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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좋아하는 시가 하나 있습니다. 튀르키예(옛 '터키')의 시인 나짐 히크메트의 <진정한 여행>이라는 시입니다. 아직 출간하지 않고 간직만 하고 있는 파블로 네루다에 대한 청소년 평전을 준비하던 때 알게 된 시인의 시입니다. 한국인들은 잘 모르지만 네루다도 생전에 흠모한 세계적인 시인입니다.

그는 민중을 사랑한 사회주의 혁명가였고, 평화와 반전을 외친 세계주의 시인이었으며, 사랑을 노래한 로맨티스트였다고 알려집니다. 그는 1921년 모스크바의 동양근로자 대학에 들어가 마야코프스키와 에세닌 등과 사귀다 1924년에 튀르키예로 돌아와 활동하다 독재정권으로부터 무려 55년이라는 중형을 선고받고 옥중에서 17년을 보낸 '감옥의 시인'이었습니다. 죽을 때까지 고국에서는 출판 금지, 국적 박탈을 당하고 타국에서 생을 마감해야 했던 '비운의 작가'이기도 했습니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오르한 파묵은 그가 '20세기 터키 문학사에서 가장 반짝이는 이름'이라고 했습니다. 존 버거가 애송했던 시인이기도 합니다. 그는 독재의 감옥에서 목까지 차오른 '똥통'에 갇히는 탄압을 받으면서도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이 아름다운 시를 썼다고 전해집니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러시아어 번역본을 통해 나짐 히크메트를 사숙하고, 그의 시 37편을 번역해 낸 이는 백석 시인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백석은 널리 알려진 <흰 바람벽이 있어>라는 절창 속에서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로 했는데, 아마도 '그 외롭고 높고 쓸쓸한' 이들 속에 나짐 히크메트도 들어가 있을 듯합니다.

백석 시인은 해방 전후 시기에 조국의 진정한 개화와 해방을 위한 문인선전대 역할을 자원해 전국을 다니기도 했는데 이 이야기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백석 시인 역시 남북 모두에서 한동안 지워져야 했던 '외롭고 높고 쓸쓸한' 시인이었습니다. 남에서는 월북시인이라는 까닭으로 1987년 6월 항쟁 이전까지 이름조차 지워져야 했고, 이념을 좇아 간 북에서는 '낡은 미학적 잔재에 빠져 부르주아적 개인 취미로 흐른다'는 비판을 받고 양강도 삼수군 국영협동조합으로 쫒겨 내려가 축산반에서 양 치는 일을 하며 문학으로부터도 지워져야 했습니다.

그렇게 나짐 히크메트와 백석은 근대의 여러 야만과 혼돈 속에서 뼈아픈 삶을 살아야 했지만, 우리에게 너무나 아름다운 삶의 결들을 남겨 준 잊지 못할 시인이 되어 있습니다. 특정 시기 정치적 격변의 성격과 무관하게 인간다움의 정수를 간직한 예술의 시간은 참 길다는 위안으로 생전에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험난하고, 외롭고, 쓸쓸했을 두 시인의 삶을 추모 드려야 할 듯 합니다.

<진정한 여행>의 짧은 전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쓰여지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려지지 않았다.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
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항해되지 않았고
가장 먼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불멸의 춤은 아직 추어지지 않았으며
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별.
무엇을 해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 비로소 진정한 무언가를 할 수 있다.
어느 길로 가야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가 비로소 진정한 여행의 시작이다.


참 아름답고 벅찬 시죠. 미래에 올 모든 이들에게 이 시를 남겨 준 나짐 히크메트께 참 고마운 마음입니다. (그가 사랑했던 조국, 튀르키예에 근래 지진이 일어나 수많은 이들이 생명을 잃어야 했습니다. 삼가 애도의 마음을 전합니다.)

이 시를 다시 떠올린 건 작년에 이어 '2023 길동무 청년문학학교'를 준비하며 문학이라는 어둡고 흐린 터널 속에서 길을 못 찾으며 고뇌하고 있을 청년문학도들에게 어떻게 이 작은 학교를 소개하고 설명할까를 고민하던 와중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어떤 용기를 전해주어야 할까 고민하던 차였습니다.

맞아. 이렇게 얘기해 줘야지. 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시는',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가장 넓은 바다는', '불멸의 춤은' 쓰여지지 않았고, 불려지지 않았고, 항해되지 않았고, 추어지지 않았다고.

당신이 그 시와 소설과 르포를 쓸 수 있다는 꿈을 전해주고 싶었습니다. 기성세대와 선행자들의 오래된 문법, 그 지나간 역사와 관습들에 주눅들지 말고 아직 열리지 않은 무수한 세계가 있다는 꿈을 가지라고, 그 첫발이 되는 기쁨과 환희를 가져보라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 그때 비로소 진정한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 응원해 주고 싶었습니다. '어느 길로 가야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 그때가 비로소 진정한 여행의 시작이다'라고 나짐 히크메트처럼 용기 있게 말해주고 싶었습니다. 어떤 가식과 허위, 권위와 폭력으로도 막을 수 없는 세상의 진실을 찾아나가 보라고 얘기해 주고 싶었습니다.

여전히 인류의 수많은 다수에게 '똥통' 같은 모욕과 모멸을 선사하며 고립과 소외의 그늘에 갇혀 있을 것을 강요하고 있는 이 자본주의의 감옥으로부터 유쾌하게 탈출해 보라고 얘기해 보고 싶었습니다. '아직 발견되지 않은' '가장 빛나는 별'을 찾아 떠나는 여행에 함께 해보자고 권하고 싶었습니다.

국경과 국적과 피부색을 넘어 나짐 히크메트의 또 다른 친구였던 존 버거처럼 '말하려고 애쓰지 않으면 아예 말해지지 않을 위험이 있는 것들' 때문에 글을 쓴다고 천둥처럼 얘기할 수 있는 친구들이 되어 보자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 꿈이 얼마나 실현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다시 길 떠나는 마음으로 '2023 길동무 문학학교'를 엽니다. 올해는 1년짜리 여행입니다. 그 여행을 응원하기 위해 한국근현대 문학의 큰산이신 염무웅·현기영 선생님께서 선뜻 나서 주시기로 했습니다. 한국 문학의 현재를 지키고 있는 김연수·공선옥·정지아·김탁환·이기호 소설가 그리고 시인 진은영·김해자·박준 외에도 평론가 신형철, CBS PD 정혜윤, 서울대 김명환 교수와 한국인권운동의 버팀목인 조효제 교수, 한겨레 이문영 기자 등이 특별한 손님으로 나서 주기로 했습니다.

소설 담임 강사로는 김서령·이만교 선생이, 시 담임 강사로는 박소란·최지인 시인이, 르포 담임 강사로는 안미선·희정 르포작가가 나서 주기로 했습니다.

무슨 수익이나 허영을 바라고 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 소박하지만 소중한 여행에 당신이 함께할 수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 함께 묻고 상상하며 변화해가는 새로운 문학의 산실! 한국 문학의 미래를 열어 갈 청년 작가들의 유쾌한 커뮤니티! 세계진보문학의 너른 광장으로 당신과 함께 갈 수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
  
2023 길동무 문학학교
 2023 길동무 문학학교
ⓒ 길동무 문학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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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길동무문학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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