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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하나를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라는 말이 있다. 나는 말 그대로 온 마을이 키워낸 아이였다. 낮에 유치원에 다녀와 부모님이 운영하는 만두가게에 책가방만 놓고, 바로 옆집 떡볶이 가게로 간다. 주인아주머니는 안타깝게도 요리에 재능이 없었다. 나는 파리 날리는 가게의 거의 유일한 손님이었다.

엄마의 '후불결제'만 믿고 무전 취식하는 배짱 좋은 손님. 아주머니는 종종 손님을 끌어볼 요량으로 신메뉴를 개발했다. 짜장 떡볶이, 지금은 흔하지만 당시에는 없었던 크림 떡볶이까지. 하지만 반짝이는 아이디어와 달리 떡은 하나같이 질기고 간이 안 베어 이도 저도 아니었던 맛이 기억난다. 난 유일한 손님답게 극진한 대접을 받다가, 배가 차면 맞은편 세탁소로 걸음을 옮겼다.

세탁소 부부 내외 역시 어린 나를 예뻐했다. 내게 세탁소는 보물창고였다. 이따금 깜짝 선물을 받았는데, 그건 주로 손님들이 놓고 가서 몇 년 넘게 안 찾아가는 분실물 상자에 있었다. 대개는 내게 맞지 않는 크기의 반지로, 손가락으로 훌라후프를 해도 될 정도였지만, 운이 좋으면 내 손에 딱 맞는 운명의 반지를 찾을 수 있었다.

그밖에도 팔찌와 키링 같은 작고 빛나는 것들이 오래된 코트 안에 잠자고 있다가 내 선물이 돼줬다. 사장님은 나를 위한 맞춤복도 만들어줬다. 유치원생에겐 다소 과감해 보이는 댄스복을 입은 어린 내가 사진으로 남아있다. 이렇게 나는 셀 수 없이 많은 가게와 이웃집을 유랑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맞벌이로 만두가게를 운영하는 우리 부모님에게 마을이 든든한 공동양육자가 돼 준 것이다.
 
세탁소 사장님이 만들어주신 댄스복.
 세탁소 사장님이 만들어주신 댄스복.
ⓒ 김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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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요즘 육아는 다르다. 내겐 여섯 살 난 조카가 하나 있다. 언니는 같은 아파트에서 육아맘 커뮤니티를 형성했다. 서로 품앗이하듯 아이를 봐준다. 하지만 우리 부모님이 그랬듯이 언제나 아무 때나 불시에 아이를 맡길 수 있는 건 아니다. 그 시절엔 잠깐 아이를 이웃집에 맡기고 약속에 다녀오는 것도 가능했지만, 지금은 기껏해야 양가 부모님 댁 혹은 정말 잘 알고 지내는 아이 친구 엄마에게 맡기는 게 전부다.

언니는 가끔 조카를 혼내다가 감정이 격해질 때면 혼잣말로 이렇게 읊조린다. "아니야, 오은영 선생님은 날 이렇게 가르치지 않았어. 아이한테 감정적으로 굴지 말자." 다혈질 언니가 오은영 선생님을 소환하면서까지 인내하는 모습이 웃기면서도 측은하다.

부모로서도 한 인간으로서도 놓치지 말고 살아야 할 게 너무 많은 시대 같다. 우리가 부모로부터 결핍된 부분을 아이에게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 틈틈이 배우고 적용해 보려 하지만, 결국엔 우리도 아이에게 새로운 결핍을 주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조카의 환한 얼굴과 튼튼한 팔다리를 보고 있으면, 부모의 사랑으로 자란 아이는 그 어떤 결핍도 이겨낼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든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어릴 적 받았던 만큼의 마음을 베푸는 동네 이모는 못 될 것 같다. 하지만 육아라는 고된 수행 길을 엿본 이웃으로서, 모든 육아하는 부모들을 진심을 다해 지지하고 응원하고 싶다.
 

태그:#육아, #오은영, #추억,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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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는 번역가ㅣ밤에는 작가ㅣ곁에는 러시아에서 온 쿼카. 그날 쓰고 싶은 말을 씁니다. 어제의 글이 오늘의 글과 다를지라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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