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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시간 삶의 ‘흔적’이 쌓인 작은 공간조직이 인접한 그것과 섞이면서 골목과 마을이 되고, 이들이 모이고 쌓여 도시 공동체가 된다. 수려하고 과시적인 곳보다는, 삶이 꿈틀거리는 골목이 더 아름답다 믿는다. 이런 흔적이 많은 도시를 더 좋아한다. 우리 도시 곳곳에 남겨진 삶의 흔적을 찾아보려 한다. 그곳에서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를 기쁘게 만나보려 한다. [기자말]
남한산성 아래 넓은 분지다. 반세기 전, 이곳에 의도적으로 이식되어 도시가 탄생했고 과정에서 큰 아픔을 겪어야 했다. 지금도 비좁은 골목과 작은 필지, 밀집된 주거 기능이 상흔처럼 남았다. 이 공간이 생존권을 다투던 항거 현장이었음을 기억하는 이 몇이나 될까?
 
신흥역에서 수정구 보건소로 넘어가는 언덕. 폭 좁은 도로가 대단지 보조간선 역할을 하고 있음. 언덕 아래 수정구 보건소 주변이 항쟁 중심부.
▲ 언덕길 신흥역에서 수정구 보건소로 넘어가는 언덕. 폭 좁은 도로가 대단지 보조간선 역할을 하고 있음. 언덕 아래 수정구 보건소 주변이 항쟁 중심부.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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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은 여러 이야기의 배경이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윤흥길 소설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가 있다. 작가는 '대학 나온 안동 권가 기용씨'를 등장시킨다. 출판사 다니는 지식인 권씨는, 내 집 마련 꿈을 꾸며 경기도 광주 대단지에 분양증서를 사 이주해온 '전매입주자'다. 또한 '광주 대단지사건(8.10 성남 민권운동)'의 주동자이기도 하다. 이처럼 이야기 속 등장인물 모두가 절대빈곤층이다.

그렇게 형성된 공간이 성남 구시가지다. 현재 2∼4층 다가구와 다세대가 대중을 이룬다. 재개발 압력도 무척 거세고, 도시 문제도 여럿 산적해 있다. 그러함에도 이 공간이 겪은 아픔만은 반드시 되짚어봐야 한다는 생각이다.

광주 대단지

1966년 서울 무허가 주택 13.7만 동에 거주하는 절대빈곤층이 130여만 명이었다. 집 한 채에 평균 9.3명 거주하는 열악하기 그지없는 상황이다. 서울시장 김현옥은 1968년 660만㎡(200만 평)의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지구 일단의 주택단지 경영사업' 시행계획을 발표한다.

시민아파트에 수용될 85만을 제하고, 나머지는 서울시 밖으로 강제 이주시킨다는 계획이다. 45여만 명 수용 계획의 광주 대단지 탄생 배경이다.
 
조성 초기 모습으로, 급하게 지어 올린 흔적이 역력한 집들이 즐비하다.
▲ 광주 대단지(1968) 조성 초기 모습으로, 급하게 지어 올린 흔적이 역력한 집들이 즐비하다.
ⓒ 서울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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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계획은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는다. 애초부터 개발할 돈도 없었고 오직 몰아내려는 의도만 있었다. 서울시는 공영개발을 채택하지 않는다. 투기를 조장해 단기간 개발이익을 노린, 이름도 모호한 '경영행정방식'으로 사업을 진행시킨다.

시행 과정에 문제가 드러난다. 서울시는 땅을 시세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평당 400원에 강탈하다시피 빼앗아간다. 광주로 가면 집은 물론 일자리도 알선해 준다는 말로 현혹하여, 택지를 조성하기도 전에 도시빈민을 속이거나 혹은 강제로 실어 나른다.

하지만 현실은 딴판이다. 일자리는커녕 거주공간도 형편없다. 큰 군용천막에 네댓 가구가 장롱 등 가구로 칸을 막고 살아야 했다. 식수와 전기는 물론 밥 끓일 연료도 변변치 않다. 공용화장실도 12곳에 불과해, 나무를 베어낸 민둥산이 분뇨로 아수라장이다. 뒤이어 찾아온 건 전염병이다. 이질, 설사는 물론이고 콜레라가 창궐한다.

1970년 초여름엔 수인성 전염병으로 하루 3∼4명이 죽어 나갈 지경이다. 환경은 이제 생사가 걸린 현실이 되어, 병균이 이들을 습격한 것이다. 하지만 1971년이 되어도 도시기반시설은 공급되지 않는다. 강제로 이주시킨 후 사실상 방치한 꼴이다.
 
항쟁 1년 전 모습으로 비포장 도로 옆으로 천막이 열을 지어 늘어서 있다.
▲ 광주 대단지(1970) 항쟁 1년 전 모습으로 비포장 도로 옆으로 천막이 열을 지어 늘어서 있다.
ⓒ 서울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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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나자 문제점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인구 15만 명을 한 곳에 모아놓으면, 자기들끼리 찧고 볶고 어찌어찌 살아가리라던 애당초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간다. 빈민들이 아사 직전 상태로 내몰린다. 취업자는 5% 미만이다.

국가와 땅장사

서울시는 투자비 회수에 전전긍긍한다. 투자비는 유보지 매각으로 무난히 회수하리라 계산했다. 싸게 땅을 사, 수십만을 이주시키면 절로 땅값이 오르리라 여겼지만 반대였다. 이에 서울시가 언론매체를 동원, 광주 대단지가 마치 신천지인양 선전한다.

여기에 투기꾼이 반응한다. 이들이 노린 건 '분양증(딱지)'다. 딱지가 대대적으로 투기꾼 수중에 들어가, 값이 부풀려 팔려나간다. 광주 대단지가 떴다방으로 기승을 부린다.
 
소형차 1대 세우기에도 벅차 보이는 골목.
▲ 골목1 소형차 1대 세우기에도 벅차 보이는 골목.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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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사 직전 철거민은 정반대다. 강제 이주자 1/3은 딱지를 팔고 서울로 되돌아간 상태였고, 2/3도 딱지 매각 후 대단지 주변 하급지에 무허가 주택을 짓고 거주하고 있었다.

소설 속 안동 권씨는 불법 전매로 딱지를 산 경우다. 당시 거금인 20만 원을 들여 20평 땅을 매입한다. 이런 안동 권씨들이 부지기수였고, 이는 항거의 핵심적 요인으로 작용한다.

1970년 국회의원 보궐선거 때 딱지 가격이 천정부지로 뛴다. 7월이 되자 서울시는 부랴부랴 '분양증 전매 금지와 전매입주자는 분양증 매입 시세로, 철거민은 조성원가로 분양지를 매입'해야 한다는 방침을 발표한다. 하지만 이듬해 대선(4월)과 총선(5월)이 있어 방침은 시행되지 못한다.

1971년 선거철에 박정희 오른팔 차지철이 이곳 후보로 나선다. 그는 '토지무상양여, 5년간 면세'라는 현실성 없는 공약으로 땅값 상승을 부채질한다. 설상가상 대선 때 남발된 개발계획이 투기 광풍을 일으킨다. 선거자금이 유입되어 유동성이 확대되고 투기꾼이 바람을 잡자 땅값은 또 올라간다.

양대 선거가 끝나자 유동성이 바닥을 보이고, 단물 빼먹은 투기꾼이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그러자 땅값이 곤두박질친다. 비상이 걸린 서울시는, 비용 회수와 투기 규제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아낼 생각을 한다. 1970년 방침을 전격 단행한다. 이에 특히 전매입주자가 타격을 받는다. 20만 원을 들여 딱지를 샀던 이들이, 급지(級地)에 따라 평당 8000∼1만6000원을 추가 부담해야 할 처지로 내몰린다.
 
사진 좌측 1970년대 지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집이 남아 있음.
▲ 골목2 사진 좌측 1970년대 지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집이 남아 있음.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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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기름이 부어진다. 경기도가 미등기 택지에 '10평당 3000원 취득세를 납부'하라는 고지서를 발부한다. 서울시는 입주예정자에게 1개월 안에 집을 지어 입주하지 않으면 분양을 취소하겠다며 으름장을 놓는다. 분위기가 흉흉해진다. 어렵사리 구한 땅을 앉아서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이 팽배해진다.

아홉 켤레 구두만 남긴

이때 대단지 인구는 15만∼16만 명이다. 이들은 집단 저항을 선택한다. 이해관계가 극명한 전매입주자 주도로 '분양지 불하가격 시정위원회'를 조직, 고위 공무원 출신으로 지역에서 철거민 사업 중이던 제일교회 '전성천 목사'를 내세운다.

5개 요구 조건이 담긴 진정서를 당국에 제출한다. 위원회는 하위단위까지 조직을 넓혀, 산발적 시위를 전개한다. 하지만 서울시와 경기도, 내무부는 냉담하다. 전성천 목사가 국무총리이던 김종필에게 도움을 구하나, 청와대 아니면 문제해결이 어렵다는 답을 듣는다.
 
1971년 8월 10일 항쟁 모습. 시위 중 차 위에 올라가 연설하는 것으로 보임.
▲ 항쟁1 1971년 8월 10일 항쟁 모습. 시위 중 차 위에 올라가 연설하는 것으로 보임.
ⓒ 서울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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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위별 대표를 망라해 350명으로 확대 개편, '투쟁위원회'로 전환한다. 위원회는 주장과 구호가 담긴 전단지를 살포하며 강경 투쟁에 돌입한다. 서울 부시장이 8월 9일 현장을 방문, 타협을 시도하지만 무산된다. 이에 양택식 서울시장이 다음날 직접 협상에 나서겠다는 소식을 전해온다.

8월 10일은 비가 내렸다. 인분이 난무한 벌거벗은 산자락도 축축하다. 약속한 11시가 되자, 시민 3만여 명이 성남출장소 뒷산을 가득 메운다. 각양각색의 주장이 적인 플래카드와 피켓을 들고 서울시장을 기다리나, 30분이 지나도 모습을 보이지 않자 술렁인다.
 
1971년 8월 10일 항쟁 모습으로, 분주한 차량과 군중은 물론 분주히 뛰어 다니는 사람들이 보임.
▲ 항쟁2 1971년 8월 10일 항쟁 모습으로, 분주한 차량과 군중은 물론 분주히 뛰어 다니는 사람들이 보임.
ⓒ 서울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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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체된 시간만큼 분노가 쌓여간다. 가난 외에 잃을 것도 없는 사람들이다. 플래카드와 피켓이 순식간에 각목과 몽둥이로 뒤바뀐다. 불끈 쥔 주먹과, 상기된 얼굴에 벌건 핏줄이 돋는다. 11시 45분 사업소가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인다. 분노한 군중이 여러 관공서를 돌며 집기를 부순다. 12시 20분 성남출장소를 불태우려 시도한다. 소방차는 물론 100여 경찰도 속수무책이다. 지나는 차 10여 대를 탈취, 이곳저곳 질주하며 시위를 벌인다.
 
8.10 성남 민권운동(광주 대단지 사건)의 중심부임을 기억하기 위해 현 수정구 보건소에 세워진 조형물.
▲ 수정구 보건소 8.10 성남 민권운동(광주 대단지 사건)의 중심부임을 기억하기 위해 현 수정구 보건소에 세워진 조형물.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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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들어 경찰 700명이 출동한다. 시위는 격화되어 14시 30분경 성남지서를 부숴버린다. 청년들이 10여 대 버스를 탈취해 서울진출을 시도한다. 박정희를 만나 직접 하소연하겠다는 참으로 순진하고 소박한 생각이다. 그러나 수진리 고개에서 경찰의 막강한 저지선에 막히고 만다.

예상치 못한 격렬함에 지도부도 당황한다. 양택식이 직접 협상테이블에 마주한다. 위원회는 주민생계와 도로 확장, 공장 건립과 5년간 세금 면제 등 5가지 요구 조건을 제시한다. 이에 양택식은 불하 가격과 생계용 구호양곡 방출, 취득세 면제를 위한 노력과 공장을 가동하겠노라 약속한다. 17시가 지나고 있었다.
  
1971년 8월 10일 오후, 서울시장 양택식이 항쟁 대표부와 협상했다는 자리에 세워진 조형물.
▲ 단대 오거리역 1971년 8월 10일 오후, 서울시장 양택식이 항쟁 대표부와 협상했다는 자리에 세워진 조형물.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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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1일, 구호양곡 등이 주민 대표에게 전달된다. 며칠 후 20여 주동자들이 연행되어, 9월 9일 구속·기소된다. 정권은 언론을 봉쇄, 항쟁 숨기기에 급급하다. 몇몇 양심적인 기자와 작가가 르포를 썼을 뿐이다.

2021년 한국 지니계수(빈부격차와 계층간 소득의 불균형 정도를 나타내는 수치)가 0.33이다. 나아졌다지만 여전한 불평등을 수치는 말하고 있다. 지금 빈곤 속에 살아가는 그들도, 우리와 같은 공기를 마시며 살아간다. 빈민도 36.5℃ 체온을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끝까지 기억했으면 좋겠다.

태그:#광주_대단지, #8.10_성남_민권운동, #성남_구시가지, #아홉_켤레_구두로_남은_사내, #철거민_전매입주자_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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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레 타인과 소통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래도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소통하는 그런 일들을 찾아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보다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서로 교감하면서,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풍성해지는 삶을 같이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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