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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새로운 길에 섰습니다. 늘 누군가의 엄마로, 아내로 살아온 삶을 마무리하고, 이제 온전히 '내 자신'을 향한 길을 향해 가보려 합니다.[기자말]
"선생님, 머리 하셨네, 많이 기르셨네요."

오랜만에 만난 지인의 말이다. 그 분의 말이 아니더라도 사실 머리가 많이 길었다. 파마 했냐는 말도 종종 듣는다.

작년에 도너츠를 튀기는 일을 할 때 모자를 쓰고 했다. 그런데 빵떡같은 모자는 흘러나오는 머리칼을 다 수습해주지 못했다. 제일 나은 방법은 질끈 묶는 것이었다. 그래서 기르기 시작했다.

또 하나, 여유가 없던 시절, 내가 돈을 아낄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생각해 보니 '미용실'을 가지 않는 것이었다. 돈 만 원이면 자를 수 있는 데도 있었지만 당시는 그 정도도 사치였다. 대신 싼 미용 가위를 샀다.
 
미용 가위
 미용 가위
ⓒ 일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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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서없이 삐죽삐죽 나온 것들을 치고, 숱을 정리해주는 용도였다. 게다가 나도 모르는 새, 머리에 '땜빵(원형탈모)'이 생겼다. 내 몸이 '그동안 나 스트레스 받았어'라며 자기 주장을 한 결과인 듯했다. 머리를 짧게 칠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가 생긴 것이다.   

예전에도 머리를 길러 보려고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조금 기르면 지저분해지거나, 답답한 그 상태를 견디지 못해 미용실로 달려가곤 했었다. 어울리지도 않는 것 같았다. 지금도 기억난다. 큰 아이가 초등 4학년 때 제법 긴 머리를 자르고 온 엄마를 어찌나 서운해 하던지.

그때 이후로는 머리를 묶을 정도로 길러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상황이 상황이다보니 길러진다. 아니 정확하게는 머리 모양에 신경쓸 여유가 없었다. 그저 흉하지 않게 조금씩 다듬다 보니 일년 여가 지났고, 반곱슬이라 제 멋대로 구부러진(내 개인적으로 미친 년 널 뛰는 스타일이라 생각하는) 내 머리를 보고 사람들이 파마를 했냐고 물어보기에 이르렀다. 아주 흉하지는 않나보다. 

그런데 '파마 하셨냐?'는 인삿말을 들으니 사는 게 참 묘하다는 생각이 든다. 구구절절 이유를 썼듯이, 의도치 않게 기르게 된 머린데...... 예전에 내 머리에 신경을 쓸 때는 '어울린다'는 내 고정 관념에 사로잡혀 커트에 가까운 단발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제법 덥수룩해진 모습이다. 예전 그대로였으면 몰랐을 나의 다른 모습이다. 지난 3년간 내가 지나온 시간도 이와 같지 않을까. 나이가 들어간다는 건, 물리적 시간의 흐름과 함께, 그간 살아온 삶의 경험들이 축적되어가는 시간이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쌓여 굳어진 자신을 만들기도 한다. 살아온 시간만큼 배우고 익혀  쌓인 '習(익힐 습)'이 어느 틈에 자신만의 濕(젖을 습)이 되어가는 시간이기도 한 것이다. 

나 역시도 그랬다. 학생같은 짧은 단발을 고수해왔듯이, 아이를 키우고, 글을 쓰고, 가르치며 살아왔던 시간을 거치며 '나'라는 삶을 다 이루어 내었다고 부지불식간에 생각했던 듯하다.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는 자기만의 확고한 세계관이 형성되었달까. 그래서, '다 살았다'니, '더는 이룰 것이 없다'니 하는 오만한 판단을 내렸던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제법 오래 가르치는 일을 해서일까. 어디 가서 사람들을 만나면 '선생님'같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그런데 그 '선생님'이란 '페르소나'가 어느 틈에 내 자신으로 굳어졌던 듯하다. 즉 그 말은 언제나 내가 옳고, 내 결정은 맞다는 그런 고집같은 것들이 생겼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얼마 전 지인을 만났는데, 동네 어르신들이랑 여행을 다녀왔다고 한다. 월미도 유람선을 탔는데, 온갖 군데 아프시다는 어르신들이 유람선에서 제공한 유흥에서 신나게 흔드시더란다.

지인은? 상대적으로 젊은 축에 속하던 지인은 자기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며 한사코 그 자리를 피했다는데. 자기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그 얘기를 듣는데 나도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나 반추하게 되었다. 폼나는 거, 고상한 거, 심오한 거 그리고 영원한 거에만 연연하며 살아오지 않았나 싶은 거다.

그 말인즉 내가 폼나고, 고상하고, 심오한 사람이라는 착각에 빠져 살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위대한 철학자 니체도 '바스락거리는 도마뱀 몸짓같은 찰나'가 최상의 행복을 만든다고 일설하는데 내가 뭐라고.

그런 섣부른 자기 완성에 다행히도(?) '인생'이 제동을 걸었다. 본의 아니게 가보지 않았던 길에 던져지게 된 시간 동안, 자의에 의해서든, 혹은 피치 못해 한 것들이 '나'의 새로운 경지를 열어주었다. 

돌이켜보면 기특했구나 싶은 결정이 그림책 공부를 시작한 것이다. 그림책과 심리를 함께 공부하는 시간이었는데, 그를 통해 '내 자신'을 돌아보는 첫 발을 내디딜 수 있었다. 그 첫 시간, 강사는 어린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세 가지를 적어보라 했는데, 그게 뭐라고, 켜켜이 쌓였던 속내들이 봇물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니 나라는 사람을 얽어매고 있는 것들이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들여다 본 나는 '선생님'은커녕, 어찌나 감정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인간이던지, 그리고 내가 확고하게 믿는 것들은 또 어찌나 얄팍한지... 끝도 없다. 거기에 일신 상의 변화를 겪으며 또 한번 삶과 관계에 대한 생각들이 롤러코스터를 탔다. 하늘 아래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이 다 요동을 쳤다. 

이 시리즈를 쓰면서 종종 나는 '심리'를 비롯해서, 사주, MBTI 등을 들먹인다. 솔직히 귀가 얇은 내 자신이 어디서 이렇다더라 하면 솔깃해 하는 편이라서 그렇기도 하다. 그런 것들을 섭렵하며 '나'라고 생각했던 내 모습을 다른 각도에서 보게 되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ING'이다. 여전히 '나'에 대한 탐구 모드다. 그 '다 산  것'같던 내가 여전히 아직 더 한참 '도닦아야 할' 내가 되었다. 갈 길이 멀다. 그런데 그게 제멋대로 자란 내 머리처럼 또 그런대로 괜찮다.

'허물벗지 않은 뱀은 죽고 만다. 인간도 완전히 이와 똑같다. 낡은 사고의 허물 속에 갇혀 있으면 안쪽부터 썪기 시작해 끝내는 죽고 만다. 늘 새롭게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사고의 신진대사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 다른 니체의 말이다. 내가 낡은 허물을 붙잡고 있으니 내 삶이 나를 밀어부친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보곤 한다. 덕분에 죽지 않고, 이렇게 또 새로운 나를 찾아가는 여정에 서 있다. 삶은 결국 '나'에 이르는 여정이라더니 이게 그건가 싶다.

태그:#낼 모레 육십, 독립선언서 , #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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