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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종남씨가 거주하는 마을의 골목
 변종남씨가 거주하는 마을의 골목
ⓒ 변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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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종남씨 고향은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오호리다. 그가 한국전쟁 전 북한 지역이었던 그곳을 떠나 속초에 온 지도 벌써 70년이 넘었다. 변씨는 오호리에 살 때부터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배를 타기 시작해, 한국전쟁이 끝난 후에도 어려운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계속 배를 타야 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는 동안 변씨는 공부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더군다나 해방되던 해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한국전쟁의 피난길에 아버지마저 잃은 그로서는 학교에 다닐 생각은 꿈도 꾸지 못했다고 한다.
 
"오호리에 있으니까 북한에서는 못 살겠다 싶더라고요. 전쟁이 나자마자 아버지하고 주문진, 동해시로 해서 경주까지 피난을 갔었어요. 국군이 북진하는 바람에 고향 땅이 수복이 되어서 다시 고향 오호리로 돌아와 살다가 1.4후퇴 때 국군을 따라 다시 피난을 떠나야 했죠.

그때 아버지가 전염병에 걸려서 피난 내려오던 배에서 돌아가셨어요. 그때부터 저는 아무도 없는 고아처럼 살기 시작했죠. 다행히 피난길에 주문진에서 조카와 작은어머니를 만나 같이 지내기는 했지만 부모 없는 설움을 어디서 말하겠어요."

전쟁이 끝난 후, 그는 선원으로 일했고 나이가 들어 군에 다녀왔다. 제대한 후에도 특별한 기술이 없었던 그는 다시 배를 탔다. 오호리에서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한 후, 먹고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1969년경 속초시로 나왔다. 속초에서 처음 배를 탈 때는 가까운 바다에서 작업하는 자망바리(그물잡이) 선박을 주로 타다가 해부호를 소개받으면서 오징어 배를 타기 시작했다고 한다. 해부호 선장 김재원이 집안 사돈지간이라 그 배를 타기 시작했다고 한다.

해부호에서는 사무장 일까지 겸해야 했기 때문에 무척 바빴다고 한다. 선박이 출항할 때마다 필요한 선원 인력을 채우고, 조업 기간 필요한 물과 음식을 채워야 하며, 조업 후 선주와 선원들의 이익을 나누는 일도 해야 했다. 날이 좋지 않은 날을 제외한 거의 모든 날에 바다로 나가야 했다. 매일 오후 1시나 2시 출항하기 전에 인원과 출항 장비, 물건 준비를 마쳐야 했다. 그렇게 해부호를 타면서 봄, 여름, 가을까지 오징어를 잡고, 겨울에는 명태를 잡았다.
 
"1971년 해부호가 납북될 당시 해부호에 나침반은 있었고 해도나 무전기는 없었어요. 그래서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 힘들었어요. 콤파스 밑에다가 해구도(바다의 밑바닥 지형을 그려놓은 지도) 하나 놓고 대충 항해하는 것이죠. 조업 방향은 대략 선장이 산모양이나 등대를 보고 방향을 잡죠. 동해안은 뭐가 제일 어려운가 하면 북한 수원단 쪽 등대하고 주문진 등대하고 불빛 깜빡이는 게 비슷해서 많이 헷갈려 해요."

배를 끌고 북한으로

1971년 8월에 납북되던 날 날씨가 좋지 않았다. 조업을 마치고 육지에 거의 다 들어왔을 무렵 변씨는 이상한 느낌이 들어 배 뒤편으로 가 바다를 보니, 배 한 척이 불빛을 깜빡이며 쫓아오고 있었다고 한다. 변씨는 그 배가 북한 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고 한다. 새벽녘에 운해가 잔뜩 끼고 비까지 슬슬 내리던 음침한 날이었다고 한다.

조용히 따라오던 배는 어느 지점에 다다르자 기관포를 쏘아대기 시작했다. 선장은 배를 세웠고, 선원들은 두려움에 벌벌 떨었다. 북한 함대에서 배에 줄을 묶으라며 밧줄을 던졌지만 두려움에 아무도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선원 김두익의 삼촌이 나섰다. 그는 귀가 들리지 않는 장애를 가지고 있었기에 기관포 소리를 듣지 못했던 것이다. 다만 북한 배라는 것을 알았기에 그가 배에 줄을 묶었다고 한다. 그렇게 배에 줄을 묶자마자 곧장 배를 끌고 북한으로 넘어갔다. 대략 한 시간 정도 끌려간 곳은 북한 장전항이었다.
 
"북한 배가 50W 엔진을 두 개나 달고 있던 배(해부호는 10W 엔진이었다고 한다)였는데 엄청 빨랐어요. 우리 해부호는 주문진 등대를 보고 들어가던 중이었거든요. 배를 옆에 붙이는 걸 보니까 북한 배 표시가 있더라고요. 북한 배들은 브리지 밑에다가 배 번호를 쓰거든요. 우리 함대들은 선수 쪽에다 번호를 쓰기 때문에 단번에 북한 배인 줄 알겠더라고요."

북한 장전항에 도착하자 항구에 배를 대고 선원들만 내리게 한 뒤 해부호는 어디론가 끌고 갔다고 한다. 선원들이 내린 곳은 황량한 밭 같은 곳이고, 선원들은 그곳에 지어놓은 임시 막사에 들어가 조사를 받았다고 한다. 해부호 선원 명부를 보며 선원 한 사람씩 불러서 조사를 마치자, 선원들은 다시 금강산으로 이동했다고 한다.

금강산 휴양소에서 사흘 머무는 동안 식사는 금강산에 있는 호텔에서 먹고, 잠은 일제 시대 일본인들이 지어놓은 나무집 같은 곳에서 잤다고 한다. 3일째 되던 날 북한 지도원들은 선원들을 금강산에 있는 온천장에 데리고 가더니 그곳에서 옷을 갈아입게 하고는 또다시 이동시켰다고 한다.

금강산을 출발한 일행은 원산을 거쳐 해주에서 며칠간 여관 생활을 하다가 어두운 밤을 이용해 평양, 함흥을 거쳐 백두산 아래에 해산시까지 갔다가 다시 평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리고 귀환할 때까지 머물렀던 장소는 순안에 위치한 성명불상의 휴양소였다고 한다.

변씨 일행이 머물렀던 휴양소 앞에는 커다란 인공호수가 있었고, 겨울이 되면 그 호수가 꽁꽁 얼어 스케이트를 타기도 했다고 한다. 북한에 머물며 주로 했던 일은 북한의 이곳저곳을 견학하는 일이었다고 한다. 주로 신발공장이라든가 농기구 제작소, 제철소, 만경대 같은 북한에서 자랑할 만한 곳들을 다녔다고 한다.

그러나 북한 사람들로부터 개별적으로 교육을 받는다거나 특수한 임무를 받는 일 따위는 절대 없었다고 한다. 그때 당시 같이 납북되어 머물던 명성호, 아야진 배, 대청도 배 선원들 역시 마찬가지 상황이었다고 한다.
 
"그때 북한 배들이 남한 선박을 얼마나 잡아 왔느냐면, 잡혀 온 어선 중에 상고선(장사할 물건을 싣고 다니는 작은 배)이 있더라고요. 그 배에는 할머니 한 명, 아주머니 한 명이 있었다고요. 그 여자들은 대청도에서 인천을 나오려던 사람들이었는데, 당시에는 여객선이 귀하잖아요. 그래서 상고선을 얻어타고 대청도에서 인천으로 나오다가 잡힌 거라. 그래서 선원도 아닌 여성 2명이 있었다니까."

진실규명 하려는 이유
 
1837년생 변종남씨는 청력이 좋지 않아 인터뷰 내내 큰 소리로 대화해야 했다.
 1837년생 변종남씨는 청력이 좋지 않아 인터뷰 내내 큰 소리로 대화해야 했다.
ⓒ 변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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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씨는 1972년 9월 7일 해부호가 남한으로 귀환할 때 속초항을 통해 귀환했다. 북한 함대는 남한 선박을 모두 줄로 엮어 남방한계선 부근까지 내려왔고, 그곳에 미리 나와 있던 남한 해군에게 인계되었다. 선원들은 해군함정에 올라 소독과 인원 점검을 한 뒤, 다시 각자의 배로 올라 해경에 인계되어 속초항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속초항에는 1년 만에 돌아온 선원들을 보기 위해 가족 등이 가득 나와 있었지만 말을 하거나 만나보지 못했다고 한다.

선원들은 모두 차량에 탑승해 곧바로 속초시청 2층에 수용되었다고 한다. 그곳에 수용되어 있는 동안 조사를 받았는데, 조사는 매일 저녁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호명된 선원은 수사관을 따라 길 건너 여인숙에서 조사를 받았고, 조사받고 온 동료들은 초주검이 되어 돌아왔다고 한다. 변씨는 해부호 선원 중 가장 마지막에 조사를 받았다고 한다.
 
"저녁만 되면 한 사람씩 불러 조사했는데, 길 건너 여인숙으로 데려갔어요. 동보극장 옆에 있는 여인숙이었어요. 당시 조사할 때 썼던 여인숙이 세 개였는데 지금은 여인숙 하나만 남아 있더라고. 조사받는 내용에 따라 여인숙이 달랐어요. 난 두 군데 여인숙에서 받았어요. 지금 남아있는 동명여인숙은 북한에서 대학생들 교육상태, 생활 등을 주로 물어보는 조사를 했고, 다른 여인숙에서는 고문을 받았어요.

내가 고문받은 여인숙은 'ㄷ'자 식이에요. 작은 방인데 들어가면 자리가 깔려있어요. 수사관들은 구석방에 집결해 있다가 선원들이 들어오면 방으로 들어오더라고요. 그래서 나도 여인숙 방에 들어가니까 처음에는 아무도 없더라고요. 한 10분정도 있는 동안 때리는 소리, 비명소리같은게 들리더라고요. 그러다가 수사관 3명이 들어오는데 주전자 하나, 물수건 하나 들고 들어오더라고요."

여인숙 방에 들어온 수사관은 속초 수사과 형사들로 안면이 있던 수사관들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속초 수사관들이라고 해서 속초 선원들에게 자비를 베풀지는 않았다. 수사관은 북한에서 대우가 어떠했느냐는 질문을 시작으로 북한에서 받은 지령을 자백하라고 했다. 변씨는 지령 같은 것을 받은 적이 없다고 하자, 수사관들은 장작으로 온몸을 구타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특히 등과 허리를 집중적으로 맞았다.

구타에 못 이겨 쓰러지자 이번에는 미리 들고 온 주전자에 물을 가득 채우고, 물에 적신 수건을 얼굴에 씌웠다. 변씨의 손을 뒤로 하게 한 뒤 수갑을 채우고, 꼼짝하지 못하게 수사관 한 명이 다리를 누르고, 다른 수사관 한 명은 가슴에 올라타 눌렀다고 한다. 그리고 남은 수사관 한 명이 물을 부었다. 그렇게 발버둥 치던 변씨는 결국 까무러쳤다. 기절했던 변씨가 다시 깨어났지만 받지도 않은 지령을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고문과 구타를 하다가 수사관들은 다른 여인숙 방으로 변씨를 데리고 갔다고 한다. 그 여인숙 방은 좀 더 넓은 방으로 중앙정보부 수사관이 있는 방이라고 했다. 중앙정보부 수사관이 묻는 내용 역시 속초경찰서 수사관들이 묻는 내용과 다르지 않았다. 다만 중앙정보부 수사관에게 조사받을 대는 구타나 욕설이 없었다고 한다.

오히려 농담을 섞어가며 마음을 편하게 대해 주었다고 한다. 변씨는 그것이 유도신문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렇게 무서운 고문과 유도신문을 경험한 변씨는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허위 진술이라도 자백해야겠다는 생각에 수사관들이 묻는 대로 그저 '네, 네'라고 답변하였고, 검찰과 법원에 가서도 역시나 허위 사실을 자백하고 인정했다고 한다.

속초법원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난 변씨는 그 뒤로도 배를 탔다고 한다. 배를 타는 동안 집안 사돈지간이 되는 담당 형사가 수시로 찾아와 동향을 묻고 가고는 했다고 한다. 5년 이상 그렇게 감시받고 살았지만, 변씨는 다른 이들에 비해 덜 감시받은 편이라고 했다. 납북귀환문제로 가족 중 피해를 받은 사실이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아들 이야기를 꺼냈다.
 
"아들이 거진 공고를 다녔는데 그 친구들이 학군으로 군에 가려고 했나 봐요. 그런데 아들이 신원조회에서 떨어져서 다른 친구들은 전부 학군으로 군에 가게 되었는데 아들만 학군에서 떨어진 거예요. 그 일 뒤로 아들 녀석이 학교도 안 가고 삐딱하게 되더라고요. 나 때문에 아이들이 피해 보니까 너무 속상하더라고요."

그는 더 늦기 전에 자신의 처벌이 잘못된 처벌이라는 것을 밝히고, 자식들 앞에서 떳떳한 가족이 되고 싶다고 했다. 그저 떳떳한 가장이 되는 것, 진실규명과 재심을 하려는 이유는 그저 그뿐이라고 했다.

태그:#FIGHTING CHANCE, #원곡, #평화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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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아가는 세상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변화시켜 나가기 위해서 활동합니다. 억울한 이들을 돕기 위해 활동하는 'Fighting chance'라고 하는 공익법률지원센터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언제라도 문두드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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