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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에서 나운규와 신일선
▲ <아리랑>에서 나운규와 신일선 <아리랑>에서 나운규와 신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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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10월 1일 서울의 단성사에서 무성영화 아리랑이 개봉되었다.

25세의 영화인 나운규가 각본ㆍ감독ㆍ주연의 1인 3역을 맡아 제작한 이 영화는 상영이 끝날 무렵 극장 안은 온통 눈물 바다가 되었고 관객 모두가 일어나 영화의 주제곡 '아리랑'을 따라 불렀다. 관객 중에는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는 사람도 있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나네.

 청천하늘에 별도 많고
 우리네 살림살이 말도 많다.

 풍년이 온다네 풍년이 온다네
 이강산 삼천리에 풍년이 온다네.

 삼천초목은 젊어만 가고
 인간의 청춘은 늙어만 가네

 문전 옥답은 어디다 두고
 쪽박 살림살이가 웬 일인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 간다.

이 때 주제가 아리랑의 노랫말은 이후 민요 아리랑의 '정본'처럼 인식되고 국내외 한인 사회에서 길이길이 불리게 되었다. 1920년대 암울한 조선사회에 돌풍을 일으킨 이 영화의 스토리는 다음과 같다.
 
나운규의 아리랑 영화포스터
▲ 나운규의 아리랑 영화포스터 나운규의 아리랑 영화포스터
ⓒ 김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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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리랑 스토리

어느 마을에 철학을 연구하다 사립전문학교를 중퇴한 영진이란 청년이 있었다. 그는 독립만세 운동에 가담했다가 일제의 혹독한 고문으로 정신에 이상을 일으켜 고향에 돌아와 무위도식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많은 부채로 쪼들림을 받는 늙은 아버지와 귀여운 누이동생 영희가 있었다. 이 농촌의 지주 천가(天哥)의 하인인 오기호는 영희에게 야심을 품고 빚독촉을 핑계로 매일같이 영진의 집을 드나든다. 이런 오기호만 만나면 영진은 용케도 알아보고 언제나 덤벼드는 것이다.

기호는 견디다 못해 천가네 집으로 달려가 구원을 청한다. 천가는 하인을 풀어 영진을 포박한다. 결박을 당한 채 땅에 뒹구는 영진을 전부터 사모하는 명순이 동네사람 틈에서 이를 보고 영진의 부친에게 알린다. 영진의 부친은 한번만 봐달라고 기호에게 매달려 애원한다. 때마침 동네 사립학교 교장인 박 선생이 지나가다 도와주게 되어 영진은 풀려난다. 

박 선생은 영진의 스승으로 누구보다 영진을 사랑해 온 터였다. 때마침 이 마을에는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영진과는 보통학교 동창생으로 죽마지우인 윤현구가 고향으로 온다는 소식이다. 그는 서울에서 대학에 다니고 있었는데 여름방학이 되어 귀향한다는 것이다. 

박 선생을 필두로 여러 사람들이 마중하러 아리랑고개까지 나간다. 사각모자를 쓰고 늠름한 태도로 나타난 현구는 우선 친구인 영진을 찾는다. 정신병자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 현구는 힘없이 영진네 집으로 발을 옮긴다. 그러나 영진은 '아리랑'의 곡조만 흥얼거릴 뿐 현구를 알아보지 못한다. 영진은 노래를 부르며 혼자서 덩실덩실 춤을 추다가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며칠 후 이 마을에는 풍년맞이 농악놀이가 벌어진다. 

동네 사람들은 제각기 고깔을 쓰고 장구를 메고 흥겹게 춤을 춘다. 이때 천가는 주재소 주임인 일본인 순사를 집에 청해 놓고 자기의 첩으로 하여금 술 대접을 하며 영진이 아버지를 이 마을에서 쫓아내 달라고 부탁을 한다. 주임은 염려 말라고 장담을 한다. 한편 흥겨운 풍악소리를 듣고 있던 영진은 뜰로 내려가 기둥에 걸린 낫을 떼어서 세수대야를 두드리며 춤을 추다가 담을 뛰어넘어 사라져 버린다. 현구는 위험한 연장을 들고 나간 영진을 따라나가고 집안에는 영희 혼자만 남게 된다. 

이때 기회를 노리던 오기호는 살며시 들어와 영희의 정조를 요구하며 덤벼든다. 그럴 즈음 영진이 춤을 추며 논두렁을 돌아가는 것을 본 명순은 그것을 알리려고 영진네 집으로 달려간다. 마침 현구가 영진네 집에 왔다가 오기호의 짓을 목격하고 오기호와 치열한 격투를 벌인다. 

현구는 기호에게 맞아 정신을 잃게 되고 이것을 본 영희는 비명을 지른다. 영진이 그 비명을 듣고 자기집 담 위로 뛰어오른다. 영진은 담 위에서 이 광경을 바라보는 순간 영진의 망막엔 마당 위의 광경이 아라비아 사막의 환상으로 바뀐다. 물을 가지고 있는 상인(오기호)과 목이 말라서 물을 달라고 애걸복걸하는 젊은 남녀(현구와 영희)의 모습. "여보세요. 물 좀 주세요"하는 간절한 애원. "아하하, 야 이 젊은 계집아, 네가 저 젊은 사나이를 버리고 나를 따라온다면 물은 얼마든지 줄 수 있다. 자 보아라, 이 쏟아지는 물을 아하하하……"하는 비웃는 소리.   

순간 영진의 시야는 현실을 보게 된다. 오기호, 현구, 그리고 영희의 모습. 그러나 그것도 잠시, 다시 환상이 비친다. 마침 목이 타는 젊은이는 할 수 없이 상인에게 덤벼들고 결투가 벌어진다. 젊은이의 위기를 본 영진은 사막에 뛰어들어 상인의 목을 낮으로 찔러 쓰러뜨린다. 오기호는 영진의 낫에 찔려 피를 흘리며 고꾸라지고 이 소식을 들은 동네 사람들이 모여든다. 영진은 피투성이가 된 자신을 발견한다. 자기를 둘러싼 사람들의 얼굴을 더듬어 보던 영진이 별안간 울음소리를 내며 한걸음 물러선다. 

잠시 후 그의 눈이 번쩍하고 빛난다. 그는 현구의 손을 덥썩 잡고는 "현구! 자네 현구가 아닌가?" 그러고는 "아버지", "영희야" 소리친다. 영진은 충격으로 본 정신이 되돌아 온 것이다. 이때 주재소 주임이 그의 손을 포승으로 묶는다. 영진은 그제야 자기가 살인한 사실을 깨닫는다. 다음날 포승에 묶인 영진이 일경에 끌려가는 뒤를 동네 사람들이 따른다. 

영진이 아리랑 고개를 넘으며 "박 선생님, 아버지, 영희, 현구, 잘 있어. 그리고 동네 사람들, 내가 이 길로 떠나간다면 이것이 마지막 길일지 모르겠습니다. 나를 위하여 내가 미쳤을 때 항상 불렀다는 '아리랑'을 여러분들 다같이 불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박 선생이 선창이 되어 동네 사람들이 부르는 '아리랑'의 구슬픈 가락이 흘러퍼지며 아리랑 고개를 넘어가는 영진의 뒷모습이 사라져간다. (주석 2)           

영화 <아리랑>이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키며 상영될 즈음 한국사회는 몇 가지 중요한 사건이 일고 있었다. 그해(1926년) 3월 조선총독부는 전국의 사립고등보통학교에 지리ㆍ역사 등의 과목에 일본인 교사를 채용토록 지시하고, 4월 순종이 사망했으며 6월에 6.10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7월 총독부 학무국이 사립학교 교장들을 소환하여 6.10 만세운동에 참가한 학생들의 처벌을 명령했다. 

8월 극작가 김우진과 성악가 윤심덕이 현해탄에 투신, 동반자살하고, 12월 의열단원 나석주가 동양척식회사 등을 폭파했다. 그리고 이 해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게재한 <개벽>이 폐간당하는 등 탄압과 저항의 대척지점에서 아리랑 영화가 상영된 것이다.
명동학교 시절의 나운규 1918년 명동학교에 입학한 나운규의 교복 입은 모습.
명동학교 시절의 나운규 1918년 명동학교에 입학한 나운규의 교복 입은 모습. 명동학교 시절의 나운규 1918년 명동학교에 입학한 나운규의 교복 입은 모습.
ⓒ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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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혹했던 시기 나운규의 영화가 어떻게 총독부 검열을 통과했을까.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은 주인공 '영진'을 미치광이로 만들었기 때문에 검열에 통과된 것이다. 일제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언술의 가사는 통과될 리 없었다.(…) 겉으로는 남녀간의 단순한 사랑노래로 만들고 그 뒤안길과 밑바탕에는 조국애의 씨를 심어놓은 것이다. 일제치하 조선대중음악사의 저항적 형극적 족적이 찾아진다. (주석 3)


주석
2>김원호 편전, <나운규 그 예술과 생애>, 134~136쪽, 백미사, 1982.
3> 박민일, <아리랑 정신사>, 149~150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문화열전 - 겨레의 노래 아리랑]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겨레의노래, #겨레의노래_아리랑, #아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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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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