐁퐁·설거지론'_2021.10.25. 조선일보)

설거지론은 "쾌락을 실컷 즐기다 조건만 따져 사랑 없는 결혼생활을 하는 사회 현상"을 의미한다. 쾌락만 즐기던 사람을 '그릇'에 비유하고 연애 경험이 없지만, 능력을 쌓은 사람을 '퐁퐁'에 비유하여, 사랑 없고 정성 없는 결혼생활을 '그릇'을 '퐁퐁'으로 닦는 것에 비유하는 것이다.
 
설거지론에 관한 블라인드의 테스트
 설거지론에 관한 블라인드의 테스트
ⓒ 블라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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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류 언론들이 이 단어를 다루는 태도는 단순하다. 잠깐 스쳐 가는 인터넷 유행(밈, meme)이라고 치부하거나 가족혐오, 여성혐오적인 표현이라고 보는 듯하다. 하지만 '설거지론'이 내포한 의미와 사회적인 현상이 그리 평면적이지 않아 보인다. 이 단어의 탄생을 전후좌우로 살펴보는 것이 현 한국사회를 짚어보는 데 상당히 의미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한국 사회의 인구학적 문제와 이대남 현상의 연장선

먼저 설거지론은 한국 사회의 인구학적인 문제와 그로 인해 파생된 이대남(20대 남성을 지칭하는 신조어) 현상에 기초한다. 2021년 기준 20대의 마지막 세대인 93년생은 115.3명이라는 사상 최악의 남초 성비로 태어났다. 이들이 대학에 진학한 12학번의 4년제 대입 인원은 382,730명으로 2006년 이후 최대의 대입 정원이었다.

93년생을 필두로 한 이 세대는 성별 불균등, 과잉 인구, 경제위기와 코로나 이후 낮은 취업률, 90년대생 여성의 적극적인 사회진출 등의 사회 현상을 고루 겪어왔다. 특히나 상대적으로나 취업률과 고용의 질이 하락한 20대 남성에게 그 여파는 더 컸다. 이들은 또래 2030 여성과 달리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해주는 정치 세력 또한 갖지 못했다(적어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마치 미국에서 흑인 등에 대한 적극적 우대 조치(Affirmative action) 때문에 백인들이 차별당하고 반발하듯, 한국 사회에서 20대 남성은 '차별받고' 있다고 느낀다. 여성들의 사회진출이 늘어나고, '장애인보다 높은 가산점'이 논란이 되고, 여성할당제가 시행되는 동안 남성들은 여전히 군대에 가고 결혼에 따른 경제적인 부담을 진다는 것이다.

통계 수치나 정의, 공정성에 대해 어떤 말을 하더라도, 그 누가 20대 초반 군대에서 겨울에 행군을 마치고 돌아와 SNS에서 또래 여성들이 유럽 여행을 하는 것을 본 그를 설득할 수 있을까(천관율 기자의 "20대 남자, 그들은 누구인가" 시사IN 심층기사가 이를 잘 정리해놓았다).

이것이 2021년 서울시장 재·보궐 선거에서 20대 남성의 72.5%가 국민의힘 오세훈을(여성은 40.9%) 지지하며 끝내 서울시장의 자리에 올려놓은 힘이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효능감은 국민의힘 대표로 '능력주의(meritocracy)'를 표방한 30대 이준석을 당선시켰고, 21대 대선 양자 대결에서 20대 남성의 71.9%가 '경상도 남자' 홍준표 후보를(여성은 21.6%) 지지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오마이뉴스-리얼미터 9월 2주 차 정례 조사)

이들은 '여자도 무엇이든 할 수 있어'(Girls can do anything)이라면, '남자도 무엇이든 할 수 있어'도 말이 안 될 것이 없다고 주장한다. '인국공 사태'에서 비롯된 공정함에 대한 인식도 이에 한몫을 보탠다. 예전처럼 남자는 쩨쩨하게 그러는 게 아니다, 남자는 울면 안 된다, 남자가 품어줘야겠다는 가부장제에 기반한 '남성성'의 붕괴하고 있다. 그리고 그 선두에 '이대남'들이 보인다.

이들은 이제 결혼이라는 사회 제도에 대해 반기를 든다. 특정 성별, 특정 집안이 경제적으로 부담을 지는 시대를 끝내고 양성 평등한 결혼을 만들어 내자는 주장이다. 우리 세대는 ATM 기계, 기러기 아빠가 되지 말자는 몸부림이고, 그것의 거친 표현이 '설거지론'이 되었다.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이념과 시대 정신의 부재

설거지론의 바탕이 되는 또 다른 사회적 상황은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이념과 시대 정신의 부재, 그 자리를 대체한 배금주의이다. 한국 사회는 과거 시민사회 구성원들 모두가 공감하는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거대한 물결이 존재했다. 산업화 세대의 시대정신이 2016년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을 마지막으로 끝났다면, 89년 민주화 혁명을 이뤄낸 민주화 세대와 586(50대, 80학번, 60년대생)의 시대정신도 그 끝을 고하고 있다. 이를 대체할 특정한 이념이나 시대 정신은 보이지 않는다.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에서 오구라 기조는 한반도가 주자학, 이기론에 의한 국가 통치 이후 오로지 '리'라는 원리에 의해 움직였다고 말한다. 자연의 법칙과 인간사회의 도덕이 일치되는 '하나의' '절대적인' 규범이 존재하는 것이 한국 사회라는 것이다. 우리의 DNA에는 이 '이기론'의 피가 흐른다. 산업화와 수출의 열망, 논을 팔아서 공부시켜 서울대를 보내던 열망, 전 국민이 아파트에 살고, 아파트값이 오르기를 바라는 열망, 수도권의 집중화, 민주주의의 갈망 모두 이런 '리'의 연장선상이다.

문제는 더 이상 한국 사회에 시민들을 하나로 묶을 이념이, '리'가 사라졌고, 지식인들은 이를 지켜만 보며 새로운 시대정신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대한민국은 IMF 이후 신자유주의의 무한 경쟁과 배금주의만 남은 철학적으로 '진공'의 상태가 되었다. 수능 강화, 인국공 논란과 같이 사람들을 시험 성적으로만 줄 세우는 이른바 능력주의(Meritocracy)는 산업화 시대보다 더한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이전 시대에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의 결합이자, 평생을 함께하는 가족을 만드는 과정이고, 사회인으로서 한국인이 거치는 필수적인 통과의례이자 철학이었다. 설거지론은 이러한 철학이 붕괴하며 '결혼'마저도 하나의 계산이 되어버린 배금주의 세태의 또 다른 표현형이다.

사회적 공론장의 부재

결혼에 대해 어떻게 설거지라는 극단적인 이름이 붙게 되었을까. 우리 사회의 건강한 토의의 장이 부족했고, 그 빈 자리를 자극적인 단어를 사용하는 목소리 큰 세력들이 대체했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되겠다는 대선 주자들마저도 상대방이 '없어져야'할 존재라고 말한다. 갈등을 해결해 나가야 할 정당들은 상대편 당이 '좌파' '토착 왜구'라며 대한민국의 헌법정신에 어긋나는 존재라 말한다.

유튜브와 SNS에서는 그 사람의 선호만을 보여주는 '필터 버블'(Filter bubble)을 통해 극단주의적인 의견이 강화되고 있다. 물론 단순히 상대편의 말을 남성 혐오, 여성혐오로 몰아가는 사람들이나 극우, 극좌의 대두는 딱히 한국의 현상만도 아니다. 이러한 흐름은 영국의 브렉시트와 미국의 트럼프 당선과 더불어 전세계가 함께 겪는 문제이다.

이상적인 민주 법치국가에서 정치는 일반의 의지가 집합된 총체여야 한다. 하버마스는 우리 사회의 문제가 자유로운 시민의 공론을 통해 해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국의 시민사회의 갈등은 국가를 통해 해소되고 있는가. OECD 평균 1687시간에 비해 턱없이 높은 1908시간의 근로시간 하에서 시민들이 의견을 주장하고 토의할 '시간'이 존재하는가. 시민들의 토의가 정당을 통해 실정법에 충분히 반영되고 있는가.

합리적이고 공적인 토론을 통해 갈등이 조정되지 않고, 그렇게 분출되지 않은 압력은 인터넷 공간에서 정제되지 않은 표현을 통해 쏟아져 나온다. 이미 젠더갈등은 이념, 빈부갈등과 함께 우리 사회에서 가장 심하다는 갈등으로 느껴지고 있다. (디지털 데이터로 본 韓 사회갈등…"심화·확대됐다" 뉴스1) 우리는 이미 일베(일간베스트)와 메갈(메갈리아)라는 극단적인 세력들이 크고 자극적인 목소리를 내지르며 헤게모니를 주도하는 광장을 목격하고 있다. 그 헤게모니 중 가장 최신의 목소리가 설거지론이다.

'설거지론'과 한국 사회의 미래

아이작 뉴턴이 떨어진 사과를 통해 고전물리학 이론을 확립하기 이전에도 사과는 지구상에 수없이 떨어졌다.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을 확립하기 이전에도 빛의 속도는 일정했다. 막스 베버가 프로테스탄티즘을 설명하기 이전에도 합리주의는 존재했다.

기존의 자연법칙과 사회 현상에 인간이 이름을 붙이고 이론으로 만들 때야 비로소 인간은 그 법칙과 현상을 이해할 수 있다. 지식인들과 주류 언론들도 설거지론을 단순히 혐오 단어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위와 같이 그것이 내포한 사회적인 함의와 한국 사회의 문제점에 대해 함께 논의해보아야 한다.

소변을 가리지 못하는 어린아이에게 하는 '배뇨 훈련'이 있다. 그 방법의 하나로 아이가 겪는 상황과 감정들에 이름을 붙이는 치료법이 있다. 소변을 누는 부정적인 감정, 불안감과 수치스러움, 악몽이 있다면 그 모든 부정적인 것들을 한 봉지에 담는다. 그리고 그 봉지에 이름을 붙이며 구체화하고, 지나가라 말하는 방식으로 아이의 배뇨 조절 과정의 어려움이 극복된다.

이렇듯 '설거지론'은 (비유나 표현 방식의 품위에 대한 논쟁과는 별개로) '라벨링' Labelling으로써 이미 존재하는 사회적 갈등 상황과 현상들에 대한 해결책으로, 배설 방식으로 활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기생충>과 <오징어게임>이 한국 사회의 부조리를 조명해주었듯, '설거지론'도 한국 사회를 읽는 하나의 단어로 받아들여진다면 좋겠다. 단지 혐오 표현 논쟁을 넘어 문제의식을 불러일으키고 담론을 형성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 논란을 거치며 사람들 사이에 건강한 공론의 장이 만들어지고, 시민사회가 생산적이고 상호 존중하는 토의를 통해 건강하고 따듯한 세상을 만들어 나가길 간절히 바란다.

덧붙이는 글 | 류옥하다 기자는 스물 세 살 학생 시민기자입니다.


태그:#젠더갈등, #설거지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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