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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조건> 책 표지.
 <인간의 조건> 책 표지.
ⓒ 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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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조심하며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코로나에 감염됐다. 그래서 일주일 동안 집에 격리돼 있었다. 처음에는 어떻게 집에 격리돼 지낼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집에 책과 커피가 있어서 잘 지낼 수 있었다. 거의 매일 밥 먹고 책 읽는 과정을 반복했다. 일주일 동안 읽은 책은 그동안 꼭 한번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고 싶었던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이다. 이 책에 포함된 노동 부분을 읽으며, 노동인권교육에 대해 몇 가지 단상을 갖게 됐다.

'노동인권교육'은 노동에 종사하는 이들의 인권을 보호하고 증진하기 위한 교육을 말한다. 노동인권교육은 몇 가지 단계로 나눠지는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 단계는 노동의 의미와 가치, 그리고 역사 등을 알아보는 것이다. 이를 위해 주변의 다양한 직업들을 알아보고, 일의 보람과 소중함 등을 생각해 보고, 이러한 직업들이 상호 연계돼 있으며, 직업들의 차이를 차별하지 않도록 교육한다. 그리고 최근 디지털 환경에서 직업의 변화, 노동체제의 변환 등을 살펴보기도 한다. 

두 번째 단계는 노동하는 이들이 가지고 있는 인권, 즉 노동권을 교육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세계인권선언 제23조와 24조에 제시된 일할 권리, 자유로운 직업선택권, 공정하고 유리한 조건에 관한 권리, 실업으로부터 보호받을 권리, 동일노동에 대한 동일임금의 권리, 자신과 가족에게 인간적 존엄에 합당한 생활을 보장해주는 정당하고 유리한 보수를 받을 권리,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가입할 권리, 노동시간의 합리적 제한과 정기적인 유급휴일을 포함한 휴식과 여가의 권리 등을 교육한다. 그리고 이러한 노동권을 더 잘 지켜 나아가기 위한 노동법, 근로기준법을 살펴보고, 고용계약서 작성 및 임금 미지불시 대처방안 등을 연습하기도 한다. 

세 번째 단계는 노동조합의 의미와 중요성 그리고 역사 그리고 노사협상에 대해 교육하는 것이다. 노동조합은 노동자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기관으로 노동자들의 단결로 노동자의 임금과 노동환경 등의 개선을 이뤄 왔다. 우리나라의 경우 노동조합의 가입률과 단체협약 적용률이 낮은 편에 속한다. 이는 많은 부분 노동조합에 대한 부정적 인식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세 번째 단계의 노동인권교육에서는 노동조합의 중요성과 역할 그리고 종류 등을 교육하고, 구체적으로 노사협상 방안을 연습해보기도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노동인권교육은 위의 세 단계에서 마무리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기존의 노동인권교육에서는 잘 제시되지 않고 있지만 매우 중요한 부분이 있다.

그것은 바로 '노동자들의 정치적 힘을 키우는 교육'이다. 노동조합은 많은 부분 노동자의 임금이나 노동환경개선에 노력해 노동자의 경제적 힘의 증가에 기여한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삶이 더 나아지고, 한 사람의 인간으로 존엄한 대우를 받기 위해서는 경제적 힘과 더불어 정치적 힘이 요구된다. 이를 위해서는 노동자의 정치 참여가 중요하며, 구체적으로 노동자를 위한 정당의 형성과 참여 그리고 투표가 중요하다. 따라서 노동인권교육의 네 번째 단계가 요구되는데 그것은 바로 노동자의 정치참여 교육이다. 

이는 사실 아렌트가 노동의 특성에 대해 서술한 부분을 넘어서려는 노력이기도 하다. 아렌트는 노동이 필연성의 영역에 속한다고 말한다. 그녀는 이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노동하는 동물은 세계로부터 도망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자기 신체의 사적 성격 속에 갇혀서, 즉 누구와 함께할 수 없고 온전하게 의사소통도 할 수 없이, 필요의 충족에만 사로잡힌 채 세계에서 추방된다(아렌트, 인간의 조건, 2019: 210)." 

즉 노동은 인간을 먹고 살아야 하는 삶의 필연성 영역에 묶어 두며, 이로 인해 인간은 다른 여러 사람들과 함께 하거나 소통하기 어렵다고 한다. 노동인권교육의 네 번째 단계는 아렌트가 생각한 노동의 특성을 넘어서 서로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고 토론하며 세상을 함께 만들어 가는 일에 참여하는 일이며, 그녀가 말한 노동의 필연성을 넘어 자유로 나아가는 길이기도 하다. 이제 우리는 노동인권교육의 네 번째 단계에 이르렀다. 그러면 이제 노동인권교육은 여기서 마무리돼야 하는가? 잠시 여기서 아렌트의 말을 더 들어보자. 

"다양한 노동운동을 이끈 사람들과 마르크스를 고무시켰던 희망, 즉 여가가 인간을 필연성에서 해방시키고 노동하는 동물을 생산적으로 만들 것이라는 희망은 기계론적 철학의 허구에 의존하고 있다. (중략) 그래서 삶의 노역에 소비되어 고갈되지 않는다면 자동적으로 '보다 높은' 다른 활동을 장려할 것이라 생각한다.

(중략) 마르크스가 죽은 지 1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이런 추리가 오류임을 안다. 노동하는 동물의 여가 시간은 소비에만 소모되고, 그에게 남겨진 시간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의 탐욕은 더 커지고 더 강해진다. 이 욕구가 더 정교해지면서 소비가 더 이상 필수품에만 국한되지 않고 주로 사치품에 집중된다는 점은 이 사회의 성격을 변화시키기보다 이 사회의 심각한 위험을 은폐한다(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2019: 226)."


즉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들, 그리고 마르크스가 생각한 것은 노동조합이나 노동자를 위한 정당을 통해 여가 시간이나 많은 임금을 얻으면, 노동자들이 자동적으로 '보다 높은' 다른 활동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많아진 여가 시간과 임금을 가지고 소비에만 몰두하고, 더 큰 탐욕에 빠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더 큰 소비와 더 큰 탐욕은 더 많은 임금, 더 많은 여가 시간을 요구한다. 그리고 이는 더 많은 노동과 생산 그리고 더 큰 생산성을 요구하게 된다. 그리하여 노동은 더 중요해지고 강화되며, 노동자는 여전히 노동의 굴레에, 필연성의 영역에 더 갇히게 된다. 

그러므로 일하는 우리가, 즉 노동하는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다섯 번째 '노동인권교육'이 요구된다. 그것은 바로 노동에서 벗어나는, 그리고 더 높은 활동으로 나아가는 교육이다. 이는 노동의 필연성에서 벗어나, 자유로 나아가는 교육이 될 것이다. 유용성, 이익과 이윤의 논리, 효율성의 논리를 벗어나 다양한 삶의 의미를 음미하고 모색하는 교육이 돼야 할 것이다.

이는 또한 소비의 향락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교육이기도 하다. 이는 아마도 인간을 그 자체로 고민하게 하는 시와 문학, 아름다움과 진리를 고민하는 예술과 학문, 자유를 위한 교육이 될 것이다. 즉 노동인권교육의 마지막은 노동자를 노동에 계속 가두는 교육이 아니라 이를 넘어서 그/그녀를 진정 자유롭게 하는 교육이 돼야 할 것이다. 

이것이 내가 코로나 감염에 의한 격리기간 동안 아렌트의 글을 읽으며 배운 것이다. 그녀에게 감사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대전충남인권연대 뉴스레터에도 실립니다.


인간의 조건

한나 아렌트 (지은이), 이진우 (옮긴이), 한길사(2019)


태그:#노동인권교육, #진정한 자유, #노동의 필연성,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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