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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내기를 끝낸 들판은 조용하다. 사름을 한 어린 모들이 바람을 맞아 살랑대고, 백로며 왜가리가 먹이를 찾아 논바닥을 훑는다. 강화의 6월은 평화롭기만 하다.

휴일 아침, 벌써부터 차들이 강화로 들어온다. 다리를 건넌 차들은 뿔뿔이 흩어지는데, 다리 위로 또 다른 차들이 몰려온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찾는 데도 강화도는 아무렇지 않다. 사람과 차량으로 몸살을 앓을 만도 하건만 강화는 대인배처럼 넉넉하게 다 품어준다.

강화도, 넉넉하고 평화롭다

자연 속에서 휴일 한 때를 보내려고 강화로 오는 사람들 중에는 낚시를 하러 온 사람들도 있다. 강화에는 수로며 저수지, 바다까지 있어서 낚시를 할 수 있는 곳들이 많다. 바다낚시와 민물낚시를 함께 즐길 수 있는 곳이 강화도다.
 
모내기를 끝낸 강화도의 들판
 모내기를 끝낸 강화도의 들판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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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군 화도면 장곶돈대 아래 바닷가도 낚시꾼들이 즐겨 찾는 곳인가 보다. 돈대 근처 빈 터에 차들이 몇 대 서있다. 돈대를 보러 온 사람도 있겠지만 갯바위 낚시를 하러 온 사람도 있으리라.

장곶돈대((長串墩臺)는 인천시 강화군 화도면 장화리에 있는 돈대다. 인천시 기념물 제19호인 장곶돈대는 이름에 벌써 바다 쪽으로 길게 뻗어나간 곳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곶(串)'은 새의 부리 마냥 바다 쪽으로 뾰족하게 뻗어나간 땅을 말한다. 포항의 호미곶과 울산의 간절곶 그리고 황해도의 장산곶 등이 우리나라에서 대표적인 '곶'이라고 할 수 있다.

긴 '곶'에 들어선 감시 초소

강화도에는 지명에 '곶'이 들어간 곳이 더러 있다. 강화대교가 있는 '갑곶'을 비롯해서 북한의 황해도 개풍군을 마주보고 있는 '월곶' 등이 있다. 돈대 이름에도 곶이 들어간 게 있다. 미곶돈대며 장곶돈대 또 북일곶과 송곶, 갈곶, 구등곶, 월곶돈대가 바로 그곳이다.

돈대(墩臺)는 요충지의 높은 언덕이나 해안가 구릉에 쌓은 소규모 성곽 시설이다. 외부는 성곽으로 축조되어 있으며, 내부에는 포를 쏘거나 사방을 볼 수 있게 만들었다. 조선시대에 축조한 해안가 감시 초소가 바로 돈대다.
 
지름 31.1m, 둘레 128m인 '장곶돈대' 전경.
 지름 31.1m, 둘레 128m인 "장곶돈대" 전경.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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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곶돈대' 출입구.
 "장곶돈대" 출입구.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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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에는 모두 54개의 돈대가 있다. 모든 돈대들은 시야 확보가 잘 되는 바닷가의 언덕이나 바다와 맞닿아 있는 산의 끝자락에 위치한다. 돈대가 감시 초소임을 생각해 볼 때 바다 쪽으로 툭 튀어나간 '곶'에 돈대가 들어서는 건 너무나 당연하다.  

장곶돈대는 조선 숙종 5년(1679)에 축조되었다. 숙종은 강화도를 요새화했다. 두 번의 호란(胡亂)을 겪으면서 보장처의 필요성을 절감했던 조정에서는 강화도에 돈대를 쌓기로 했다. 어영군(왕 호위군) 4300여 명과 승병(승려군) 8000여 명을 동원해서 80여 일 만에 48개의 돈대를 만들었다. 강화도는 그 자체로 이미 큰 성이나 마찬가지이지만 해안가에 일정 거리를 두고 소규모 성곽인 돈대를 쌓아 방비를 더 튼튼히 하였다. 

'곶'이 '꽃'이 되다

'긴곶돈대'로도 불리었던 장곶돈대는 강화도 서쪽 해안과 석모도 동쪽 해안 사이를 흐르는 '석모수로'의 초입에 있다. 석모수로는 조선시대 삼남(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에서 한양으로 올라오는 해로의 길목 중 하나인데, 강화도 남쪽 해안에 비해 수심이 깊어 썰물 때도 배를 띄울 수 있었다. 그로 인해 포구(浦口)가 발달했고 그 주변에 돈대가 배치되었다.

곶의 길이가 길어서 '긴곶'으로 불리던 이곳은 한자어로 옮겨지며 장곶(長串)이 되었다. 장곶은 또 '장화리(長花里)'로 이름이 바뀌었다. '꽃'의 옛 어원도 '곶'이니 장곶의 곶이 꽃을 뜻하는 화(花)로 바뀌었고 긴곶, 곧 장곶은 장화리가 되었다.
 
'장곶돈대' 출입구를 통해 본 돈대 내부.
 "장곶돈대" 출입구를 통해 본 돈대 내부.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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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곶돈대'는 원형이 많이 남아 있다.
 "장곶돈대"는 원형이 많이 남아 있다.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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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곶돈대는 숙종 5년(1679)에 축조되었다. 그해에 48개의 돈대를 한꺼번에 만들었다. 이후로도 몇 개 더 쌓았으니 숙종 44년(1718)에 빙현돈대를, 경종1년(1720)에는 초루돈대를 축조했다. 영조 때도 돈대를 만들었다. 작성돈대(영조2년, 1726)와 제승돈대(영조 15년, 1739)가 그것이다. 이후 광성보에 용두돈대를 하나 더 만들었으니, 이로써 강화도의 돈대는 모두 54개가 된다. 

원형이 남아 있는 '장곶돈대'

갑오개혁(고종31년, 1891) 때 돈대는 진무영과 함께 혁파(革罷)된다. 그 후 방치되어 허물어지고 훼손되었다. 돈대의 석재들은 민가의 담장이나 제방 둑을 쌓는데 이용되어 점차 사라져갔다. 장곶돈대는 그런 훼손의 과정을 덜 겪었다. 민가와 멀리 떨어져 있었던 덕분에 보존될 수 있었다. 

장곶돈대는 1993년에 부분 보수를 하고 2018년에서 2019년에 걸쳐 보수 정비 공사를 했다. 허물어진 성벽을 보수할 때 외부에서 새 돌을 가져오지 않고 돈대 현장에 있는 석재를 그대로 사용했다. 그 덕분에 옛날 돌과 현대의 돌이 섞여 있는 부조화스런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장곶돈대는 원형을 잘 간직하여 고졸한 옛 맛을 보여준다.
 
'장곶돈대' 포좌.
 "장곶돈대" 포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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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좌 내부 왼쪽 벽면에 탄약을 놔두었던 '이방'이 설치되어 있다.
 포좌 내부 왼쪽 벽면에 탄약을 놔두었던 "이방"이 설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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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곶돈대는 지름이 31.1m에 달하는 둥근 원형의 돈대다. 돈대의 둘레는 128m이며 성벽의 높이는 3.2m 내외이다. 돈대 바닥의 기단을 포함하여 포좌의 윗부분에 덮어 얹은 개석(蓋石)까지 거의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다만 몸을 숨겨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성 위에 낮게 덧쌓은 담인 여장(女牆)은 흔적만 남아 있을 뿐 현재는 볼 수 없다.

장곶돈대에는 대포를 설치했던 포좌가 4개 있고, 포좌 안쪽 벽면에는 일종의 감실(龕室)과 같은 공간이 있다. 포탄을 놔두는 곳이었을 이 공간을 이방(耳房)이라 부르는데, 이러한 시설은 서쪽 해안에 있는 돈대(북일곶, 장곶, 송곶, 망양, 삼암돈대)에서 볼 수 있다.  

일몰 조망지 '장곶돈대'

쓸려갔던 바닷물이 다시 들어온다. 한 점 풍경이 되어 낚시를 하던 사람들이 낚싯대를 걷는다. 손 맛 보는 재미에 낚시를 한다는데, 오늘은 고기들이 입질을 많이 했을까?

머리 위에 떠있던 해가 서쪽으로 많이 기울었다. 낚시꾼들은 집으로 돌아가고 돈대 앞 빈 터에는 또 다른 차들이 자리를 잡았다. 해넘이를 보려고 온 사람들이 타고 온 차다.

장곶돈대에서 일몰을 기다린다. 한결 순해진 해가 천천히 바다를 향해 내려온다. 돈대 성벽에 올라서서 바라보던 사람들은 말을 잊었다. 고요하다. 세상사는 저만큼 멀어져 버렸다.
   
'장곶돈대'에서 바라본 일몰.
 "장곶돈대"에서 바라본 일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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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곶돈대' 아래 바닷가.
 "장곶돈대" 아래 바닷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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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강화뉴스'에도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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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을 '놀이'처럼 합니다. 신명나게 살다보면 내 삶의 키도 따라서 클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오늘도 뭐 재미있는 일이 없나 살핍니다. 이웃과 함께 재미있게 사는 게 목표입니다. 아침이 반갑고 저녁은 평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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