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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기간 시민단체 활동가와 변호사로 활약하다 도의원이 됐다. 시민단체 출신 변호사라는 다소 이례적인 삶의 경로와 그에 따른 시각으로 경기도를 새롭게 경험하고 있다. 의정활동 중 마주하는 사안을 새로운 시각으로 풀어내고자 한다.[편집자말]
10월 29일, 그날따라 일찍 잠들었다. 가까이서 인간이 가진 어떠한 형용사로도 표현할 수 없는 비극이 일어나고 있었지만 단잠을 잤다. 여느 때와 같이 새벽에 눈을 뜨고 습관적으로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확인했다. 속보가 눈에 띄었다.

'이태원 사상사 속출.'

'사상자 속출'을 읽고 압사 사고는 생각조차 못했다. 누군들 그러했을까? 이태원에서 가까운 용산 대통령 집무실이 생각났다. 순간 무슨 사고가 일어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지난 5일 오후 이태원 압사 참사 추모공간이 마련된 서울 용산구 이태원역 1번 출구에 태극기가 내외국인들의 메모로 뒤덮여 있다.
 지난 5일 오후 이태원 압사 참사 추모공간이 마련된 서울 용산구 이태원역 1번 출구에 태극기가 내외국인들의 메모로 뒤덮여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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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매직으로 덧칠한 리본

청춘(靑春), 지난겨울 삭풍을 견디고 이른 봄 맵살스러운 날씨에 빼꼼 얼굴을 내민 새순같이 푸른, 존재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운 청춘들이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순간 심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

기사와 함께 보게 된 참사 사진의 잔상이 머리에 맴돌아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정신조차 차리지 못한 채 이틀을 보내고 11월 1일 경기도의회 본회의를 위해 정신을 추슬렀다. 본회의에서는 자당 소속 의원의 도정질문에 손뼉을 치고 환호성을 지르는 국민의힘 의원을 향해 민주당 의원 몇몇이 격하게 항의하는 일이 발생했다. 자당 출신 대통령이 국가 애도 기간을 선포했음에도 의회에서 손뼉을 치고 환호하다니.

본회의가 끝나고 의회에 마련된 합동분향소에서 참사 희생자들에 대한 조문이 이뤄졌다. 그런데 의회에선 흰색 근조(謹弔) 글자를 검은색 매직으로 덧칠한 리본을 나눠주었다. 그저 이상하다 싶은 마음만 가지고 조문했다. 그런데 조문을 마치고 나서 근조 글자가 보이지 않는 검은색 리본을 착용하라는 정부 지침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곧바로 매직으로 북북 그어 근조의 흰색이 희석된 흐리멍덩한 리본을 떼어 버렸다.
 
지난 1일 경기도의회가 소속 도의원들에게 나눠준 검은 리본. 의회는 근조 글자를 검은색 매직으로 덧칠했다. 리본 가운데를 자세히 보면 검은 매직 덧칠 자국이 보인다.
 지난 1일 경기도의회가 소속 도의원들에게 나눠준 검은 리본. 의회는 근조 글자를 검은색 매직으로 덧칠했다. 리본 가운데를 자세히 보면 검은 매직 덧칠 자국이 보인다.
ⓒ 김광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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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발치는 분노

'우리 지역에도 희생자가 있을까.' 본회의를 마치자 문득 지역의 희생이 걱정됐다. 곧바로 지역 교육지원청 교육장에게 학생 희생자나 다친 이가 없는지 문자를 보냈다. 부천에선 학생 희생자가 없다는 답변이 왔다. 무의식적으로 스마트폰에 "다행입니다"라는 다섯 글자를 쓰다가 화들짝 놀랐다. 150명이 넘는 사람이 죽었는데 다행이라니.

부천에선 성인 중 한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부천에도 합동분향소가 설치됐다. 그런데 곧 소셜미디어를 중심으로 항의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태원 사고 사망자"라는 표현 때문이었다. 의회 본회의에 집중한 몇 시간 동안 정부는 이태원 참사에 대해 많은 지침을 내렸다. '참사' '희생자'를 사용하지 말라는 정부 지침이 있었다고 했다. 죽음을 대하는 정부의 태도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우리의 청춘들이 영문도 모른 채 세상을 떠났는데 '사고' '사망자' 등의 용어를 규제하고 있다니.

당장 부천시 합동분향소 명칭을 "이태원 참사 희생자 분향소"로 변경하라는 요구와 항의가 이어졌다. 부천시만이 아닌 각 국회의원실과 시·도의원들에게도 민원이 쏟아졌다.

이태원 참사에 마음껏 슬퍼할 수 없었던 이유

숨이 막혔다. 내 가슴의 쥐어짜는 듯한 아픔이 아직도 생생한데, 마음껏 소리 내 울어 그 아픔을 조금이나마 쓸어내고 싶은데, 정작 내게 들이닥치는 일은 분향소 이름을 바꾸라는 민원이었다. 주민의 대표자로서 안고 가야 할 의무이기는 하겠지만, 선출직 정치인이라는 직책으로 감당하기엔 우리에게 찾아온 참사는 너무나 컸다.

다행히 부천시는 신속히 분향소 이름을 바꿨다. 당연한 일이다. 망자를 보내드리는 방식을 국가가 규제하겠다는 발생 자체가 충격적이었다. 처음부터 그러하지 않았어야 했지만 서둘러 잘못을 바로잡은 것은 다행이었다. 비극과 비극을 대하는 우리 자세 그리고 망자에 대한 애도가 아닌 그 호칭을 두고 우왕좌왕하는 사이 국가가 지정한 5일간의 애도 기간은 지나갔다.

국가가 내게 애도하라며 지정한 닷새는 국가의 난감한 행정에 대한 민원 파악으로 허비돼 버렸다. 어쨌든 마뜩잖은 국가가 지정한 애도 기간은 지났다. 이젠 점차 비극의 원인과 잘못이 조금씩 밝혀지고 있다. 참사 직후 정부의 당황스러운 대처의 원인도 차츰 밝혀지고 있다. 지역구인 부천에서도 애도를 지나 참사의 원인 규명과 책임자 처벌에 대한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나도 충분히 슬퍼하진 못했지만 원인 규명과 책임자 처벌이라는 주민들의 요구를 해소하기 위해 다시 움직일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김광민씨는 현직 변호사로서 경기도의회 의원(교육행정위원회)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태그:#이태원 참사, #이태원, #희생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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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연재 이태원 압사 참사 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법률사무소 사람사이 대표 변호사다. 민변 부천지회장을 역임했고 현재는 경기도 의회 의원(부천5, 교육행정위원회)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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