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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치유 글쓰기 프로그램에서 만나 시민기자가 된 그룹입니다. 20대(Z), 30대(M), 40대(X)까지 총 6명의 여성들로 이뤄진 그룹 'XMZ 여자들'은 세대간의 어긋남과 연결 그리고 공감을 목표로 사소하지만 멈칫하게 만드는 순간을 글로 씁니다.[편집자말]
말하기 전에 생각했나요? 이미지
 말하기 전에 생각했나요? 이미지
ⓒ 한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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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기 전에 생각했나요?"

SNS를 자주 사용한다면 4개의 귀여운 캐릭터들이 해맑은 표정으로 이렇게 묻고 있는 이미지를 한 번쯤은 봤을 것이다. 인터넷 풍화에 닳고 닳은 사진으로, 주로 생각을 거치지 않고 말을 내뱉는 사람들에게 쓰는 밈(meme) 중 하나이다.

그렇다면 이 밈은 왜 생겼을까? 나는 그 이유가 SNS의 익명성에 있다고 생각했었다. 가상의 이름 뒤에 숨어서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가리지 못해서라고. 하지만 최근에는 SNS와 현실이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무례함을 솔직함이라 포장하고 예의 없는 행동을 본인의 매력이라 말하는 사람들이 자주 보이기 때문이다. 익명성이 보장되지 않는 일상에서조차 누군가가 아무렇지 않게 내보이는 무례함을 마주할 때면 더욱.

겨울이 지나고 봄의 초입에 들어설 때쯤이었다. 나는 여느 때처럼 음악을 들으며 기분 좋게 개나리가 피기 시작한 산책길을 걷고 있었다. 개천의 물길이 넓어지기 시작하는 곳을 지나 살곶이 다리 근처에서 잠시 쉬기 위해 벤치에 앉았을 때였다.

"야, 앞에 똑바로 안 봐?"

누군가가 지나치게 큰 목소리로 내뱉은 말은 귀에 꽂고 있던 이어폰을 뚫고 들어왔다. 반사적으로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기 위해 고개를 돌렸을 때, 주변에 있던 사람들 역시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리가 난 곳은 내가 앉아있던 벤치 근처에 있는 산책로였다. 상황이 궁금해 이어폰 한쪽을 빼니 말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한 사람은 죄송하다며 사과하고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격양된 목소리로 화를 내고 있었다. 그리고 들려온 다음 말은 순간 내 귀를 의심하게 했다.

"이게 눈이 멀었나. 미안하면 다야?"

많이 순화해서 적었지만 실제로 들은 말은 훨씬 더 무례하고 예의 없는 말이었다. 저 사람이 과연 생각이라는 걸 거치고 말하는 걸까 싶어질 정도로. 나에게 하는 말이 아님을 알면서도 더없이 불쾌한 기분이 들었던 경험이었다.

사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나와 했던 약속' 하나가 있다. 말하기 전에 3번 생각하기. 처음에는 머릿속에서 우후죽순으로 떠다니는 문장들을 정리하기 위해서였지만, 시간이 지난 지금은 나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누군가에게 무례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 지키는 하나의 습관이 되었다.

무심코 내뱉은 말이, 별생각 없이 던진 말이 타인에게 쉽게 비수가 되어 날아가는 것을 너무 많이 봤기에. 말의 무게가 가볍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날부터 타인으로 인해 내가 다칠지언정, 내가 타인을 다치게 하지는 말자는 마음으로 약속한 것이다.

덕분에 말을 하기 전에는 항상 머릿속으로 작은 공장 하나가 돌아갔다. 머릿속에 가득 찬 단어와 문장 사이에서 쓸 만한 말을 가져와 선별한 말을 이어 붙이고, 애매하거나 오해의 소지가 있는 단어는 바꿨다. 마지막으로 어색한 부분은 없는지 한 번 더 점검하고는 문장을 입 밖으로 내보낸다.

이렇게 3번 정도 생각하고 말하기까지 대략 5초의 시간이 걸렸다. 다르게 보면 이 5초만으로 내가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말이나 무례한 말을 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생각해도 꽤 괜찮은 습관이었다.

처음에는 한 문장을 3번씩 생각하는 것에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말과 말 사이에는 자주 긴 텀이 생겼고, 그 사이에 다른 누군가가 하는 이야기를 듣지 못해 말이 엇갈리는 일도 많았다. 주위의 말을 들으며 3번 생각하고 입을 열면 이미 주제가 넘어가 있거나 말을 하기 애매한 순간이 되어 대화의 타이밍을 놓친 적도 많았다.

이러한 해프닝마저도 익숙해진 지금은 같은 상황이 생길 때면 자연스럽게 정리한 문장을 한쪽에 치워두고 다시금 대화의 흐름을 따라가는 요령이 생겼다. 생각하는 시간을 줄이는 게 먼저여야 하지 않았나 싶지만, 원래 마음처럼 쉽게 되는 일은 없는 법이니까.

하지만 가끔은 오랜 시간 지켜온 이 약속을 흔들리게 만드는 상황이 찾아올 때도 있다. 누가 들어도 생각을 거치지 않은 무례한 말이 나, 혹은 내 주변 사람들을 향해 날아오면 머릿속에 가득하게 떠오르는 험한 말을 그대로 내뱉어버리고 싶어지는 것이다. 다행히도 이성의 끈을 놓아버리지는 않아 이내 그 단어들은 한쪽 구석으로 치워버리고 대체 단어를 찾아냈다.

예를 들면 '아니 저 인간이?'라는 문장을 '저기요. 그쪽이 먼저 잘못하셨잖아요'로 바꿔 말하는 것이다. 보다시피 이런 상황에서 생각을 거쳐 완성된 문장이 그리 곱지는 않지만 어쨌든 이만큼이나 생각하고 말했으면 나는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를 다했다고 본다. 

사실 아직은 '저 사람은 나한테 저런 식으로 말하는데, 내가 왜 곱게 말해줘야 하지?'라고 생각할 때가 더 많지만, 그럴 때마다 저런 사람들과 내가 같은 인간이 될 수는 없다는 생각으로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는다. 

3번 생각하고 말하기. 3번 생각하고 말하기. 3번 생각하고 말하기. 

그룹 'XMZ 여자들'은 세대간의 어긋남과 연결 그리고 공감을 목표로 사소하지만 멈칫하게 만드는 순간을 글로 씁니다.
태그:##말, ##대화, ##나의습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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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게 흘러가는 것들을 사랑하는 20대. 평범한 일상의 순간을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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