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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보감>은 현대의학이 발달한 오늘날까지도 가장 사랑받고 신뢰받는 의학서 중 하나다. 지난 2009년에는 세계기록유산으로도 지정되었으니 그 가치를 인정받은 셈이다. <동의보감>을 쓴 허준(1539~1615)은 16세기를 살았던 인물이다. 당시 <동의보감>과 같은 의학서가 쓰여질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허준과 유희춘의 끈끈한 인연
 
허준은 우리나라 한의학서 중에 가장 신뢰받는 의학서인 <동의보감>을 편찬한 이다. 2009년 세계기록유산으로도 지저되었다.
▲ <동의보감>을 편찬한 허준 영정 허준은 우리나라 한의학서 중에 가장 신뢰받는 의학서인 <동의보감>을 편찬한 이다. 2009년 세계기록유산으로도 지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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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가장 높은 드라마 시청률을 보일 만큼 인기가 있었던 허준과 <동의보감>에 대한 관심은 이를 낳게 한 시대적 소명이 있었을 것이다. <미암일기>를 통해 허준과 <동의보감>이 탄생한 시대를 살펴보면 유희춘이 살았던 당시 사람들의 삶과 사상이 깃들어 있다. <미암일기>에는 유희춘과 허준의 관계를 살펴볼 수 있는 부분이 많이 등장한다. 이는 둘이 꽤 깊은 인연이 맺어졌다는 것을 반증한다.

그런데 허준과 유희춘은 어떤 인연이 있었길래 서로 막역한 사이가 되었던 것일까? 허준의 출생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허준과 유희춘이 살았던 곳을 놓고 보면 어느 정도 짐작이 간다. 허준의 외가가 담양이었으며 미암 유희춘은 처가인 담양으로 가서 살았기 때문이다. 담양이라는 공간을 통해 두 사람의 인연이 맺어진 것이 아닌가 보는 것이다.
 
<동의보감>은 현재 까지도 가장 사랑받는 의학서로 평가받고 있다. <미암박물관 소장>
▲ 허준이 편찬한 <동의보감> <동의보감>은 현재 까지도 가장 사랑받는 의학서로 평가받고 있다. <미암박물관 소장>
ⓒ 정윤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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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준의 가계를 살펴보면 아버지는 허론으로 용천부사를 지냈으며 어머니는 영광김씨의 딸이다. <미암일기>에는 "봉사 김시흡은 효자 부정 김유성의 손이며 허준의 적삼촌嫡三寸 숙부"라고 기록하고 있다.

적삼촌이라 한 것으로 보아 허준의 생모가 김욱짐의 소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허준의 생모인 김씨 부인은 당시 거주지가 담양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허준의 외삼촌인 김시흡과 유희춘은 일찍이 서로 왕래가 있었던 사이다. <미암일기>에는 김시흡의 문안 방문이 종종 일기에 기록되고 있다. 유희춘은 서울로 과거 시험을 보러 온 김시흡의 사위를 돌보기도 한다.
 
1573년 2월 10일
"어제 회시를 보러 올라온 김시흡의 사위에게 먹을 보내주었다."

또한 유희춘의 스승은 김안국으로 김안국은 허준의 5촌 당숙이 된다. 김안국의 아버지 김연이 허준의 조부였던 허곤의 사위로 양천허씨 외손이다. 이로보면 허준과는 매우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허준의 외삼촌인 김시흡과 유희춘이 서로 왕래 하는 친분이 있었고 김안국의 제자가 유희춘임을 보면 담양을 처가로 둔 유희춘과 허준의 관계는 자연스럽게 이어진다고 할 수 있다.

허준의 기록이 처음 등장한 <미암일기>

허준에 대한 기록을 처음으로 확인하고 있는 것이 <미암일기>다. 허준은 29세 되던 해인 1568년 서울에 거주하면서 미암 유희춘을 만난다. 유희춘은 이때 유배지에서 해배되어 관직에 복귀하여 서울에 거주하고 있었다.
 
1568년 1월 29일
"판관 박란이 찾아와 이야기를 하고, 판관 구택도 와 서로 만나 반가웠다. 허준도 다녀갔다."
 
허준이 다녀간 것을 통해 유희춘은 이미 허준과 만남을 이어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미암일기>에는 허준에 대한 기록이 자주 등장하고 있다. 그해 2월 허준이 노자老子, 문칙文則, 조화론調和論 등 3권의 책을 보내주자 유희춘은 이를 매우 기뻐한다. 허준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해 경전과 사서에 두루 밝았다고 한다.
유희춘에게 보낸 책을 보면 그가 대한 학문의 범위를 짐작해 볼 수 있다.

허준은 유희춘의 부인 송덕봉이 혀가 부어오르는 증상인 설종舌腫이 생기자 송덕봉의 설종병을 논의하고 돌아간다. 또한 유희춘의 얼굴 좌측에 종기가 생기자 허준은 지렁이 즙을 바르게 한다. 이를 보면 허준은 유희춘 집안의 갖가지 병을 치료해 주는 주치의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허준과의 각별한 인연 때문이었는지 유희춘은 1569년 6월 이조판서 홍담에게 허준을 내의원에 천거해 달라고 편지를 써서 부탁한다.
 
1569년 윤6월 초3일
"허준을 위하여 이조판서에게 편지를 보냈다. 내의원으로 천거를 해준 것이다."
 
이로인해 허준은 내의원에 들어가고 1573년에는 정3품의 내의원정에 오른다.

허준의 스승은 유의태인가 양예수인가
 
<미암일기>를 통해 허준과 유희춘의 인연을 살펴볼 수 있다. 미암박물관에 소장된 동의보감이 이를 잘 반증해 준다.
▲ <동의보감>의 내경편. <미암박물관 소장> <미암일기>를 통해 허준과 유희춘의 인연을 살펴볼 수 있다. 미암박물관에 소장된 동의보감이 이를 잘 반증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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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준의 스승은 보통 유의태로 알려져 있다. 소설 <동의보감>을 비롯해 드라마 허준에서는 유의태가 허준을 최고의 명의로 만든 스승이자 죽을 때는 자신의 몸을 제자인 허준에게 내주어 인체의 구조를 해부할 수 있도록 해준 살신성인의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실제 유의태의 실존인물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그는 단지 소설이나 드라마 속에서 그려지는 허구의 인물로 알려지고 있다. 실존 인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미암일기>에는 허준의 스승임을 잠작케 하는 양예수(?~1597)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양예수는 유희춘과 꽤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그는 의술에 능통하였으며, 명종때 통정대부에 오르고 <의림촬요>를 편찬한 인물이다. <미암일기>에서 양예수는 유희춘을 진맥해주며 장수할 징조라고 말한다.
 
1570년 8월 큰달 1일
"양예수가 와서 나의 맥을 짚어보고는 가라앉고 늘어지게 뛴다면서 장수할 징조라고 했다. 그리고 이황원二黃元을 보더니 곰팡이가 끼어서 못 먹는다고 했다."
 
이를 보면 허준이 내의원에 출사하기 전부터 양예수와 알고 지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 전통의학의 최고 명의로 알려진 양예수를 만난 것은 허준에게는 큰 행운이었을 것이다. 둘의 만남이 유희춘을 통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보는 것이다.

그럼 양예수는 진짜 허준의 스승이었을까? 아직까지 여러 정황으로 보아 허준의 스승이 양예수라고 하기는 어려운 듯하다. 먼저 선조가 허준에게 명을 하여 만든 <동의보감>은 양예수도 참여하였는데 스승을 놔두고 제자가 책임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두 사람은 진료스타일과 약물을 쓰는 방식에서도 차이가 난다. 양예수는 인삼을 위주로 한 따뜻한 약재를 투약하는 처방을 하는 것에 반해, 허준은 차가운 약재를 선호하는 방식을 택하였다는 것이다. 처방의 방식을 놓고 보면 스승과 제자 사이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최고의 한의학서인 <동의보감>의 탄생 배경에는 임진왜란이라는 병란이 있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허준은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하였는데 당시 허준의 나이 54세였다.

임진왜란을 겪은 후 선조는 조선의학의 맥을 잇는 종합의학서를 편찬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이때 자신을 호종했던 허준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는지 1596년(선조29) 허준에게 의학서의 간행을 명하게 되어 탄생한 것이 <동의보감>이다.

<미암일기>를 통해 보면 16세기는 강고한 신분사회의 구조가 유지되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렇게 경직된 형태보다는 나름 관대한 양면성을 가지고 있었음을 살펴볼 수 있다.

허준은 서자 출신이지만 유희춘의 도움으로 인해 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다. 허준 은 당시 신분사회의 제약이 있었지만 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고 자신의 신분적 핸디캡을 딛고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조선 최고의 의학서를 탄생시켰다는 점에서 그의 인간적인 면모가 더욱 평가받고 있다.

태그:#허준, #동의보감, #유희춘, #미암일기, #담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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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를 중심으로 지역의 다양한 소재들을 통해 인문학적 글쓰기를 하고 있다. 특히 해양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16세기 해남윤씨가의 서남해안 간척과 도서개발>을 주제로 학위를 받은 바 있으며 연구활동과 글을 쓰고 있다. 저서로 <녹우당> 열화당. 2015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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